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3화. 세상을 좀 바꿔 볼까 합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죠.”
차가운 시선으로 당설련이 말했다.
“네, 좋습니다.”
운현은 진지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가 할 제안은 아주 간단해요.”
당설련은 말을 이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준다면, 당신이 원하는 것을 주겠어요.”
운현은 미소를 지었다.
“제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까?”
“아니, 몰라요.”
당설련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나는 확신해요. 당신이 원하는 것은 분명 내가 줄 수 있는 것이라고.”
그녀의 얼굴에 가느다란 미소가 서린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이 이곳까지 올 이유가 없을 테니까요.”
“맞습니다.”
운현은 긍정했다.
“하지만 할 수 있는 것과 그것을 실제로 하는 것은 아주 다른 문제지요. 모든 사람이 선을 알지만 선을 행하는 사람은 아주 드문 것처럼요.”
당설련은 가늘게 웃었다.
“그러니까 이론적으로는 가능하지만 내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는 뜻인가요?”
“아마도요.”
“후훗.”
찻잔을 매만지며 당설련이 말했다.
“당신은 마치 나보다도 더 나를 잘 아는 것처럼 말하는군요. 태평맹 대외 총괄군사가 어떤 자리인지 아나요? 권한이나 책무의 한계는요? 태평맹이 강호 무림에서 무슨 의미인지는 알아요? 아니, 애초에…….”
당설련은 이를 악물었다.
“당신이 날 알기나 해요?”
“모릅니다.”
운현은 담담하게 말했다.
“허나 그래도 사람들은 함께 살아갑니다. 서로 다른 방향으로 뻗은 가지라도 한 나무에 있다면 본래 하나인 것처럼 말입니다.”
당설련은 눈살을 찌푸렸다.
“나는 그런 모호한 말들을 싫어해요. 하지만 당신이 뭘 말하는지는 알겠군요.”
의자에 등을 기대며 당설련이 말했다.
“요컨대 당신의 편이 되라는 건가요?”
“같은 나무가 되자는 뜻이지요. 방향은 다르더라도.”
“그거 좋네요.”
당설련이 배시시 웃었다.
“이왕이면 연리지처럼 서로 얽혀 하나가 되는 건 어때요? 전권 대리인인 당신과 태평맹 대외 총괄군사인 나, 둘이서 말예요.”
연리지는 서로 다른 두 가지가 맞닿아 하나가 되는 것이다.
남녀의 애정이나 혼인 관계를 나타내는 잘 알려진 표현 중 하나였다.
운현은 빙긋 웃었다.
“허나 소저께서는 마음에 품으신 분이 따로 있지 않습니까?”
당설련이 흠칫했다.
운현은 찻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잊으셨나 본데 저는 소저와 영호준 대협의 조사단에 함께 있었습니다. 여러 달 동안 두 분을 아주 가까이에서 보았죠.”
“그래서요?”
당설련은 여유로운 미소를 흘렸다.
“마음에 누군가를 품었다고 해서 다른 남자와 하나가 되지 말란 법은 없어요.”
“그렇지요.”
운현은 나지막이 한숨을 흘렸다.
“마음에 품은 대로 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니까요.”
달칵.
찻잔을 내려놓으며 운현은 말했다.
“신승께서는 평화를 바라고 무림맹을 일으키셨지만 결국 무림맹은 무너졌습니다. 그리고 강호 무림은 영웅맹과 태평맹으로 재편되었지요.”
운현은 당설련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혈공자 문왕, 아니 일대상인이 의도한 바대로입니다.”
당설련의 입가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무슨 뜻이지요?”
“문왕은 철혈사왕 염중부에게는 무림맹주의 지위를, 독선 어르신께는 천하제일문을 제안했습니다. 아, 이건 알고 계신가요?”
“알고 있어요.”
“그렇군요. 소저가 떠난 후에 어르신께서 해 주신 말씀이라, 혹 모르실지도 모른다 생각해서…….”
운현은 기억을 더듬듯 한 손으로 살짝 턱을 매만진다.
“그 결과 무림맹은 무너지고 염중부는 영웅맹의 맹주가 되었지요. 하지만 이상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독선께서는 분명 문왕의 제안을 거절하셨는데, 지금 당문은 태평맹의 이름으로 천하제일문이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당설련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영웅맹 뒤에 혈공자 문왕이 있는 것처럼 태평맹의 배후에도 문왕이 있다는 말인가요?”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무림맹 내에서 일어났던 권력 쟁탈을 생각해 보면 태평맹의 설립은 어차피 일어날 일이었다고 볼 수도 있으니까요.”
거대 문파들은 무림맹의 권력을 차지하기 원했다.
심지어 신승과 공식적으로 결별을 선언하면서까지.
그렇다면 무림맹이 무너진 후에 그들이 새로운 맹을 내세운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래요. 물론 당문이 아니라면 불가능했을 테지만요. 당신 말대로 천하제일문이라 불릴 만한 우리 당문이 아니라면 말예요.”
맹은 그저 현판을 내건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칠대세가의 연합을 이루어 낸 당문의 조직력과 영향력은 그야말로 대단한 것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소저의 행동이나 항주 혈사 당시 당문의 움직임, 그리고 문왕이 독선 어르신을 접촉했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운현은 빙긋 웃었다.
“문왕과 당문 사이에 이미 어떤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더군요. 예를 들면 무림맹 이후 태평맹을 세우는 것에 관해서라든가, 말입니다.”
“훗.”
당설련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볼 수도 있다니 놀랍군요.”
당설련은 차분히 찻잔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그건 억측과 가정에 기반한 편파적인 결론일 뿐이에요. 그리고…….”
눈을 지긋이 감고 차를 음미한 당설련은 찻잔을 내리며 운현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설령 그렇다 해도 무엇이 다르죠? 지금은 이미 태평맹과 영웅맹의 세상이에요.”
“그렇습니다. 지금은 태평맹과 영웅맹의 세상입니다.”
운현 역시 찻잔을 들었다.
“그래서…….”
찻잔을 든 채로, 운현은 빙긋 웃었다.
“세상을 좀 바꿔 볼까 합니다.”
당설련은 눈을 크게 떴다.
지금 자신이 무언가 잘못 들었나 생각했지만 차를 음미하는 운현의 표정은 느긋하기만 했다.
“……뭐라고요?”
달칵.
“세상을 바꾸겠다고 했습니다.”
“당신이요?”
“네.”
당설련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나 그건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하!”
당설련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지금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나요?”
“물론 알고 있습니다.”
운현은 조용히 말했다.
“저는 일대상인이 만들어 놓은 지금의 강호 무림을 바꿀 것입니다. 그가 이은 것은 끊을 것이고, 모아 놓은 것은 헤쳐 버릴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일대상인이라도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겠지요.”
빙긋 웃으며 운현은 말을 이었다.
“자고로 개를 때리면 주인이 나오는 법이니까요.”
“개도 개 나름이에요.”
사뭇 날카로운 목소리로 당설련이 말했다.
“남궁세가를 봉문시킨 황천대를 당신이 상대할 수 있나요? 공손세가를 불태우고 흑도회를 멸문으로 몰아간 흑창기마대와 단궁대를 당신이 무찌를 수 있어요?”
당설련은 거침없이 말을 쏟아 냈다.
“아, 물론 백만 황군을 동원한다면 별로 어렵지도 않은 일이겠군요. 암천무제나 철혈사왕 염중부, 그리고 삼태상과 혈공자 문왕까지도요. 하지만 그다음엔요?”
날카로운 눈빛으로 당설련은 말을 이었다.
“장강에 가득한 영웅맹은 어떻게 할 건데요? 수로채들과 녹림은요? 그들도 황군을 동원해서 모두 불태워 버릴 건가요? 천하가 온통 난리로 뒤덮이겠군요. 안 그래요?”
탁.
당설련이 탁자에 손을 얹었다.
“당신은 못 해요. 왜냐하면 황실이 그걸 바랄 리 없으니까.”
그녀의 통찰은 정확했다.
황실은 난세를 원하지 않는다.
분명한 명분과 확신이 없는 한 백만 황군은 움직이지 않는다.
제아무리 운현이 박 공공의 전권 대리인이라 해도 말이다.
“이봐요.”
나지막이 한숨을 쉬고 당설련이 말했다.
“아무리 당신이 절대의 고수라 해도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강호 무림은 힘이 지배하는 곳이에요. 그리고 그 힘은 개인이 아니라 세력에서 나오죠. 홀로 떠도는 이는 결국 기인이나 광인으로 끝마칠 뿐이에요.”
눈을 빛내며 그녀는 말했다.
“그러니 나와 손을 잡아요. 나와 함께라면 당신은 오 년, 아니 삼 년 안에 반드시 큰 세력을 일굴 수 있을 거예요. 그러면 감히 세상을 바꾼다 해도 그 누가 비웃겠어요? 아니, 오히려 기꺼이 당신의 뜻에 고개를 조아릴 거예요.”
“그렇게는 할 수 없습니다.”
운현의 대답은 한 치의 주저함도 없었다.
“삼 년조차 인내할 수 없다는 건가요?”
“그건 인내가 아닙니다.”
조용한 목소리로 운현은 말했다.
“그저 도피일 뿐이지요.”
당설련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운현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또한 그것은 일대상인이 만들어 놓은 이 세상에 영합하여 살라는 뜻과 같습니다. 저는 결코 그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절대로 멈추지도 않을 거고요.”
그의 눈동자에서 빛나는 결의는 한치도 흔들림이 없었다.
“저는 오히려 소저께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당설련을 똑바로 쳐다보며 운현은 말했다.
“저를 택하십시오. 독선 어르신께서 그러하셨듯이, 문왕이나 일대상인이 아니라 제 편에 서세요. 그러면 저는 기꺼이 당신과 태평맹의 손을 잡겠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당설련과 운현은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아쉽군요.”
나지막이 당설련이 말했다.
“당신과는 제법 좋은 관계를 가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말과는 달리 그녀의 목소리는 사뭇 낭랑하기까지 했다.
“가능성은 아직 열려 있습니다.”
“맞아요.
당설련은 빙긋 웃었다.
“남녀의 관계란 아주 묘해서, 아무리 적대적인 관계더라도 한순간에 같은 편이 되는 게 가능하거든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요?”
운현은 조금 당황했다.
“어, 저기……. 제 말은 그런 게 아니라.”
“사흘 후에.”
당설련은 낭랑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마지막 비공개 연회가 있어요. 그때까지는 언제라도 날 찾아와도 좋아요. 하지만 연회가 끝나면.”
그녀의 미소에 차가운 기운이 서리기 시작했다.
“내가 당신에게 손을 내미는 일은 결코 없을 거예요.”
그것은 당문의 눈꽃이라는 명호가 더없이 어울리는, 차갑고 매혹적인 미소였다.
운현은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감사합니다. 명심하지요.”
그것으로 두 사람의 독대는 끝이 났다.
찻잔에 든 몽정황아는 어느새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
사천성이 태평맹으로 인해 흥청거리고 있는 동안, 기나긴 장강 유역에서는 영웅맹 지부들의 대회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장강 유역이 영웅맹의 대회로 흥청거리는 일은 없었다.
영웅맹 지부들의 대회는 필연적으로 약탈과 살인, 그리고 방화가 이어지는 참혹한 현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중에는 무한 인근의 유서 깊은 문파인 정가장이 있었다.
챙, 채앵.
“막아라!”
“가솔들을 빨리 피신시켜!”
한밤중, 정가장은 뜻하지 않은 야습을 당했다.
바로 태평맹 무한 지부의 수적들이었다.
정가장의 제자들이 사력을 다해 맞섰지만 영웅맹을 당해 낼 수는 없었다.
상대가 영웅맹이라는 것을 안 순간 기세도 꺾였다.
그러니 정가장은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수밖에 없었다.
“좋아! 그놈부터 죽여!”
말에 탄 이무심은 그 광경을 바라보며 소리를 질렀다.
그는 이미 꽤나 취해 있는 상태였다.
“그래! 어서 죽이라고! 으하하하하.”
“저, 태주님.”
“왜?”
이무심은 인상을 쓰며 돌아보았다.
수로채 연합의 총채주라는 지위는 유명무실해졌고, 철면무심이라는 호도 사람들의 기억에선 희미해졌다.
지금 이무심은 영웅맹의 태주라는, 명칭은 그럴듯하지만 아무 실권도 없는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정가장을 이렇게 하시면 조금 곤란합니다. 혹여 맹에서 문책이라도…….”
그는 영웅맹 무한 지부의 부지부장 장삼채였다.
과거 이무심의 수하였던 인연 탓에, 가끔씩 찾아오는 이무심을 박대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허, 쓸데없는 걱정은.”
이무심은 인상을 쓰며 말했다.
“어차피 보고는 안 해도 되잖나? 게다가 이건 맹과 상관없는 문제일세. 평소 정가장이 맹의 처사에 불만이 많다는 말을 듣고, 의협심 강한 우리 장강의 영웅들이 자발적으로 나선 것뿐이라니까?”
‘끄응.’
장삼채는 속으로 신음을 흘렸다.
정가장이 불만이 많은 건 맞는 말이다.
하지만 영웅맹의 처사에 불만이 없는 문파가 어디 있으랴?
특히 정가장처럼 오랫동안 무한에 터를 잡아 온 곳이라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