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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321화 (321/530)
  • 321화. 승패의 향방

    아미파 십이선사는 결코 허명이 아니다.

    지심은 자신 앞에 선 빙설이 결코 범상한 상대가 아님을 알아차렸다.

    그와 동시에 지심의 기세도 변했다.

    스윽.

    들끓던 분노가 차분히 가라앉았다.

    반드시 죽이겠다던 결의도 어느새 사라졌다.

    오직 고요한 물처럼, 지심의 마음은 청명함 가운데 천천히 가라앉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우우웅.

    지심의 검이 울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낯선 기운이 그녀의 칼날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거, 검기!”

    사람들의 안색이 일시에 변했다.

    이제는 더 이상 환우오천존의 전유물이 아니게 되었으나 그래도 검기는 여전히 절정고수의 상징이었다.

    거대 문파들조차 비장의 한 수로 남겨 두는 이들이 바로 검기발현의 절정고수다.

    그런데 지금 지심이, 십이선사 중 가장 젊은 데다 첫 비무자인 그녀가 검기를 일으킨 것이다.

    각 세가 책임자들의 얼굴이 굳고 당설련조차 긴장한 모습을 감추지 못했다.

    ‘아니, 십이선사 전부가 저 정도는 아니야.’

    당설련은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했다.

    십이선사가 전부 검기발현의 경지라면 무림맹이 무너질 때 셋이나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지심의 검기는 십이선사 중에서도 예외적인 경우로 보는 것이 타당했다.

    ‘그녀 외에도 가능성이 있다면…….’

    지심이 첫 비무자로 나선 이상 검기발현의 절정고수가 적어도 한 명은 더 있다고 보는 것이 옳았다.

    처음부터 최고수를 내보내 소모시키지는 않을 테니까.

    ‘법영 사태일까?’

    십이선사 중 둘째인 법영의 무공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었다.

    당설련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아미파 승려들을 살폈다.

    그러나 삼십여 명 남짓한 승려들 중에 당설련의 눈에 띄는 사람은 더 이상 없었다.

    ‘흥, 어차피…….’

    오늘 아미가 무너진다는 결과는 변함이 없다.

    당설련은 다시 비무로 시선을 돌렸다.

    지심의 검에서는 여전히 검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우우웅.

    빙설의 눈빛 역시 기세를 잃지 않고 있었다.

    아직 나타나지 않은 그녀의 검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승패가 결정날 것을 지심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자신의 뜻대로 비무를 이끄는 것이 낫다.

    지심은 선공을 하기로 결심했다.

    “타하!”

    쩌렁쩌렁한 기합 소리가 지심으로부터 터져 나왔다.

    그리고 검기가 허공을 찢었다.

    부욱.

    땅을 박찬 지심은 화살처럼 빙설을 향해 짓쳐 들었다.

    그리고 그제야 빙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스릉.

    감춰 있던 빙설의 칼날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심은 승리를 확신했다.

    ‘됐다.’

    빙설의 눈빛은 여전했으나 그녀의 검은 너무나도 느렸다.

    이대로라면 검이 채 뽑히기도 전에 지심의 검이 빙설을 반으로 갈라 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바로 그때였다.

    ‘헉.’

    빙설의 입가에 가늘게 미소가 걸린다 싶은 순간, 온 세상이 멈춰 서고 있었다.

    하늘도, 땅도, 자신의 검 끝에서 갈라지는 바람조차 느릿하게 움직였다.

    오직 단 하나의 예외는 바로 빙설의 검이었다.

    스윽.

    모습을 드러낸 빙설의 검이 지심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하지만 지심의 검은 한 치도 제대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이, 이게 무슨.’

    후욱.

    빙설의 검은 유려하게 바람을 가르며 지심을 향했다.

    지심은 대경실색하여 검을 거두려 했지만 손끝 하나 자신의 뜻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아니, 움직일 수는 있으되 너무나도 느렸다.

    사락.

    그사이, 빙설과 지심의 검이 허공에서 만났다.

    빙설의 검 끝이 마치 나비처럼 사뿐히 지심의 검 끝에 내려앉은 순간.

    쿵.

    엄청난 힘이 지심을 짓눌렀다.

    “헉!”

    콰직.

    지심의 발밑이 움푹 꺼져 들어갔다.

    마치 태산과도 같은 압력이, 검을 쥔 손뿐만 아니라 온몸을 내리누르고 있었다.

    지심은 반사적으로 그 힘을 흘리려 했다.

    하지만 그럴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퍼엉.

    엄청난 힘이 지심을 강타했다.

    지심은 실 끊어진 연처럼 속절없이 뒤로 날아갔다.

    “지심!”

    법영이 놀라 외치는 순간, 혜령은 이미 지심을 향해 몸을 날리고 있었다.

    휙.

    혜령은 크게 두 팔을 벌려 지심을 안아 들었다.

    퍼억.

    ‘윽.’

    지심을 통해 전해지는 엄청난 힘에 혜령은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결코 지심을 놓칠 수는 없었다.

    탁, 탁, 탁.

    혜령은 세 걸음을 뒤로 물러섰다.

    그러고 나서야 간신히 균형을 잡을 수 있었다.

    “사매! 괜찮은가?”

    그러나 지심은 이미 의식을 잃은 뒤였다.

    혜령은 급히 그녀의 혈을 두드리고 맥을 살폈다.

    “후우.”

    큰 충격에 의식을 잃었을 뿐, 심각한 내상을 입은 것은 아니었다.

    이 지경이 되도록 놓지 않은 검이 그녀의 각오를 말해 주는 듯했다.

    “빨리 안으로!”

    법영의 말에 여승 몇이 달려갔다.

    그제야 사람들도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뭐, 뭐야? 어떻게 된 거야?”

    “무슨 일이지? 갑자기 날아간 것 같았는데…….”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차릴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하지만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두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스릉.

    빙설이 천천히 검을 거뒀다.

    그녀의 검이 칼집 안에 다시금 되돌아가는 모습을,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쳐다보았다.

    탁.

    빙설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다음 비무자를 재촉하듯이.

    “후후.”

    삼궁주가 웃었다.

    “잘했어, 빙설. 조금 무리한 것 같긴 하지만 말야.”

    그녀도 빙혼도 알고 있었다.

    조금 전 빙설의 그 검은, 짓쳐 드는 기마대를 상대로 운현이 보여 주었던 것과 너무나도 닮아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래도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무엇보다 오만하던 태평맹 사람들이 놀라 웅성거리는 것이 삼궁주는 뿌듯하기까지 했다.

    놀란 것은 당설련도 예외가 아니었다.

    “어떻게 된 거죠?”

    자신도 모르게 당설련이 물었다.

    그녀 뒤에 서 있던 키 작은 노인이 나지막이 답했다.

    “이화접목의 수를 쓴 것 같구나.”

    노인, 당벽후는 당문이 숨겨 놓은 비장의 한 수였다.

    독선을 제외하면 당문 내에서도 상대가 없다는 독기공의 절정고수가 바로 당벽후다.

    “이화접목이라고요?”

    상대의 힘을 역이용하여 결과를 뒤틀어 버리는 것이 이화접목의 수법이다.

    그러나 그건 상대의 초식과 내력운용을 완벽히 파악하고 있을 때나 가능한, 다시 말하면 삼류 무공 상대로나 가능한 일이다.

    아미파 십이선사이자, 검기발현의 절정고수인 지심을 상대로 이화접목이 어디 가당키나 한 일인가?

    그러나 노인, 당벽후는 담담히 말했다.

    “아마도 그렇다.”

    당설련은 또 한번 놀랐다.

    당벽후가 애매한 대답을 하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이게 대체…….’

    당설련은 눈을 돌려 빙설을 쳐다보았다.

    빙설은 무표정한 얼굴로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아득.

    당설련은 이를 악물었다.

    느긋하던 미소는 어느새 사라져 버리고, 그녀의 눈가에는 노기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태평맹이 웅성거리는 것과 달리, 아미파는 침통한 분위기가 내려앉았다.

    검기를 피워 올리던 지심이 단번에 날아가는 모습을 보았으니 어찌 그렇지 않으랴?

    법영은 이를 악물었다.

    ‘어쩔 수 없군.’

    슥.

    그녀가 막 몸을 일으키려던 때였다.

    “멈추게.”

    “사, 사고(師姑).”

    법영을 멈춘 여승은 바로 천수 신니였다.

    외부에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아미파의 전대 고수이자, 연로하여 이미 선동(禪洞)에 들었던 그녀가 이 자리에 있었던 것이다.

    아미파에서 선동에 드는 것은 한평생 불도에 전념하고 고고함을 지킨 다음에야 주어지는 대단히 명예로운 일이었다.

    그러나 법영의 목숨을 건 간청에 천수 신니는 선동을 나왔다.

    비록 자신의 명예는 더럽혀진다 해도 아미의 위기를 방관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자네가 상대할 만한 이가 아닐세.”

    천수 신니가 나지막이 말했다.

    “허, 허나…….”

    법영은 당혹스러웠다.

    빙설이 대단하다는 것은 그녀도 알고 있었다.

    그건 결코 사술도, 눈속임도 아니었다.

    하지만 천수 신니가 나서야 할 정도라니?

    게다가 최후의 보루여야 했던 천수 신니가 지금 나서면 이후는 어떻게 하란 말인가?

    “그러면 다음은 어떻게…….”

    “저 여인을 막지 못하면.”

    천수 신니는 나지막이 말했다.

    “다음도 없다네.”

    법영은 대답할 말이 없었다.

    천수 신니의 말이 옳았다.

    빙설을 막지 못하면 다음은 없다.

    그러나 천수 신니의 말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작게 불호를 외고 말했다.

    “내가 지면 더 이상 아무도 내보내지 말게.”

    법영은 화들짝 놀랐다.

    천수 신니가 패배하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그, 그런……!”

    “쓸데없이 희생을 늘릴 필요는 없지 않은가?”

    천수 신니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그녀의 말은 옳았다.

    천수 신니가 진다면 아무도 빙설을 당해 내지 못한다.

    하지만 법영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천수 신니가 패배를 염두에 둔다는 것도, 오늘로 아미파가 끝날 수도 있다는 사실도.

    당혹해하는 법영을 뒤로하고 천수 신니는 몸을 일으켰다.

    사락.

    아무것도 들지 않은 천수 신니는 주저 없이 걸음을 옮겼다.

    “사, 사고…….”

    법영은 차마 그녀를 말리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사실 천수 신니는 아미파 역대 최고수로 손꼽힐 만한 사람이었다.

    강호 무림이 어지러운 때였다면 아마도 그녀의 명호가 천하를 울렸을 것이다.

    그러나 무림맹 시대는 그녀의 실력을 드러낼 기회를 허락하지 않았다.

    강호 무림은 개인의 무공 대신 모략과 이합집산의 논리가 지배했다.

    그렇게 천수 신니의 명호는 아미산 안에서만 머물러야 했다.

    어쩌면 다행이었는지도 모른다.

    헛된 명성과 세속의 이권에 집착함 없이 수련과 참선에만 정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천수 신니는 아미산의 선동에서 조용히 그 생을 마치는 듯했다.

    태평맹이 아미를 집어삼킬 야욕을 품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그러니 천수 신니는, 법영 사태가 아미의 운명을 맡길 유일한 사람이었던 셈이다.

    사박.

    낡은 승복을 휘감은 천수 신니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그 모습에 웅성거리던 태평맹이 잠잠해졌다.

    “천수 신니네요.”

    당설련이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그래. 천수 신니다.”

    노인 당벽후가 나지막이 고개를 끄덕였다.

    천수 신니에 대해 당문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당벽후가 필요했다.

    “벌써 천수 신니가 나오다니…….”

    그런데 벌써 그녀가 나섰다.

    북해일문의 빙설이 그녀를 나오게 만든 것이다.

    ‘너희가 감히 내 계획을 망쳐?’

    당설련은 표독스러운 눈으로 빙설을 노려보았다.

    천수 신니가 나섰다는 건 비무가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의미다.

    당설련의 계획보다 한참이나 빠르고 너무나도 다르다.

    그녀는 나지막이 당벽후에게 물었다.

    “북해일문이 천수 신니를 당해 낼 수 있을까요?”

    예전의 당설련이라면 그 질문을 어리석다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 가능성은 반반이 되어 버렸다.

    “……모르겠군.”

    당벽후가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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