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4화. 산문을 나선 승려
영웅맹 무한 지부 부지부장 장삼채는 이무심에게 말했다.
“허나 정가장은 만만한 곳이 아닙니다. 장주인 일섬검은 무공이 뛰어나니…….”
“뛰어나면 뭐? 칼이 안 들어가기라도 하나?”
이무심은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태원삼흉 앞에선 일섬검이고 뭐고 다 필요없느니라. 흐흐흐.”
“물론이오.”
말에 타고 있던 태원삼흉 중 첫째, 광마가 웃으며 말했다.
“일섬검 따위, 어린아이 팔을 비트는 것보다 더 간단하외다. 클클클.”
둘째 광살과 셋째 광혈도 피식 웃었다.
그 모습을 보며 장삼채는 침을 꿀꺽 삼켰다.
태원삼흉은 과거 태원 지역에서 악명을 떨치던 사파의 고수들이다.
악행이 극에 달한지라 무림맹의 척살 대상이 되었고, 큰 부상을 입은 후 은거해 버렸다.
그런 그들이 난데없이 이무심과 함께 나타난 것이다.
‘속셈이야 뻔하지만…….’
태원삼흉의 목적은 뻔했다.
영웅맹 태주인 이무심을 통해 영웅맹에 들어가고자 하는 것이다.
사실 그들 정도의 실력이라면 영웅맹 지부 한 자리쯤 차지하는 건 쉬운 일이었다.
다만 이무심의 태주라는 직책이 유명무실한 것과, 맹주 염중부가 이무심 따위 신경도 쓰지 않는 점만 빼면 말이다.
‘태원삼흉이 버티고 있으니 뭐라 하지도 못하고…….’
지금 태원삼흉은 이무심의 호위를 자처할 정도였다.
때문에 술에 취해 봤자 기껏 객잔의 기물을 부수는 정도이던 이무심이, 호기롭게도 정가장 약탈에 나선 것이다.
일부 수적들까지 충동질해서 말이다.
‘젠장.’
장삼채는 속으로 지부장 욕을 했다.
무한 지부장은 그런 이무심을 말리지 않았다.
오히려 부지부장인 장삼채에게 상황을 관리하라며 책임을 떠맡겼다.
결국 속앓이는 장삼채의 몫이 되고 말았다.
“그래! 그렇지! 잘 죽였다. 크하하하.”
이무심의 흥분한 목소리를 애써 외면하며 장삼채는 정가장을 바라보았다.
챙, 챙.
“크악.”
어둠 속에서 쇳소리와 비명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벌써 수십의 사람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지만, 그조차 이무심에겐 한때의 오락에 불과했다.
‘오늘 밤만 버티자. 내일이면 대회도 끝나니까.’
장삼채는 속으로 그렇게 되뇌며 한숨을 쉬었다.
예상외로 영웅맹 지부 대회에는 수많은 손님이 찾아왔다.
영웅맹에 잘 보이려는 사파들과, 보복이 두려운 상단과 문파 들이 대회를 축하하러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영웅맹 총단이 있는 항주는 사파 고수들이 넘쳐날 정도라고하니, 영웅맹이 얼마나 승승장구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응? 저놈 뭐야?”
이무심의 목소리에 장삼채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수적 하나가 칼에 쓰러지는 광경을 보았다.
무복을 입고 나타난 중년 무인은 바로 정가장의 장주, 일섬검 정익강이었다.
쉬익.
“크악!”
“아아악!”
장주의 검법은 대단했다.
한 번 검이 번득이자 대번에 서너 명의 수적들이 쓰러졌다.
“네 이놈들!”
일섬검 정익강이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감히 하늘이 두렵지 않느냐!”
그 외침은 사방을 쩌렁쩌렁 울렸다.
장주다운 기개가 뿜어 나오는 모습이었지만 이무심은 콧방귀를 뀌었다.
“하늘? 무슨 하늘? 네가 이 철면무심 앞에서 감히 하늘의 도를 논하느냐! 본디 하늘의 도는 막힘이 없어서 이리로도 가고, 저리로도 흐르느니라!”
‘또 저 버릇이 나왔군.’
장삼채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무슨 득도한 도사인 양 하는 것은 이무심의 오래된 버릇이다.
“철면무심? 그럼 네가 그 이무심이란 말이냐!”
정익강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가 자신의 명호를 아는 것이 기뻤는지 이무심은 뻐기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렇다! 내가 바로 그 이무심이다.”
“정가장은 너와 아무런 은원이 없거늘 이 무슨 짓이냐! 설령 갚아야 할 은원이 있다 해도 이렇듯 다짜고짜 사람을 죽이는 것이 수로채와 영웅맹의 법이더냐!”
그의 말은 정당했다.
그러나 이무심은 그런 말이 통할 사내가 아니었다.
“법은 무슨 법! 내가 가는 길이 곧 도이고, 내가 하는 일이 곧 법이니라!”
으득.
장주 정익강은 이를 악물었다.
이무심의 반응으로 보아 대화의 여지는 더 이상 없었다.
정익강은 작은 목소리로 옆에 선 아들에게 말했다.
“너는 틈을 보다가 어머니를 모시고 피하도록 해라.”
“아버지!”
아들이 놀란 표정으로 돌아보았지만 정익강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너뿐이다.”
그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네 어머니와 여동생을 돌볼 사람도, 정가장의 미래를 맡길 사람도 말이다.”
정익강은 이무심 옆의 세 사람이 고수라는 것을 이미 알아보고 있었다.
그들이 흘리는 기세는 감히 자신이 감당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아니, 아들이 제대로 피할 수 있을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아버지…….’
“제 걱정은 하지 마세요.”
여인의 낭랑한 목소리가 뒤쪽에서 들려왔다.
자박, 자박.
갓 소녀를 지난 듯한 젊은 아가씨가 손에 검을 든 채 걸어 나왔다.
어여쁜 그녀의 눈동자는 이미 결의로 가득 차 있었다.
“저도 싸울 수 있어요.”
“그래요. 저희 걱정은 하지 마세요.”
또 다른 여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중년의 여인, 정익강의 아내가 손에 작은 소도를 쥐고 말했다.
“저희는 오늘 정가장과 기꺼이 운명을 함께하겠어요.”
“여, 여보…….”
정익강은 이를 악물었다.
아내에 대한 고마움과 어찌할 수 없는 현실에 대한 고뇌가 그 눈빛에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었다.
“흥, 그래?”
이무심의 조롱 섞인 목소리가 정익강을 일깨웠다.
“함께 죽는 게 소원이라면 들어줘야지.”
태원삼흉을 돌아보며 이무심이 말했다.
“안 그렇소?”
태원삼흉의 첫째 광마가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그는 나지막이 말했다.
“셋째야.”
“네, 형님.”
셋째 광혈에게 광마가 말했다.
“가서, 죽여 줘라.”
쉬익.
대답 대신 광혈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광혈은 장주 정익강을 향해 짓쳐 들고 있었다.
“헉!”
정익강은 반사적으로 검을 들어 올렸다.
카앙.
“커헉.”
날카로운 쇳소리와 짧은 신음이 뒤를 이었다.
턱, 턱.
정익강은 검을 든 채 뒤로 물러섰다.
“아버지!”
“여보!”
“……나는 괜찮소.”
이를 악물며 정익강이 말했다.
하지만 그의 안색은 이미 어둡게 변해 가고 있었다.
탁.
태원삼흉 중 셋째, 광혈이 가볍게 땅에 내려섰다.
그의 손에서는 길고 날카로운 손톱 같은 모양의 병기인 조(爪)가 검붉게 번뜩이고 있었다.
“클클, 다음번엔 네 목을 따 주마. 그러고 나면…….”
광혈이 자신의 입술을 핧으며 말했다.
“네 아내와 자식들의 피를 마셔 주주지.”
그 목소리는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정익강의 아들과 딸, 부인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렇게는 안 된다.”
저벅.
정익강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검을 똑바로 세우며 정익강은 말했다.
“내 목숨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너를 죽이겠다.”
그건 목숨을 건 선언이었다.
그러나 태원삼흉과 이무심은 비웃음을 흘렸다.
“어디 한번…….”
쉬익.
광혈의 모습이 흐릿해졌다.
“해 봐라!”
그는 엄청난 빠르기로 정익강을 향해 짓쳐 들었다.
정익강은 이를 악물고 한 발을 내디디며 그대로 검을 내리그었다.
바로 그의 성명절기인 일섬검이었다.
“하아!”
그의 검이 허공을 가르고 광혈의 철조가 정익강의 목을 향해 쇄도해들어왔다.
그리고 다음 순간.
콰앙.
엄청난 폭음이 주위를 뒤흔들었다.
“큭.”
“크헉.”
정익강과 광혈이 동시에 신음을 흘렸다.
태원삼흉의 광마와 광살이 눈살을 찌푸렸다.
탁, 탁.
그사이, 정익강과 광혈은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일그러진 얼굴로 가슴을 쥐고 있는 것으로 보아 두 사람 모두 내상을 입은 것처럼 보였다.
“양패구상?”
태원삼흉의 둘째, 광살이 인상을 쓰며 중얼거렸다.
장주 정익강의 실력이 광혈과 양패구상을 할 정도로 보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양패구상이 아니다.”
태원삼흉의 첫째 광마가 말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어둠 속을 바라보았다.
“누구냐! 어서 모습을 드러내라!”
이무심은 물론 장삼채도 어리둥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광마가 갑자기 왜 저러는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궁금증은 금방 풀렸다.
저벅.
어둠 속에서 건장한 젊은 청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삭발을 하고 승려의 옷을 입은 그는 한 손으로 합장을 하며 나지막이 불호를 외웠다.
“뭐야? 중인가?”
이무심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는 즉시 호기롭게 외쳤다.
“네놈은 누구냐! 뭔데 감히 영웅맹의 행사를 방해하는 것이더냐!”
“나는…….”
젊은 승려, 혜천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산문을 나선 승려일세.”
이무심의 인상이 더욱 구겨졌다.
그럼 이곳이 산문 밖이지 안이란 말인가?
말장난을 한다 여긴 이무심은 화를 숨기지 않으며 말했다.
“감히 이놈이 어디서…….”
“소림이냐?”
첫째 광마의 목소리가 이무심의 말을 끊었다.
광마는 아까보다 더욱 굳은 표정이었다.
“그렇네.”
혜천은 순순히 답했다.
한 손으로 합장하는 것은 소림의 오랜 전통이다.
“법명은?”
“혜천.”
광마는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하지만 생각 날 리가 없었다.
자신은 이미 여러 해 전에 은거한 데다가, 저 승려는 대단히 젊어 보였으니까.
“소림에서 배운 재주를 믿나 본데…….”
광마가 조소를 머금었다.
“하늘 위에 하늘이 있음을 알게 해 주마.”
“오, 그건 아주 놀라운 말이군.”
저벅.
또 다른 청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뭇 화려한 무복을 입은 청년, 매화검 영호준은 미소를 머금으며 말을 이었다.
“언제부터 태원삼흉이 하늘에 대해 가르칠 정도가 되셨나?”
“저, 저놈!”
둘째인 광살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매화검! 네놈이 어떻게 여기에!”
“여어, 잘 있었나?”
영호준은 광살에게 가볍게 손을 들어보였다.
“열심히 꽁무니를 빼더니 아직도 살아 있었군. 그래도 눈은 멀쩡해 보이네? 그때 조금만 더 세게 그을 걸 그랬어. 쯧쯧.”
정말로 아쉽다는 듯 영호준이 말했다.
광살은 이를 갈았다.
으득.
“네놈을 여기서 만날 줄이야. 참으로 천운이 아닐 수 없구나.”
광살은 자신의 도를 꺼내 들었다.
스릉.
기괴한 모양의 도가 불빛을 받아 번뜩였다.
“오늘, 네놈의 눈을 파 내어 그때의 빚을 갚고야 말겠다.”
광살이 예전 매화검 영호준에게 당한 것은 무림맹의 고수들에게 쫓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같은 경우라면 절대로 질 리가 없다고, 광살은 자신하고 있었다.
“아, 그건 조금 곤란하겠는데.”
영호준이 난처하다는 듯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첫째인 광마가 인상을 썼다.
“무슨 의미냐?”
“왜냐하면 오늘 자네들을 혼내 줄 분은…….”
영호준은 빙긋 웃었다.
“바로 이분이거든.”
슬쩍 옆으로 몸을 비키며 영호준이 말했다.
그제야 광마도, 광살도 고개를 돌려 혜천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헛바람을 삼켰다.
후우웅.
영호준에게 눈을 빼앗긴 사이, 혜천은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내력을 끌어 올리고 있었다.
삽시간에 혜천의 승복이 펄럭이더니 흙먼지가 사방에서 일렁였다.
혜천의 두 손에 모여드는 기세는 그야말로 무시무시할 정도였다.
“피, 피해라!”
광마가 즉시 외쳤다.
그러나 그 경고는 이미 늦었다.
스륵.
혜천이 한 손을 뒤로 잡아당기며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우렁찬 기합 소리와 함께 앞으로 내질렀다.
“하아!”
콰과과과곽.
엄청난 기세가 그의 주먹과 함께 터져 나왔다.
앞을 가로막는 것은 그 무엇이든 날려 버릴 듯한 강맹한 그 권격은, 태원삼흉의 첫째 광마를 향해 사정없이 짓쳐 들고 있었다.
그 순간, 광마의 머릿속에 떠오른 단어는 바로 ‘백보신권’이었다.
“마, 말도 안…….”
콰아앙.
광마의 목소리는 이어지지 못했다.
혜천의 일권은 광마는 물론, 옆에 있던 광살과 이무심 그리고 장삼채까지 한꺼번에 삼켜 버렸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한 인근, 항주에서 사천성 성도로 향하는 장강의 물길 중간에서 일어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