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6화. 북해일문
사천성 성도 외곽의 한 객잔.
“후우우.”
이른 아침, 운현은 조용히 숨을 골랐다.
새벽 수련을 마치고 나면 언제나 이렇게 숨을 가다듬는 것이 그의 습관처럼 되어 있었다.
스륵.
북해의 검, 미명이 조용히 칼집 안으로 모습을 감췄다.
잠시 수련의 여운을 음미하던 운현은 고개를 돌려 조용히 말했다.
“끝났습니다.”
저벅.
그 목소리에 답하듯 조관이 모습을 나타냈다.
운현이 옷매무새를 가다듬는 사이, 조관은 운현 옆에 다가왔다.
“늘 이렇게 수련을 하십니까?”
“아닙니다.”
운현은 미명을 가볍게 어루만지며 답했다.
“오늘은 어쩐지 예전 생각이 좀 나서요. 그보다 조사에 진척은 있었습니까?”
조관은 고개를 저었다.
“태평맹과 영웅맹의 유착관계를 보여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사천의 지방관들이 당문과 가까운 관계이긴 합니다만 영웅맹이나 문왕에 연관된 징후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렇군요.”
그건 이미 예상하고 있던 결과였다.
태평맹이, 아니 당설련이 허술히 일을 처리할 리는 없을 테니까.
“그런데 생각보다 태평맹의 재정 규모가 상당하더군요.”
“재정 규모요?”
“네. 천하삼대상단은 물론 각 지역 상단들과도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그건 이번 대회를 계기로 생긴 변화입니까?”
“아닙니다. 그 이전부터입니다.”
심각한 어조로 조관은 말을 이었다.
“오히려 각 지역 상단과 관계를 쌓은 것은 최근의 일입니다. 천하삼대상단은 태평맹이 설립되자마자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마치…….”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조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저녁에 있을 마지막 연회에도 천하삼대상단의 관계자들이 참석할 것입니다. 모두 각 상단의 주요 직책에 있는 이들입니다.”
“상단이라…….”
운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상단에 대해서 운현은 별로 아는 것이 없다.
광주에서 배운 것이라곤 장부 작성하는 법 정도일 뿐, 운영이나 조직에 대해선 전혀 알지 못한다.
“상단도 감찰이 가능합니까?”
“가능은 합니다만 상단에 대해 잘 아는 감찰어사가 없습니다. 다만 자료라면 입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상단은 주요 감찰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비밀스러운 자료라도 얻기는 어렵지 않았다.
상단은 관의 조사에 저항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 그렇게 해 주십시오. 아, 그리고.”
운현은 조관에게 말했다.
“의견을 듣고 싶은 것이 있으니 같이 가시지요. 마침 좋은 차가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조관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조용히 운현의 뒤를 따랐다.
***
태평맹 무림용봉지회의 마지막 연회는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사방이 트인 커다란 전각은 대낮처럼 불을 밝혔고, 비단 옷을 차려입은 귀빈들은 웃으며 인사를 나눴다.
칠대세가의 주요 인물들은 물론이고 상계와 사천의 유력 가문들, 그리고 각 지역의 문파 대표자들까지 대회장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연회장에는 향기로운 미주와 진기한 요리들이 가득해서 모여든 귀빈들을 즐겁게 하기에 충분했다.
가장 기뻐한 사람은 다름 아닌 담소하였다.
“와, 이거 맛있는데요? 독특해요.”
“그래?”
진예림이 담소하의 음식을 하나 집어 먹었다.
그리고 곧 움찔하더니 다급하게 무언가를 찾았다.
결국 품에서 작은 천을 꺼낸 진예림은 입안에 있던 것을 치우고 단숨에 차를 들이켰다.
“푸핫. 이거 맛이 왜 이래?”
“특이하잖아요. 맛있는데요?”
“특이하다니, 이건 마치 쓰…….”
진예림이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데, 조관이 운현에게 말했다.
“안 드십니까?”
운현은 빙긋 웃었다.
“은침이 없어서 못 먹겠군요.”
“네?”
“농담입니다.”
문득 목소리를 낮추며 운현이 말했다.
“아마도 오늘 연회에서는 특별한 일이 있을 것입니다.”
“특별한 일요?”
“네.”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설련 군사가 제게 이 연회를 기한으로 제시한 건, 분명 의도가 있을 테니까요.”
당설련은 운현에게 오늘 연회를 서한으로 통고했다.
그녀가 아무런 의도 없이 이 연회를 지정했을 거라고 운현은 생각하지 않았다.
오늘 연회에서 당설련은 운현에게 무언가를 보여 줄 작정인 것이다.
“아, 그리고.”
운현이 조관에게 물었다.
“아침에 말씀드린 일들은 어떻게 되었지요?”
“말씀하신 대로 하였습니다.”
“결과는요?”
“아무래도, 아미입니다.”
“역시.”
운현이 고개를 끄덕이고, 옆에 있던 진예림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다시 운현이 물었다.
“일행 중에 전음이 가능한 분이 있을까요?”
“없습니다만…….”
조관이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
“대인께서 하시지 않습니까?”
“못 합니다.”
운현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사실 제가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습니다.”
사람들은 고수라면 뭐든지 다 할 줄 안다고 여긴다.
하긴 사람의 능력을 뛰어넘으니 그렇게 생각할 법도 하다.
그러나 고수에게도 분명 제한은 있다.
“여자예요?”
옆에 있던 진예림이 불쑥 물었다.
운현이 돌아보자 그녀가 다시 말했다.
“은밀히 말을 전할 대상이 여자인가요?”
“어, 그렇습니다만…….”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진예림은 피식 웃었다.
어쩐지 오해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운현이 무어라 하기도 전에 진예림은 가볍게 말을 이었다.
“그럼 쪽지를 적어 제게 주세요. 제가 전할게요.”
“어떻게요?”
“이런 연회장엔 여자들만의 공간이 반드시 있게 마련이에요. 여자들은 신경 써야 할 게 생각보다 많거든요.”
옆에서 담소하가 ‘누님은 없는데.’라고 중얼거렸다.
진예림은 담소하를 한 번 노려본 후, 말을 이었다.
“은밀히 쪽지를 전하는 정도야 간단하지요. 그게 사랑의 밀어건, 아니면 경쟁자를 향한 저주건요.”
“그런데 꼭 여기서 전해야 할 이유가 있나요?”
담소하가 운현에게 물었다.
“밖에선 지켜보는 눈이 있더군요.”
객잔에 감시가 붙어 있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혹여 자신이 연락한 것이 당설련에게 알려지만 상대가 곤란에 처할지도 모르는 것이다.
진예림의 방법이라면 그럴 걱정은 없을 터였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부드러운 음악을 따라 여유로운 시간들이 흐르던 때였다.
사박, 사박.
태평맹 대외 총괄군사 당설련이 연회장에 들어섰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에게 향했다.
화려한 붉은 비단옷과 그녀의 당당한 눈빛은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사박.
연회장 앞쪽, 중앙에 선 당설련은 가볍게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참석자들 역시 각자 고개를 숙여 그녀의 예에 답했다.
사락, 사락.
천하에서 모여든 각계각층의 귀빈들이 그녀에게 예를 표하는 모습은 가히 장관이었다.
“와우.”
담소하가 나지막이 감탄했다.
“무슨 사천의 여왕이라도 나타난 것 같네요.”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담소하의 말이 틀리다고 할 수도 없었다.
이번 대회를 처음부터 끝까지 주관한 당설련은, 이미 태평맹의 실세나 다름없었다.
“참석해 주신 여러 귀빈들께 감사드립니다.”
낭랑한 목소리로 당설련이 말했다.
“여러분이 함께 계시니 강호 무림에 태평성대가 곧 찾아올 것을 알겠군요. 참으로 기쁜 일입니다.”
부드러운 미소를 짓던 당설련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오늘, 이 자리에 특별한 분들이 함께하셨습니다.”
운현과 조관 일행의 눈동자가 빛났다.
조금 전 운현이 말했던 특별한 일이 지금 벌어지려 하고 있는 것이다.
사락.
당설련은 옆으로 몸을 틀었다.
그 한순간, 운현은 그녀의 시선이 자신을 스쳐 지나간 것을 똑똑히 보았다.
그녀의 붉은 입술에 피어오른 것은 바로 승리자의 미소였다.
“아주 먼 곳에서 오신 분들이십니다.”
당설련이 손을 내밀고,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쪽을 향했다.
사박.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새하얀 눈꽃처럼 아름다운 젊은 여인이 연회장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사박, 사박.
은실로 수를 놓은 백색 비단이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물결쳤다.
불빛 아래 반짝이는 여인의 미모는 마치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 했다.
사람들은 숨 쉬는 것조차 잊었다.
고귀한 느낌마저 드는 그녀의 아름다움은 연회장을 침묵 속에 빠뜨렸다.
운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형편없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소궁주.’
그녀는 바로 북해의 소궁주였다.
지금 이곳, 태평맹 총단에 그녀가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사박.
소궁주는 당설련 옆에 멈춰 섰다.
붉은 옷을 입은 당설련과 눈처럼 하얀 비단옷을 입은 소궁주의 모습은 매우 대조적이면서도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참으로 대단한 미인이군.’
감찰어사 조관이 속으로 감탄했다.
황실에서도 저런 여인은 흔치 않았다.
그저 아름답다는 것만이 아니다.
조관이 황실을 떠올렸다는 것 자체가 그녀의 품격을 자연히 말해 주고 있었다.
“……와아.”
담소하가 탄성을 흘렸다.
하지만 진예림은 핀잔을 주지 못했다.
그녀도 소궁주의 모습에 눈을 빼앗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박, 사박.
잠시 정신을 잃고 있던 사람들은 누군가 연회장에 들어오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손에 비파를 든 귀여운 인상의 아가씨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백색 비단옷을 입은 그녀 역시 빼어난 미인이었지만, 앞선 여인 탓에 빛이 바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저벅.
차가운 인상의 호위 무사와 시비로 보이는 여인 역시 연회장으로 들어왔다.
마지막으로 뚱뚱한 중년인이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들어왔다.
“여러분.”
당설련이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산서성 북해일문을 여러분께 소개합니다.”
사락.
소궁주는 천천히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북해일문의 문주입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낭랑하게 연회장에 퍼졌다.
누군가 성급하게 물었다.
“방명이 어찌 되시오?”
소궁주는 부드럽게 웃었다.
“북해일문주라는 호칭으로 족합니다.”
그건 명백한 거절이었다.
사람들 사이에 웅성거림이 번져 가자 당설련이 나섰다.
“이분들께 이름은 소중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당설련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북해일문은 산서성에서 이미 수십 년간 터를 닦아 온 문파입니다만, 동시에 북해의 풍습을 오랫동안 지켜 온 곳이기도 하니까요.”
오래된 풍습을 지키는 문파나 집성촌은 흔하다.
비록 북해의 풍습이라 해도, 수십 년간 산서성에 있었다면 이민족이라 부르기는 어렵다.
사람들은 당설련의 설명에 납득했다.
소궁주의 미모가 주는 호감 역시 무시할 수 없었다.
‘으음.’
하지만 운현은 달랐다.
수십 년간 산서성에 있던 것은 북해일문이지 소궁주가 아니다.
즉, 당설련은 고의적으로 설명을 얼버무린 것이다.
그리고 소궁주가 지금 이 자리에 나타난 의미는 분명했다.
낭랑한 목소리로 당설련은 말했다.
“앞으로 북해일문은 태평맹과 뜻을 같이하며 긴밀한 관계를 이어 갈 것입니다. 강호 무림의 새 시대를 함께 열어 갈 북해일문을 따뜻하게 맞이해 주시기 바랍니다.”
당설련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가 직접 소개했다는 것은 태평맹이 북해일문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긴다는 의미다.
태평맹에 곧 북해일문이 더해질지 모른다는 것을 사람들은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하하하! 참으로 기쁜 일이오.”
“태평맹의 세가 더욱 강해지겠소이다.”
사람들은 즉시 당설련과 북해일문의 문주에게 축하를 건넸다.
당설련은 북해일문 일행과 함께 연회장을 여유롭게 거닐며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칠대세가의 대표자들은 물론 거대 상단과 유력 가문들, 그리고 각 지역 문파들에게 북해일문을 소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대인.”
조관이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저 여인이 누구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