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9화. 칼에는 눈이 없다
제갈기호가 말하는 아가씨는 바로 북해일문을 이끄는 외청 부청주였다.
여러 날의 여정에도 그녀의 싸늘한 눈빛과 굳은 표정은 흔들림이 없었다.
‘예전?’
모용미가 의아해 하는데 제갈기호가 말을 이었다.
“인사도 아주 짧게 의례적으로 하더군요. 아, 그러고 보니 이젠 삼궁주가 되었다지요? 운 대인과 북해에 갔을 때는 십이궁주였는데요.”
모용미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그러나 그녀는 곧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북해일문은 산서성에서 수십 년간 터를 닦았다고 하지 않았던가요? 어떻게 북해의 십이궁주가…….”
“사람이야 바뀌기 마련이니까요. 백 년 전 제갈세가의 사람들은 이제 한 명도 없지만, 여전히 제갈세가라고 불리는 것처럼요.”
모용미는 그 말뜻을 금방 깨달았다.
즉, 북해일문의 이름은 옛날과 같다 해도 구성원은 완전히 바뀐 것이다.
‘그렇다면…….’
눈살을 찌푸리며 모용미는 생각했다.
북해일문은 여전히 산서성의 문파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면 이민족인 북해의 문파라고 해야 할까?
“운 대인 이야기는 안 물어보십니까?”
제갈기호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재미있는 일이 아주 많았는데요.”
묻기만 한다면 기꺼이 말해 줄 의향이 있다는 듯, 제갈기호는 모용미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모용미는 거절했다.
“괜찮아요.”
궁금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제갈기호를 통해 알고 싶지는 않았다.
누구에게 듣고 싶은지는 이미 정해져 있었으니까.
그때였다.
따각, 따각.
앞쪽 길을 살피러 갔던 두 명의 무사가 돌아왔다.
“멈춰.”
당설련이 손을 들며 말하자 행렬이 천천히 멈춰 섰다.
무사들은 당설련에게 예를 표한 후 무엇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설련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여러분.”
당설련이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미파가 이미 산문 앞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군요.”
내력을 실은 그녀의 낭랑한 목소리는 행렬 뒤쪽까지 똑똑히 들렸다.
당설련은 빙긋 웃었다.
“세상과는 다들 연을 끊으신 분들인 줄 알았는데, 이리도 속세의 소문에 빠르실 줄은 몰랐네요.”
이곳저곳에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미파가 참배객들을 통해 정보를 모으는 걸 비꼬는 것이다.
당설련은 느긋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성대한 환영을 기대할 수는 없겠어요. 고작 서른 분 남짓 나와 계실 뿐이라니 말예요.”
사람들의 눈에 자신감이 번져 갔다.
“자, 오래 기다리게 하면 안 되겠지요?”
당설련이 웃음을 머금은 채 앞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출발.”
낭랑한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행렬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따각, 따각.
태평맹과 칠대세가의 깃발이 펄럭이고 자욱한 먼지가 산길을 뒤덮었다.
그 모습은 마치 아미산을 거슬러 올라가는 거대한 짐승의 모습과도 같았다.
***
아미의 산문 앞은 조용했다.
삼십여 승려가 무리 지어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간간이 불호를 외는 소리만이 나지막이 들려올 뿐, 새소리와 나뭇가지를 흔드는 바람 소리가 더 크게 들릴 정도였다.
그러나 긴장감만은 감출 수 없었다.
“……옵니다.”
한 승려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와 함께 산문 앞 길에 먼지가 피어올랐다.
따각, 따각.
무리의 말발굽 소리가 깊은 산의 정적을 깨트렸다.
잠시 후, 산길 저편에 커다란 깃발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허어.”
누군가 탄식하며 불호를 외웠다.
기를 앞세우고 말을 몰아 다가오는 저들이 모습은 대단히 위압적이었다.
따각.
서로의 얼굴이 보일 정도의 거리에서 기마는 멈춰 섰다.
태평맹과 일곱 세가의 깃발이 바람에 크게 휘날렸다.
당설련은 말에 탄 채로 승려들을 돌아보았다.
다들 긴장한 모습은 역력했지만 겁을 먹거나 시선을 피하는 승려는 아무도 없었다.
“훗.”
가볍게 웃음을 흘린 당설련은 말에서 내렸다.
그녀 뒤에 있던 십여 명의 책임자들도 말에서 내렸다.
자박, 자박.
당설련이 앞으로 몇 걸음 나서더니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당설련이에요.”
저벅, 저벅.
노년의 법영이 앞으로 나왔다.
그녀는 천천히 합장을 하고는 말했다.
“법영일세.”
당설련은 빙긋 웃었다.
“영광이군요. 아미파 십이선사 중 두 번째시자 혜월 신니를 대신하여 아미를 이끌고 계신 분을 만나 뵙게 되어서요.”
법영은 주름진 얼굴로 가볍게 웃었다.
“나도 반갑네. 소문이 자자한 당문의 눈꽃을 만나게 되어서.”
“감사해요.”
“허나 지금은 겨울도 아니고 아미 또한 설산이 아니니.”
법영은 눈을 빛내며 말했다.
“때가 아님을 깨닫고 지금이라도 스스로 물러섬이 어떤가?”
당설련은 미소를 지었다.
“심산유곡에 계시다 보니 홀로 깨끗하고 옳다 생각하시는군요. 천하가 눈으로 덮였는데 어찌 아미라고 예외일까요?”
낭랑한 목소리로 당설련은 말했다.
“손님으로 맞이하였는데 무단히 가솔의 팔을 자른 패악도, 바로 그런 착각과 오만에서 비롯된 것이겠지요.”
“할(喝)!”
십이선사의 한 사람인 법현이 노기를 담아 외쳤다.
“가증스러운 궤변이로다! 아미를 말로 희롱하고 검을 빼어 위협한 것이 어찌 악한 일이 아니리오! 모든 것을 잃고 나서야 비로소 깨닫겠는가!”
그녀의 목소리가 산을 쩌렁쩌렁 울리고, 말들이 놀라 투레질했다.
그러나 당설련은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
“제 깨달음은 당신이 상관할 바가 아니에요. 또한 여기서 논의할 바도 아니지요.”
당설련은 노년의 법영을 쳐다보았다.
“선문답이 끝났으면 이제 일 이야기를 할까요?”
그녀의 눈빛은 얼음처럼 싸늘했다.
나지막이 불호를 외고 난 후, 법영이 말했다.
“무엇을 원하는가?”
“간단해요. 지심 사태가 공손연 공자의 팔을 잘랐으니 그녀의 팔을 자르고 무공을 폐한 후 강호 무림을 떠나게 하세요. 아미파는 태평맹이 입은 피해에 대해 합당한 배상을 하고, 감독 소홀의 책임을 지고 십 년간 산문을 폐쇄하세요.”
주저 없이 내뱉은 당설련이 빙긋 웃었다.
“아주 간단하고 명쾌하지요?”
“허.”
법영은 헛웃음을 내뱉었다.
지심의 팔을 자르고 무공을 폐하는 것도 말도 안 되거늘 십 년간 아미의 산문을 폐쇄하라고 한다.
“불가.”
법영의 대답은 간단했다.
“그중 단 하나도 받아들일 수 없네. 오히려 사과는 태평맹이 해야 할 것일세.”
말하는 법영의 눈동자는 범상치 않은 기세로 넘실거리고 있었다.
“안타깝군요.”
당설련이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그럼 어렵게 갈 수밖에요.”
“쉽든 어렵든 무슨 차이가 있겠나? 본래 탐욕은 원하는 것을 얻기 전엔 물러서지 않음이니.”
“그 탐욕이 세상을 움직이고 있답니다. 그리고 그건 당신들도 마찬가지 아니던가요?”
아미파 역시 무림맹의 주축이었다.
비록 세가들만큼은 아니더라도, 아미파가 세를 누렸던 것은 사실이었다.
“자,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하시겠어요? 서로 칼을 뽑고 끝장을 볼까요? 아미에는 일반 승려들은 물론 나이 어린 사미니들도 많은 것으로 아는데…….”
‘사미니(沙彌尼)’는 어린 여자 승려들을 말한다.
당설련은 가늘게 웃었다.
“오늘 피가 많이 흐르겠네요.”
“허허.”
법영이 나지막이 웃었다.
“굳이 과격한 말로 도발을 할 필요는 없네. 그런 말에 혈기가 끓어오르기엔 이미 늙었으니 말일세.”
당설련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법영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원하는 방식을 말해 보게.”
“강호 무림의 법도를 따라 해결하기로 하지요.”
당설련의 목소리는 사뭇 날카로웠다.
“비무의 승자가, 원하는 것을 갖게 될 거예요.”
법영은 탄식을 흘렸다.
태평맹이 비무를 제안할 것임은 이미 알고 있었다.
‘당문이 아미를 상대로 비무라…….’
아미의 장문인 혜월은 여전히 위중하고, 십이선사 중 셋도 항주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아미를 상대로 당문이 비무를 거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무언가 믿는 구석이 있지 않고서는 말이다.
‘알려지지 않은 독기공의 고수라도 데려왔단 말인가?’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 정도는 법영도 이미 예상하고 있던 바였다.
“그러지.”
법영은 말했다.
당문에 숨겨진 한 수가 있다면 아미에도 비장의 대책이 있다.
“우리 중 열둘을 꺾는다면 자네들이 이긴 것이네.”
“열둘이라……. 미련이 많으시군요. 하지만 좋아요.”
당설련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중 열 둘을 꺾는다면 아미가 이긴 것으로 하지요.”
“좋네.”
협의는 끝났다.
당설련은 몸을 돌렸다.
그러다 문득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아, 물론 생사는 관계 없겠지요?”
법영은 탄식처럼 말했다.
“그리도 피를 보고 싶은가?”
“칼에는 눈이 없으니까요. 있는 건…….”
당설련의 붉은 입술에 미소가 걸렸다.
“잔인한 진실뿐이랍니다.”
사박.
몸을 돌린 당설련은 가벼운 걸음으로 걸어갔다.
법영은 나지막이 불호를 되뇌었다.
오늘이 아미에게 참으로 잔인한 날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법영의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당설련과 각 세가 책임자들은 비무의 의논을 위해 모였다.
가장 적극적인 공손세가의 책임자가 물었다.
“그러면 비무는 열두 번 하는 셈이오?”
“아닙니다.”
당설련이 무어라 하려는데 제갈기호가 말했다.
“열둘을 꺾으라 했다면 비무 자체는 훨씬 많아질 겁니다. 패배하거나 스스로 물러나기 전까지 계속 싸우는 방식이지요. 당연히 처음에 나서는 사람은…….”
책임자들의 안색이 살짝 변했다.
제갈기호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결국 패배하거나 물러나게 되겠지요. 열두 명을 전부 꺾지 않는 한 말입니다.”
“크흠, 그럼 우리는 조금 나중으로…….”
공손세가 대표자가 헛기침을 했다.
다른 세가의 책임자들 역시 나서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당설련은 쓴웃음을 지었다.
“다들 그러시다면 당문이…….”
“우리가 해도 될까요?”
낭랑한 여인의 목소리에 당설련이 고개를 돌렸다.
자박, 자박.
그녀는 북해일문의 외청 부청주인 삼궁주였다.
조금 어려 보이긴 했지만 백색 무복과 싸늘한 눈매는 문주를 쏙 빼닮았다.
“이왕 먼 곳에서 왔으니 이 기회에 아미의 무공을 견식 하고 싶군요.”
사뭇 냉담한 목소리로 삼궁주가 말했다.
사실 참관자로 온 북해일문이 나설 이유는 전혀 없었다.
그러나 당설련의 생각은 달랐다.
‘나쁘지 않아.’
태평맹의 대의에 공감하여 자발적으로 나섰다고 하면 명분은 충분하다.
북해일문에 대한 맹 내의 평판도 올라갈 것이고 대외적으로 알리기에도 괜찮은 그림이다.
물론 북해일문의 콧대를 살짝 눌러 주는 효과도 있을 테고 말이다.
“저로서는 감사한 일이군요. 다른 분들은 어떠신가요?”
“뭐, 굳이 원한다면야…….”
“글쎄, 상관없을 것 같기는 한데…….”
책임자들의 반응은 비슷했다.
모두가 기피하는 첫 순서를 맡아 준다니 오히려 환영할 일이었다.
이 기회에 북해일문의 실력을 확인해 볼 수도 있을 테고 말이다.
“좋아요. 그럼 제 권한으로 북해일문의 참가를 허가하지요.”
당설련의 말에 삼궁주는 가볍게 예를 표했다.
“고마워요.”
삼궁주는 그대로 몸을 돌려 걸어갔다.
언뜻 무례하기까지 보이는 행동이라 책임자들의 심기는 그리 편치 않았다.
‘흥. 변방의 문파 주제에…….’
산서성은 북방 경계를 접한 곳이다.
북방 이민족의 영향도 강하고 대대로 변방 취급을 받아 왔다.
그 뿌리 깊은 편견은 지금도 변하지 않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