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0화. 빙설, 북해십이비
“북해일문이 첫 번째를 맡아 주시니 당문이 두 번째를 맡지요.”
당설련이 말했다.
“이후는 원하시는 대로 정하셔도 좋아요.”
각 세가 책임자들의 눈이 빛났다.
그건 아미파의 마지막 비무자를 꺾는 영예를 차지할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그럼 저는 비무 준비를 하지요. 결정되면 알려 주세요.”
당설련은 아예 개입하지 않겠다는 듯, 예를 표하고는 자리를 떠났다.
사박, 사박.
남은 책임자들은 단번에 의욕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설련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가느다란 조소를 머금었다.
‘두 번째 이후는 어차피 나설 일도 없을 테니까.’
바람에 흐트러진 옆머리를 넘기며 당설련은 가볍게 발걸음을 옮겼다.
“저도 그만 물러나겠어요.”
모용미가 말했다.
“모용세가의 순서는 여러분께서 정하시는 대로 따르지요.”
사박.
모용미는 자리를 떠났다.
“아, 그럼 제갈세가도 여러분이 정하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뒤에서 제갈기호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후다닥 모용미 곁으로 다가왔다.
“그냥 가셔도 되겠습니까? 순서가 어떻게 정해질지 모르는데요.”
“군사님 말씀대로라면 당문 이후는 의미가 없을 테니까요.”
걸음을 멈추지 않으며 모용미가 말했다.
“그야 그렇습니다만…….”
제갈기호가 모용미를 따라 걸으며 말을 이었다.
“어쩌면 당문이 나설 기회도 없을지 모르겠습니다. 북해일문에서 저 아가씨가 나온다면 말입니다.”
탁.
모용미가 걸음을 멈췄다.
제갈기호는 이미 북해일문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가 닿는 사람은 바로 시비처럼 보이는 여인이었다.
분명히 북해일문이 태평맹 연회장에 처음 등장할 때 그녀도 같이 있었다.
‘아니, 잠깐.’
그 전에도 본 기억이 있었다.
그녀는 분명 운현이 북해 일행과 함께 무림맹에 왔을 때도 있었다.
“어쩌면 당설련 군사가 또 화를 내겠는데요? 후후훗.”
옆에서 제갈기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주 재미있다는 듯, 제갈기호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
삼궁주는 북해일문 일행에게로 돌아왔다.
그리고 호위 무사 빙혼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계획대로 됐어.”
“보는 눈이 많습니다.”
빙혼이 나지막이 말했다.
“목소리를 낮추심이 좋겠습니다.”
북해일문의 특이한 모습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에 딱 좋았다.
더구나 삼궁주의 미모 역시 언니에 못지않아서, 오룡삼봉들은 아까부터 계속 이쪽을 흘끔거리고 있었다.
“괜찮아.”
삼궁주가 피식 웃었다.
“이 사람들이 우리말을 어디 알아듣기나 하겠어? 자기네가 무조건 최고인 줄 아는 사람들인데.”
사실 이곳에서 북해의 말을 알아듣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덕분에 그녀도 마음 놓고 말하고 있었다.
“빙설.”
삼궁주가 빙설을 돌아보며 말했다.
“열둘이야. 괜찮지?”
시비처럼 조용히 서 있던 빙설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말은 없었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좋아.”
삼궁주는 빙긋 웃었다.
“전부 잡아 버려.”
빙설의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헌데…….”
문득 옆에서 빙혼이 말했다.
“여기서 북해의 법도대로 해도 괜찮습니까?”
“아, 그게…….”
삼궁주는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북해의 법도대로’라는 건 곧 상대의 목숨을 거둬 가는 것을 말한다.
“……아마 괜찮지 않을까? 아까 생사는 관계없다는 말을 한 것 같던데…….”
“삼궁주님.”
빙혼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곳은 북해와 풍습이 다릅니다. 이런 문제는 자칫 큰 오해를 불러올 수 있으니 조심하셔야 합니다.”
그건 운현과 동행했던 경험에서 온 학습 효과였다.
“그게, 확실하지가 않아서 말이야.”
삼궁주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아까 ‘생사는 관계없다’는 말 앞에 ‘물론(勿論)’이라는 단어를 썼거든? 그런데 물(勿)이 안 한다는 뜻이라고. 이게 그냥 강조인지, 이중 부정이라서 강한 긍정이 되는 건지 헷갈려서……. 게다가 의문문으로 말했다고. 상대의 의도를 짐작해야 해서 더 힘들어.”
말하는 삼궁주의 표정은 거의 울상이 되어 있었다.
“어쩌지? 가서 다시 물어볼까?”
빙혼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저들의 습성상 삼궁주님을 얕잡아 볼 가능성이 큽니다.”
“그럼 어떻게 하지?”
빙혼은 생각에 잠겼다.
운현의 말이나, 그와 동행하며 겪었던 경험을 떠올리던 빙혼은 한가지 답을 찾아냈다.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논란의 여지가 없는 비무의 승패가 무엇인가에 대한 일이었는데…….”
삼궁주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것이야말로 지금 필요한 것이 아니던가?
“결론은 상대가 스스로 패배를 인정할 때까지였습니다.”
“그건 너무 귀찮지 않아?”
삼궁주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냥 목을 베는 게 더 깔끔한데.”
“제 경우는.”
빙혼이 살짝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상대가 더 이상 검을 들고 서 있지 못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래?”
상대가 검을 들지 못할 정도면 확실히 결과는 분명하다.
삼궁주가 고개를 끄덕이고 빙설의 눈빛 역시 빛났다.
과거 무림맹에서 빙혼이 남궁세가의 공자를, 그가 스스로 패배를 인정할 때까지 몇 번이고 땅에 나뒹굴게 만드는 것을 그녀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럼 그렇게 하자.”
삼궁주는 빙설을 돌아보았다.
“빙설, 괜찮지?”
빙설은 고개를 끄덕였다.
삼궁주는 그녀가 그렇게 해낼 것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비록 천하의 아미파가 상대라 할 지라도.
아미파와 태평맹이 각자 비무자를 정하는 동안, 모용미는 아미파의 산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뭘 생각하십니까?”
제갈기호가 불쑥 나타나 물었다.
모용미는 헛웃음을 흘렸다.
“한가하시나 보네요.”
“제가 할 일이 뭐 있겠습니까? 이름뿐인 대내 총괄군사인 데다, 이 자리의 전권은 당설련 군사께 있는데요.”
옳은 말이지만 당사자인 제갈기호가 할 말은 아니었다.
넉살 좋은 그 말에 모용미도 더 이상 무어라 할 수 없었다.
“산문을 바라보고 있었어요.”
아미의 산문은 낡고 오래된 나무로 되어 있었다.
세월의 흐름과 고고한 사찰의 풍취가 한껏 드러나는 모습이었다.
“좋은 풍경이군요.”
제갈기호가 말했다.
“뭐, 아미가 지게 되면 저것마저 가져다 팔아야 할지도 모르지만요.”
그건 처음 듣는 말이었다.
“뭐라고요?”
“아까 들으셨잖습니까?”
제갈기호은 어깨를 으쓱했다.
“당설련 군사가 아미파에 배상을 요구하겠다고 한 말을요.”
확실히 그렇게 말하긴 했다.
하지만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제갈기호는 말을 이었다.
“산문 폐쇄보다 더 중요한 게 바로 배상입니다. 당설련 군사는 이 기회에 아예 아미를 철저하게 뿌리 뽑으려고 합니다. 십 년이 아니라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정도로요.”
‘아.’
모용미는 제갈기호가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았다.
“그러니까 아미파가 감당 못 할 정도의 배상을 요구할 것이라는 말인가요?”
“네.”
제갈기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미파가 내지 못하겠다고 하면 그걸 핑계로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대웅전을 뜯어내든, 장서각을 털어 가든, 아니면 산문을 통째로 뽑아내든 말입니다. 그렇게 철저히 밟고 또 밟아서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도록 만들어 버리겠지요.”
모용미는 살짝 소름이 돋았다.
모용세가도 한때 가세가 크게 기운 적이 있었다.
그때는 사방이 막막하고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아미파에 닥쳐올 처참한 상황이 모용미에겐 남 일 같지 않은 것이다.
“뭐, 그래도 죽는 사람은 훨씬 적을 테니 그나마 다행이라 해야 하나요?”
그게 과연 다행인지 모용미는 확신할 수 없었다.
모용미는 침묵했다.
눈치 빠른 제갈기호도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
사박.
북해일문에서 한 여인이 걸어 나왔다.
그리고 태평맹 무인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검을 든 것 외에는 언뜻 시비로 보일 정도로 수수한 백의를 입은 그녀는 실제로 시비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그러나 제갈기호는 그녀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아니, 기억할 수밖에 없었다.
“……역시.”
제갈기호는 빙긋 웃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습니다.”
오직 북해를 위한 열두 명의 시비, 북해십이비.
그 첫째인 빙설이 강호 무림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
아미파의 첫 비무자는 지심이었다.
십이선사 중 가장 젊고, 또 그래서 가장 활동적인 그녀였지만 지금 그녀의 표정은 비장하기 이를 데 없었다.
‘내 탓이야.’
그녀가 공손연의 팔을 잘랐지만 아무도 그것을 탓하지 않았다.
오히려 함께 분노하며 그녀의 처사를 당연하게 여겼다.
애초에 당문의 의도가 이러하였으니, 그녀가 어떻게 하든 결국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터였다.
이전투구, 진흙탕에서 싸우려는 개에게 시시비비는 의미가 없는 것이니까.
‘내가 조금만 신중히 처신했더라도…….’
그러나 지심은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다.
결국은 마찬가지였을 것이라 해도 자신의 행동이 그 빌미를 제공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자신의 신중하지 못한 행동 탓에 사문에 큰 위기가 닥쳤으니, 그녀가 느끼는 자책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으득.
지심은 이를 악물었다.
‘내 팔은 자르지 못한다.’
그녀의 팔을 자르라고 한 당설련의 말을 지심은 똑똑히 들었다.
만일 그것으로 사문을 구할 수만 있다면 자신의 두 팔 따위는 기꺼이 내어 줄 수 있었다.
그러나 당설련이, 태평맹이 원하는 것은 그것만이 아니다.
그들은 아미를 원한다.
아미의 자존심을, 오랜 역사와 긍지를 철저히 망가뜨리기 원하는 것이다.
그러니 절대로 팔을 내줄 수는 없었다.
검을 쥐고 아미의 적을 베어야 하니까.
‘대신 내 목숨을 주마.’
생명을 해하지 말라는 살생계(殺生戒)는 불가의 가장 무거운 계다.
그러므로 적을 벨 것을 결의한 순간, 지심은 이미 자신의 목숨 또한 돌아보지 않았다.
다만 저들의 칼이 그녀의 목숨을 가져가는 그 순간까지,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악적들을 벨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설령 자신의 승복이 피로 뒤덮일지라도 말이다.
사박.
그러나 태평맹의 첫 비무자를 본 순간 지심은 이를 악물 수밖에 없었다.
‘어째서!’
분명 공손세가가 나오리라 여겼다.
그러나 그녀 앞에 선 사람은 생전 처음 보는 낯선 여인이었다.
으득.
지심은 이를 갈았다.
‘끝까지 비겁하고 졸렬하구나.’
관계없는 사람을 앞세우는 태평맹의 행태를 지심은 더더욱 용납할 수 없었다.
슥.
지심은 자신의 앞에 선 여인을 바라보았다.
“자네는 이 일과 무슨 상관인가?”
눈살을 찌푸리며 지심은 물었다.
평소라면 예를 갖추었겠지만 지금 그녀에게는 그런 여유가 없었다.
다만 갑작스럽게 끼어든 이 여인의 행동이 불쾌하고, 간교한 태평맹의 행태에 분노가 치밀 뿐이다.
그러나 여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예는커녕 자신의 명호조차 밝히지 않았다.
“대답조차 아니하겠다는 것인가?”
어쩌면 이미 대화는 필요 없다는 의미일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건 지심의 분노를 돌리게 하는 데는 충분했다.
“그대가 선택한 일이니…….”
지심은 천천히 검을 뽑았다.
스릉.
“나를 원망치 말라.”
텅.
지심의 검집이 바닥에 떨어진다.
그것은 검을 다시 넣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휘릭.
햇빛에 반짝이는 지심의 검이 가볍게 원을 그리더니 빙설을 향했다.
‘태청검법!’
지켜보던 모용미가 나지막이 탄식을 흘렸다.
그것은 아미파의 무공, 태청검법의 기수식이었다.
아미파 십이선사가 직접 펼쳐 내는 태청검법을 보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모용미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 역시 숨을 죽인 채 지심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빙설은 검을 뽑지 않았다.
그녀의 하얀 손은 검 손잡이를 쥐고 있었지만 칼날은 여전히 칼집 안에 숨은 채였다.
“감히……!”
그 오만함에 분노하려던 지심은 흠칫했다.
빙설의 차가운 눈빛이 지심을 똑바로 향하고 있었다.
그 눈에 가득한 것은 오만도, 경솔함도 아닌 한 자루 칼날 같은 기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