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8화. 태평맹의 출정
사천성 성도 외곽의 한 저택.
북해일문 일행은 임시로 이곳에서 머물고 있었다.
“문주님.”
중년 사내의 예의 바른 음성에, 북해일문의 문주이자 빙궁의 소궁주인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무슨 일이지요?”
“외청 부청주께서 오셨습니다.”
소궁주는 미소를 지었다.
“들어오라 하세요.”
스륵.
문이 열리고 백색 비단 옷을 차려입은 미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외청 부청주는 다름 아닌 빙궁의 예전 십이궁주였다.
여전히 귀여운 인상이었지만, 정성스럽게 단장한 머리와 은빛 머리 장식은 그녀의 매력을 한껏 높여주고 있었다.
사박, 사박.
십이궁주는 부드럽게 걸음을 옮겼다.
온 몸을 감싼 비단 옷은 그녀의 여성적인 매력을 한껏 드러내고 있었다.
소궁주는 미소를 머금고 십이궁주를 바라보았다.
사박.
발을 멈춘 십이궁주는 소궁주에게 우아하게 예를 표했다.
“외청 부청주가 문주께 예를 올립니다.”
“후훗.”
소궁주는 웃음을 흘렸다.
“좋아. 합격이야.”
십이궁주의 표정이 단박에 환해졌다.
“정말? 우와! 역시 나도 하면 되는구나!”
조금 전과 달리 그 모습은 천진난만하기까지 했다.
“이런, 벌써 그렇게 흐트러지면 안 돼.”
“뭐, 어때? 언니 앞인데.”
십이궁주는 혀를 쏙 내밀었다.
“어땠어? 언니랑 비슷했어?”
“그래.”
소궁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면 이곳 사람들도 쉽게 보지는 못할 거야.”
“헤헤헤.”
웃는 십이궁주의 모습에 소궁주는 헛웃음을 흘렸다.
“너도 삼궁주가 되었으니까 행동에 도 각별히 조심하고.”
북해 빙궁은 커다란 변화를 겪었다.
후계 쟁탈전이 사실상 소궁주의 승리로 끝나고 열두 소궁주들의 지위도 변했다.
십이궁주는 단번에 삼궁주가 되었고, 소궁주는 일궁주의 자리에 오름과 동시에 대궁주라는 지위를 갖게 되었다.
비록 일부나마 빙제의 권한을 대리하는, 전례에 없는 엄청난 권력을 쥐게 된 것이다.
북해일문 역시 그녀의 권한으로 이루어진 일이었다.
지난 삼십 년간 유명무실했던 북해일문이 단번에 산서성의 성도 태원을 장악하고 정식으로 강호에 출도한 것이다.
바로 북해의 강호 진출이었다.
“저기, 근데 우리 여기 와도 돼?”
과거 십이궁주였던 삼궁주가 주저하며 물었다.
“그때 운 오빠랑 약속했잖아. 남쪽엔 안 오겠다고…….”
“또 그 소리니?”
소궁주, 아니 이제는 대궁주라 불리는 그녀가 말했다.
“그 약속은 빙제님과 무림맹 사이에 있었던 일이야. 하지만 무림맹은 없어졌어. 그런데 뭐가 안 된다는 거야?”
“음, 하지만…….”
논리적으로는 대궁주의 말이 옳았다.
그러나 아직도 북해의 용사들 대부분은 삼궁주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북해의 푸른 늑대가 있는 한, 결코 그 땅을 침범해서는 안 된다고 말이다.
“푸른 늑대님과 적대하는 건…….”
“적대하지 않아.”
대궁주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달래듯 말했다.
“언니가 그분께 예를 표하는 걸 봤지? 빙혼과 빙설도 고개를 숙였고.”
“으응.”
“나는 결코 그분과 적대하지 않을거야. 만일 그분이 막아서시면, 우리는 그 어떤 경우라도 물러설거야. 감히 북해의 푸른 늑대께 그 누가 대적할 수 있겠어?”
북해는 그 어떤 경우라도 푸른 늑대와 적대하지 않는다.
그 앞에서는 오직 무릎 꿇고 경의를 표하며 물러설 뿐이다.
바로 이것이 대궁주의 기조였다.
남쪽으로 세력을 확장하되, 푸른 늑대를 거스르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는 맹세를 한 것이다.
“정말이지?”
“그럼. 나는 그분을 잘 알아.”
언뜻 모순되어 보이는 정책이지만, 그 둘 사이에는 엄청난 간극과 수많은 회색 지역이 있음을 대궁주는 알고 있었다.
더구나 대궁주는 운현을 안다.
그가 어떠한 사람이며, 그녀를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는지도 말이다.
“맞아. 언니가 운 오빠를 가장 잘 아니까.”
대궁주는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나지막이 말했다.
“……가거든, 조심해.”
“응.”
삼궁주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 사람들과 말할 때는 싸늘하게, 그리고 짧게 하면 되지?”
“그래.”
대궁주는 말했다.
“이들은 사람의 얼굴과 짐승의 마음을 가진 자들이야. 그러니 검을 뽑으면 결코 물러서지 마. 약한 모습을 보이며 당장 물어뜯으려 들 테니까.”
“응!”
삼궁주는 반짝이는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대궁주는 미소를 지었다.
삼궁주는 대궁주가 유일하게 마음을 여는 대상이었다.
사락.
대궁주는 삼궁주의 머리를 매만졌다.
그녀의 손길마다 동생을 향한 애정이 가득했다.
“좋아. 가서 그들에게 북해의 힘을 보여 주렴.”
눈을 빛내며 대궁주는 말했다.
“아무도 북해를 얕볼 수 없도록. 알았지?”
삼궁주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용히 몸을 돌려 방을 나갔다.
탁.
문이 닫히고, 홀로 남은 대궁주는 자리에 앉았다.
아름다운 그녀의 얼굴에 미소는 어느새 떠나고 없었다.
‘그래. 나는 그를 잘 알아.’
자신은 운현을 안다.
그리고 자신을 향한 운현의 진심이 어떠한 것인지도.
그렇기에 외면할 수 없었다.
그를 향한 자신의 마음이 어떠한지도 말이다.
아득.
대궁주는 이를 악물었다.
‘이미 끝난 일이야.’
결론은 이미 오래전에 내려졌다.
이미 끝났다고, 지나간 일이라고 여겼다.
북해를 위한 대의 앞에서 개인적인 감정 같은 건 고려의 여지조차 없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를 본 순간 모든 것은 무너지고 말았다.
“……내가.”
입술을 깨물며 대궁주는 중얼거렸다.
“겨우, 그 정도였단 말이야?”
운현에게 큰절을 올린 건 예상에 없던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터져 나오는 감정을 도저히 감출 수 없을 것 같았다.
“겨우!”
쾅.
그녀의 손이 서탁을 내리쳤다.
“이 정도밖에 안 되냐고!”
절규하듯 그녀는 외쳤다.
그러나 대답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
자조적인 웃음이 붉은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그녀는 다시금 이를 악물며 손을 움켜쥐었다.
핏기 없는 작고 하얀 주먹이 그녀의 눈 아래에서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
강호의 중심.
변방으로 살아온 사천성 성도 사람들에게 그것은 꿈에 속했다.
사천 사람이라면 누구나 바라마지않는, 그러나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꿈.
그런데 그 꿈이 현실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태평맹이 주었다.
태평맹이 무림용봉지회를 열자 천하의 내로라하는 세가들이 모여들었고 크고 작은 천하의 상단들과 유력자들이 성도를 가득 채웠다.
사천성 성도는 이미 강호의 중심이었다.
그래서 당설련이 태평맹의 깃발 아래 백여 기의 기마를 이끌고 출진했을 때 성도 사람들은 환호했다.
휘날리는 태평맹의 거대한 깃발, 당설련의 아름답고 당당한 모습과 그 뒤를 따르는 칠대세가의 백여 기마들은 태평맹, 아니 사천의 힘을 보여 주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꽃잎을 뿌리고 오색 종이를 흩날리며 태평맹의 승리를 기원했다.
비록 상대가 사천성 명문 정파인 아미파라 하더라도 말이다.
성도에서 아미산까지는 여러 날이 걸리는 먼 길이었다.
태평맹의 기를 올린 백여 기의 기마는 관도를 따라 아미산을 향했다.
관도가 끝나자 곧 산길이 시작되었고, 백여 마리의 말이 일으키는 먼지가 산길을 자욱하게 뒤덮었다.
“크흠, 이거 먼지가 심하군요.”
말을 탄 제갈기호가 인상을 쓰며 말했다.
옆에서 말을 타고 있는 모용미에게 하는 말이 분명했지만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제멋대로 옆에 다가온 제갈기호와 대화를 할 생각이 그녀에겐 전혀 없었다.
“산길도 제법 험하네요. 매복이라도 있었다간 꼼짝없이 당했겠는데요?”
그 말엔 모용미도 반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매복요?”
“가정입니다, 가정. 아미파가 매복같은 걸 할 리가 있나요. 게다가 우린 사태를 매듭짓고자 하는 것이지, 전면전을 하자는 게 아니니까요.”
태평맹 가주 회합은 아미파에 대한 제재를 결정했다.
그러나 아미파와 전면전을 벌이거나 커다란 분쟁이 일어나는 것은 바라지 않았다.
대외 총괄군사 당설련이 해결첵을 제안했다.
가주들은 그녀의 계획을 승인했고, 그 결과가 바로 이번 출정이었다.
“사태를 매듭짓는다니…….”
모용미는 헛웃음을 흘렸다.
“피할 수 없는 비무를 상대에게 강요하면서 잘도 사태가 매듭지어지겠군요.”
당설련이 제안한 방법은 바로 비무였다.
강호 무림의 전례대로 비무를 벌여, 패자가 승자의 요구에 전적으로 승복하는 것이다.
물론 아미파가 응할 리는 없었다.
그들에게 이번 사태는 태평맹의 전적인 폭거였기 때문이다.
일방적으로 도발해 놓고 공평하게 비무로 해결하자고 하면 응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이 출정은 아미파를 비무로 끌어내기 위한 압박의 성격이 컸다.
“뭐, 당설련 군사에겐 어느 쪽이든 상관없겠지요. 아미가 비무를 받아들이건, 아니면 전면전으로 치닫건 말입니다.”
“쉽지는 않을 텐데요?”
모용미는 싸늘한 시선으로 말했다.
“아무리 칠대세가의 정예라 해도, 고작 백여 명으로 아미와 전면전을 벌일 수는 없어요.”
“있습니다.”
제갈기호는 단언했다.
“왜냐하면 지금 이곳에는 당문의……. 어이쿠, 이거 말하면 안 되는 건데.”
짐짓 놀란 척하던 제갈기호는 행렬 앞쪽을 슬쩍 보고는 목소리를 낮췄다.
“……대단한 분께서 계시거든요.”
모용미의 표정이 굳었다.
‘설마…….’
당문이 무서운 것은 그들이 독을 다루기 때문이다.
비겁한 방법이라며 비웃음을 당하기도 하지만 독의 무서움은 아무도 무시하지 못한다.
‘독기공의 고수가?’
무엇보다 무서운 것은 독기공이다.
독기공은 검기발현의 절정고수들이라도 가벼이 볼 수 없을 정도로 치명적이었다.
만일 당문 일행 중에 독기공의 고수가 모습을 감추고 있다면 아미파의 승세는 희박하다.
사락.
모용미는 행렬 앞쪽을 바라보았다.
당설련과 세가의 책임자들이 선두에 서고, 삼십 여 명의 당문 무사들이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용봉지회의 우승자인 당혁의 모습도 그곳에 있었다.
당혁이 이 일에 자원하는 바람에 다른 오룡삼봉과 후기지수들 역시 나서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은 아예 긴장감조차 없는지, 행렬에서 벗어나 자기들끼리 모여 다니며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쯧, 저래 봤자 다 쓸데없는 짓입니다.”
제갈기호가 그들을 쳐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이야 또래가 더 좋겠지만, 결국 가문의 이해관계 앞에서는 소용없어요.”
그 말엔 대꾸도 하지 않고 모용미는 행렬을 유심히 살폈다.
나머지 대부분은 여섯 세가에서 온 육십여 명의 무사들이었다.
각 세가별로 십여 명 정도에 불과해서, 사실 태평맹의 무력 압박이라기엔 지나치게 당문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곳 사천이 당문의 본거지인 영향도 있었겠지만 말이다.
‘특이한 사람은 보이지 않는데…….’
독기공의 고수가 숨고자 하면 모용미로서는 알아낼 수가 없다.
그러니 보이지 않는 것이 오히려 당연한 일일 것이다.
“뭐, 어쨌든.”
어깨를 으쓱하며 제갈기호는 말했다.
“당문 말고 나머진 다 장식입니다. 저기 저 북해일문처럼요.”
모용미는 자신도 모르게 뒤쪽을 바라보았다.
다른 세가들과 달리 백색 무복을 입은 십여 명의 무사들이 보였다.
바로 북해일문의 사람들이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제갈기호가 고개를 저었다.
뭐가 안타깝냐고 물을 필요는 없었다.
“저 아가씨는 예전에 아주 귀엽고 호감 가는 인상이었는데 말입니다. 애매하게 언니를 따라 하느라 특유의 매력이 죽어 버렸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