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5화. 아미산에 드리우는 암운
사천성 아미산은 천하에 이름난 산이다.
세월을 따라 스러져 가는 고목과 희귀한 꽃, 그리고 수정처럼 맑은 물이 흐르는 이 산은, 그 이름처럼 단아한 여인의 눈썹처럼 아름다웠다.
그러나 이 산의 이름은 강호 무림에서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바로 아미산에 위치한 아미파 때문이다.
쿵.
오래된 서탁이 둔중한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결단코 용납할 수 없는 망언입니다!”
아미파 십이선사 중 한 명인 지심이 말했다.
“태평맹이 아무리 안하무인이라 해도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입니까? 감히 우리더러 자중하라니요!”
십이선사 중 가장 젊은 지심은 노기를 감추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태평맹이 아미에 정식 서찰을 보내 대회의 협조를 당부하며 외부 활동을 자중해 달라고 요청했기 때문이다.
“귀빈으로 초청하기는커녕 사전에 양해조차 구하지 않고는 감히 자중하라고요? 이런 모욕을 감내하란 말입니까?”
사천성의 패자는 예로부터 당문과 아미파였다.
불가인 아미파는 명예를, 속가인 당문은 실리를 추구하며 가급적 서로를 자극하지 않았다.
무림맹에서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아미파는 사천의 존경받는 스승으로, 그리고 당문은 사천의 실질적인 지배자로 자리매김해 온 것이다.
그러나 무림맹이 무너진 이후 모든 것이 바뀌어 버리고 말았다.
태평맹의 설립 이후 당문의 태도는 점점 도를 넘더니 아예 안하무인 격으로 바뀌고 말았다.
감히 아미파를 향해 자중하라는 표현을 쓰는 건 도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흥분하지 마시게, 지심 사태.”
십이선사 중 한 명인 혜령이 나지막한 어조로 말했다.
“혜월 신니께서 거동하실 수 없는 지금, 절대로 경거망동해서는…….”
혜월은 아미파의 장문인이자 십이선사의 수장이다.
그녀는 무림맹이 무너질 때 큰 부상을 입어 거동조차 못 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당문의 방자함을 그냥 놓아두란 말입니까?”
젊은 지심이 사뭇 분노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녀의 말은 아미파 제자들의 마음을 대변한 것이기도 했다.
장문인 혜월과 주요 제자들의 부상, 그리고 기세등등하게 세력을 뻗고 있는 태평맹의 모습은 아미파 제자들을 위축시키기에 충분했다.
당문이 언제 아미를 넘볼지 모른다는 위기감 역시 팽배해 있었다.
사천의 유일한 패자가 되려는 당문의 야욕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당장 저들에게……!”
“진정하게.”
조용한 목소리가 지심의 말을 막았다.
비록 음성은 낮았지만 그 가운데 담긴 기세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혜령의 뜻도, 지심의 마음도 모르는 바가 아닐세.”
그녀는 바로 십이선사의 둘째이자, 혜월을 대신하여 아미파를 이끌고 있는 법영이었다.
눈을 지긋이 감고 불호를 외운 법영은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태평맹의 이번 처사는 확실히 지나친 감이 있네. 이웃이라면 마땅히 서로를 존중해야 할 터, 사람을 보내 정식으로 항의의 뜻을 전하도록 하지.”
지심은 물론 다른 십이선사들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상황이 좋지 않다지만 이대로 있는 것은 아미파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는다.
‘음. 당문의 심사가 워낙 간교하니…….’
법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경고의 뜻은 분명히 전하되 자칫 그들의 도발에 휩쓸리는 일은 없어야 했다.
“지심과 혜령이 수고해 주시게.”
십이선사의 두 명, 젊은 지심과 노련한 혜령이라면 일을 잘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지심과 혜령이 동시에 합장하며 말했다.
법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불호를 되뇌었다.
‘당분간 당문과 긴장 관계가 되는 것은 피할 수 없겠군.’
아미가 항의한다고 당문이 고개를 숙일 리는 없다.
결국 두 문파 사이에 긴장이 흐르는 건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당문과 아미파가 공존해 온 것이야말로 오히려 비상식적인 일인지도 모른다.
“허어.”
나지막이 한숨을 쉬며 법영은 다시 한 번 불호를 되뇌었다.
그녀의 깊은 고뇌가 불호마다 절절히 아로새겨져 있었다.
***
사천성 성도, 태평맹 총단.
이번 용봉지회의 우승자인 당혁은 대외 총괄군사의 집무실에 들어섰다.
달칵.
“아, 왔어? 잠깐.”
당설련은 당혁에게 눈짓하고는 수하와 대화를 계속 이어 갔다.
수하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무엇인가 보고하고, 당설련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서류를 읽어 내려갔다.
당혁은 힐끔 서류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모두가 비문(秘文)으로 처리되어 무슨 내용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음, 좋아. 그래.”
사락.
검토를 끝마친 당설련은 고개를 들어 수하에게 서류를 건넸다.
“이대로 해.”
“알겠습니다.”
수하는 공손하게 서류를 받아들고 예를 표했다.
그리고 즉시 집무실을 나갔다.
탁.
당혁의 뒤에서 문이 닫혔다.
당설련은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다렸지? 앉아.”
당혁은 말없이 자리에 앉았다.
당설련은 동생을 위해 손수 차를 따라 주었다.
또르륵.
자신의 잔도 채운 당설련은 당혁 맞은편에 앉았다.
“자숙 기간은 끝났지?”
당설련이 찻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러나 당혁은 묵묵히 찻잔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차피 이 자리는 당설련이 그를 부른 것이다.
“황보선혜 때문이니?”
당혁이 움찔했다.
“……선 매는 상관 없습니다.”
이를 악물고 당혁이 말했다.
당설련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기다리라고 했지?”
당설련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달칵.
“기다리면 네 손에 쥐여 준다고, 그녀를 마음대로 할 수 있게 해 주겠다고 분명히 그렇게 말했을 텐데?”
“선 매는…….”
당혁이 당설련은 노려보며 말했다.
“물건이 아닙니다. 누님.”
“그렇다고 무슨 천상의 선녀인 것도 아니야.”
당설련은 피식 웃었다.
“그녀도 여자야. 다른 사람과 하나도 다를 바 없는. 아니 알고 보면…….”
“선 매는 다릅니다!”
“뭐가?”
차가운 당설련의 시선에 당혁은 이를 악물었다.
‘쯧.’
당설련은 속으로 혀를 차며 찻잔을 들었다.
남녀의 애틋한 정을 당설련이라고 모르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지금은 절대 허락할 수 없었다.
‘앙큼한 것 같으니.’
황보선혜는 매력적이지만 날카로운 독을 지닌 여자다.
독니를 꺾고 팔 다리를 묶기 전엔 결코 동생에게 건네줄 수 없다.
당혁이 그녀의 세 치 혀에 놀아나는 꼴을 보는 건 이번으로 충분하니까.
찻잔을 놓으며 당설련은 입을 열었다.
“오늘 저녁, 총단에서 비공개 연회가 있어. 본래라면 너도 용봉지회의 우승자로 참가해야겠지만…….”
그녀의 말에 당혁의 표정이 굳었다.
명색이 태평맹 무림용봉지회다.
당연히 오룡삼봉이, 그중에서도 우승자인 당혁이 주인공이 되어야 했다.
그가 젊은 혈기에 휩싸여 망쳐 버리지만 않았더라도 말이다.
“나오지 마. 대신 내가 말하는 임무에 자원해. 곧 중대한 일이 벌어질 테니까.”
당혁은 의아한 표정이었다.
곧 벌어질 중대한 일이란 게 대체 무엇일까?
“자숙의 뜻으로 스스로 연회에 불참했다고 하면 어른들의 시선도 누그러질 거야. 그리고 차근차근 다시 신뢰를 쌓아 가면 돼. 알겠어?”
당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당설련은 언제나 그의 길을 정해 주었다.
그것이 최선이라는 건 당혁도 알지만 그의 의지가 무시된 최선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황보선혜는 그런 당혁이 발견한 유일한 의미였다.
비록 당설련은 결코 인정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후우.’
당혁의 못마땅한 표정을 보며 당설련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자신의 말만 따르면 황보선혜 같은 여자들 따위는 얼마든지 손에 넣을 수 있다.
그런데 왜 저리도 불만스러워 하는 것일까?
“그리고 하나 더.”
당설련이 나지막이 말했다.
“두 번 다시 창룡검주와 얽히지 마. 무슨 일이 있어도.”
당혁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그러나 당설련은 상관하지 않았다.
“문제도 안 되고 말썽도 안 돼. 그가 무엇을 하건 너와는 상관없는 일이야. 설령 그게 황보선혜와 연관된 일이라도 말이야. 알았어?”
당혁은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악다문 이와 움켜쥔 주먹은 그가 어떤 심정인지 분명히 보여 주고 있었다.
“……어째서.”
당혁이 이를 갈며 말했다.
“어째서 누님마저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그자는 허명을 얻었을 뿐인 자입니다!”
강호 무림에는 창룡검주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했다.
창룡검주는 하루아침에 명성을 얻은 사람이다.
철혈사왕 염중부와 맞섰다는 것 외에는 그 어떤 행적도 알려지지 않았다.
항주 인근의 무인들을 숱하게 구해 냈다고 하지만 그건 그의 제자 독고랑이 한 일이다.
본래 과장과 허세가 심한 강호 무림이니, 창룡검주의 소문을 허명이라 치부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가 던진 은젓가락에 오룡검이 부러지고도…….”
당설련의 반응은 싸늘했다.
“그런 헛소리야?”
당혁은 감히 대답하지 못했다.
당설련이 저런 눈빛을 할 때는 절대로 반항해서는 안 되는 것을, 당혁은 이미 뼛속 깊이 알고 있었다.
“나는 태평맹의 그 누구보다도 그를 잘 알아. 그래서 경고하는 거야.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와는 연관되지 마. 결코.”
당혁은 이를 악물었다.
그 모습에 당설련은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괜찮아.”
당설련이 사뭇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를 상대로 검이 부러진 건 결코 치욕이 아니야. 만일 무림맹이 무너지지 않았다면, 그는 맹주가 되었을 사람이니까.”
나름 위로하려 한 말이지만 당혁의 귀엔 들어오지 않았다.
당설련 역시 당혁을 붙들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곧 벌어질 중대한 일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고민할 필요 없어. 너는 이제 모든 것을 손에 쥐게 될 거야. 내가 그렇게 만들어 줄 테니까.”
당혁은 아직 젊다.
그리고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앞으로 경험만 더 쌓는다면 이번 같은 실수는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은 경고로 족했다.
당혁은 그녀의 경고만큼은 결코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됐어. 나가 봐.”
당혁은 일어섰다.
당설련을 향해 고개를 숙인 후, 당혁은 집무실을 나갔다.
끝까지 당설련과는 시선을 맞추지 않은 채로.
탁.
문이 닫히고 당혁이 사라지자 당설련은 의자에 등을 기댔다.
“후우.”
말이 통하지 않는 이 상황이 답답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당혁을 포기할 수도 없었다.
당혁은 누가 뭐라 해도 그녀의 하나뿐인 동생이니까.
띠링.
탁자에 놓인 작은 종이 울렸다.
“들어와.”
당설련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아까 나갔던 수하가 서류를 들고 집무실로 들어왔다.
“말씀하신 대로 공손연 공자에게 적당한 직위를 수여하고 협상의 전권을 위임한다는 뜻을 전하였습니다.”
“반응은 어땠어?”
“대단히 흡족해 하였습니다.”
“좋아.”
당설련은 서류가 쌓인 서탁 앞에 앉았다.
“며칠 내로 아미에서 사람이 올 거야. 기루의 별채에 자리를 준비해.”
“……기루 말입니까?”
아미파는 불가다.
아무리 별채라지만 기루에서 맞이한다는 건 비상식적인 행동이었다.
“그래. 총단이든 객잔이든 자리가 전혀 없어. 만일 기루라고 발조차 들이기 싫다고 하면 돌아가라고 해.”
총단이 번잡하고 객잔에 사람이 가득한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기루의 별채는, 비록 고급스러운 곳이긴 해도 노골적인 홀대에 가까왔다.
그러나 당설련이 그리하기로 결정했다면 변경은 없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술은 내가 따로 말해 놓은 것으로 준비하고.”
이번에는 수하도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허나 아미파는…….”
“알아.”
당설련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공손연 공자를 위한 것이야. 맹을 위해 큰일을 하는데, 그 정도의 배려는 해야 하지 않겠어?”
그 술이 단순한 명주가 아니라는 건 수하도 알 수 있었다.
수하는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명하신 대로 준비하겠습니다.”
예를 마친 수하는 즉시 집무실을 나갔다.
탁.
문이 닫히고 당설련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래, 모든 건 쓰기 나름이지.”
바스락.
당설련은 서류를 들었다.
그곳엔 공손세가의 소공자, 공손연에 대한 모든 것이 적혀 있었다.
“사람이건, 물건이건, 혹은 쓰레기건 간에.”
비릿한 미소가 당설련의 붉은 입술에 머물렀다.
하지만 그건 오래가지 않았다.
사락.
당설련은 다시 서류에 파묻혔다.
하나하나가 모두 맹의 중대사인 일들이 그녀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