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2화. 영웅
칠대세가 가주들과 운현의 회합은 가벼운 담화로 마무리되었다.
운현은 당문, 제갈세가, 모용세가의 가주들에게 작별의 예를 표했고, 다른 대표자들에게도 가벼운 인사를 건넸다.
대외 총괄군사 당설련은 직접 운현을 대전 바깥까지 안내했다.
달칵.
문이 닫히고 당설련은 운현에게 말했다.
“수고하셨어요.”
당문의 눈꽃, 당문설화 당설련이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자리를 옮길까요?”
이미 그녀와 독대를 예정하고 있던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러지요.”
당설련은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앞서가기 시작했다.
운현과 진예림은 조용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
사박. 사박.
대전을 벗어나는 그들 뒤로 몇명의 시비들이 줄을 지어 이동했다.
잠시 후, 운현은 몇 개의 복도를 지나 휘장으로 가린 방문 앞에 도착했다.
당설련은 따르던 시비들을 물러가게 하고 직접 문을 열었다.
사락.
“들어오시지요.”
운현이 방 안으로 들어서고 진예림이 그 뒤를 따르려하던 때였다.
“소저께서는 여기서 기다리세요.”
당설련이 말했다.
“그럴 수는 없어요.”
진예림은 정색을 하고 대답했다.
“저는 대인을 호위해야 해요.”
“후후.”
당설련은 웃었다.
“당신이 창룡검주를요?”
진예림이 표정이 일그러지는데 당설련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
“여기는 당신이 발을 들일 곳이 아니에요.”
두 여인의 시선이 날카롭게 부딪혔다.
비록 진예림의 내력은 당설련에게 비할 바가 못 되지만, 각오만은 결코 뒤지지 않았다.
“진 소저.”
운현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진예림이 날카롭게 돌아보자 운현은 빙긋 웃었다.
“소저께서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
당설련의 눈썹이 살짝 일그러지고 진예림의 얼굴에 득의의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고개를 들고 당설련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여기서 기다리겠어요.”
그녀의 선택은 의외였다.
당설련의 찌푸린 눈썹은 펴지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당설련의 뜻대로 된 셈이지만 승자는 진예림이었기 때문이다.
사락.
당설련은 방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득의의 미소를 짓고 있는 진예림을 노려보며 문을 닫았다.
탁.
미소 짓던 진예림은 닫힌 문 앞에서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그녀 역시 당설련의 말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아.”
다시 한번 한숨을 쉬며 진예림은 몸을 돌려 문 앞을 지키듯 섰다.
어차피 목소리가 들릴 리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귀가 쫑긋 세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문을 닫은 당설련은 휘장을 내렸다.
사락.
커다란 휘장이 방문을 완전히 가렸다.
방문뿐 아니라 사방 벽에도 휘장이 내려져 있었다.
특이한 재질의 얇은 막이 여러 층으로 겹쳐진 이 휘장은 어지간한 벽보다 더 방음 효과가 뛰어났다.
덕분에 널찍한 방은 사뭇 아늑한 분위기마저 풍기고 있었다.
“앉아요.”
당설련이 운현에게 권했다.
옛스러운 풍취의 등불 서넛이 방 안을 은은하게 밝히고, 탁자 위에 놓인 찻주전자가 부드러운 향을 피워 올렸다.
“좋은 곳이군요.”
운현이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당설련은 피식 웃었다.
“그래도 어디 황실에 비하겠어요?”
“황실은 의외로 검소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인식과 달리 별로 대단한 것도 없지요.”
당설련은 세심한 손길로 찻주전자를 들었다.
“그런가요? 하지만 가장 대단한 것을 이미 가지고 있잖아요. 바로 절대권력 말예요.”
또르르륵.
당설련은 손수 운현의 찻잔을 채워 주었다.
손님에 대한 환영의 표시로 세 번 끊어 채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몽정황아라는 차예요. 사천성 몽산의 정상에서만 구할 수 있는 차지요. 예로부터 명차로 널리 알려져 있답니다.”
자신의 잔에도 차를 채운 당설련은 운현 맞은편에 다소곳이 앉았다.
“향이 좋군요.”
운현의 말에 당설련은 미소를 지었다.
“네. 몽정황아는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는 향이 특징이에요.”
사락.
당설련은 품에서 길고 얄팍한 함 하나를 꺼냈다.
그녀가 가볍게 힘을 주자 함이 열렸다.
달칵.
그 안에 있는 것은 붉은 비단 위에 놓여 있는 가느다란 몇 개의 은침이었다.
“당문이라면 사람들은 보통 독, 암기, 혹은 계략 같은 것들을 떠올리곤 하지요. 그래서 이곳에선 누구나 잔뜩 경계를 하곤 해요. 이런 차 한 잔에도 말예요.”
당설련이 긴 손가락으로 은침 하나를 집어들었다.
“어때요? 확인해 보겠어요?”
“독을 타셨습니까?”
“아니요. 그럴 리가 있나요.”
당설련이 즐겁다는 듯 웃었다.
“그럼 확인할 필요는 없겠군요.”
“어머, 혹시 모르잖아요?”
당설련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그런 심리적 허점을 노리고 당당히 독을 넣었을지도요.”
“은침에 오히려 독이 있을 가능성 또한 무시할 수 없지요. 혹시 말인데, 은침으로 모든 독을 검사할 수 있는 겁니까?”
운현의 물음에 당설련은 빙긋이 웃었다.
“좋은 질문이네요. 그래요, 사실 은으로 알아낼 수 있는 독의 종류는 아주 소수예요. 게다가 독과 약의 구분은 대단히 모호하지요.”
손에 든 은침을 살짝 움직여 보이며 당설련은 말했다.
“같은 것이라도 때로는 약이 되기도 하고 독이 되기도 하거든요. 게다가 독이 아니면서도 그 이상으로 치명적인 것들도 있어요. 백 일간 취하게 만든다는 백일취나, 욕정을 불러일으킨다는 음약 같은 것들요.”
사실 당문에는 그 이상의 약과 독들이 아주 많았다.
병을 치료하거나 혹은 중병에 걸리게 하거나 아니면 병증만을 나타내는 것들까지.
독과 약에 관한 한 그 누구도 당문을 따라올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정점에 선 사람이 바로 독선이었다.
그가 움직이지 않는 것만으로도 당문의 전력은 절반 이상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바로 운현 때문에 말이다.
“이 차에는, 과연 무엇이 들어 있을까요?”
사뭇 은근한 목소리로 당설련이 말했다.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몽정황아라고 하지 않으셨나요?”
당설련은 미소를 머금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물론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사락.
운현은 찻잔을 쥐었다.
“차 한 잔에 그토록 많은 경계를 해야 한다면 그건 무언가 잘못된 상황이겠지요.”
스륵.
운현은 찻잔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대로 입술로 가져갔다.
하지만 운현은 차를 맛보지 못했다.
사락.
당설련의 하얀 손이 운현의 찻잔을 덮었다.
그녀의 손 끝이 운현의 입술에 닿을 듯 가깝다.
“무슨…….”
시선을 들던 운현은 흠칫했다.
매혹적인 당설련의 얼굴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겁 많은 남자는 싫지만, 무모한 남자도 좋아하진 않아요.”
당설련의 눈빛은 진지했다.
그녀는 살짝 손을 눌러 운현의 찻잔을 내렸다.
스륵.
“갑자기 왜…….”
당황한 운현이 무어라 말하려는데 당설련은 은침의 끝을 운현의 찻잔에 살짝 담궜다 꺼냈다.
그리고 은침을 거꾸로 세워 찻물이 침을 따라 흐르게 했다.
“흐음.”
당설련은 은침의 반응을 세심하게 살펴보았다.
그러고는 다시 운현에게 얼굴을 가까이 했다.
“어…….”
운현이 무어라 할 새도 없이 당설련은 고개를 숙여 운현이 들고 있는 찻잔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사라락.
고개 숙인 당설련의 머리카락이 운현의 손 위로 쏟아지듯 흘러내렸다.
잠시 후 당설련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붉은 입술에 묻은 차가 등불에 반짝였다.
당설련은 혀로 자신의 입술을 살짝 핧았다.
“괜찮네요.”
잠시 반응을 살피던 당설련이 말했다.
당황스러운 운현의 표정 탓일까?
당설련은 피식 웃었다.
“그래요. 차 한 잔조차 마음 놓고 마시지 못한다면 그건 잘못된 상황이지요. 하지만 그게 일상이 되어 버린 사람도 있어요.”
운현의 표정이 굳었다.
“그럼 설마 소저를…….”
설마 당설련 역시 당문의 독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일가?
“착각하지 마세요.”
당설련은 단호하게 말했다.
“노린다면 그건 내가 아니라 당신이에요. 제가 곤경에 빠지기를 원하는 자들은 생각보다 많으니까요.”
‘아.’
운현은 그제야 알아차렸다.
이곳에서 운현이 중독되면 그 책임은 당설련이 지게 된다.
당설련의 실패를 원하는 자들이라면, 설령 조정의 전권 대리인이라해도 충분히 노릴 만한 일이었다.
아니, 전권 대리인이라 더더욱 말이다.
“걱정 마세요.”
운현의 안색이 변하자 당설련이 가볍게 웃었다.
“이 은침은 단순하지 않아요. 각 부분이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수백 가지의 절독을 구분해 낼 수 있지요. 그리고 제가 직접 시음을 했으니…….”
“그게 아닙니다.”
운현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소저가 위험하지 않았습니까? 어째서 그런 위험을 무릅쓴 것입니까?”
비록 은침으로 검사한 후라 해도 당설련은 직접 운현의 차를 시음했다.
운현은 정말로 화를 내고 있었다.
당황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당설련이 문득 헛웃음을 흘렸다.
“하.”
입술을 깨물던 당설련은 운현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쓸데없는 걱정이에요.”
단호한 눈빛으로 당설련은 말했다.
“나는 당문의 여인이에요. 어렸을 때 이미 수백 가지 약물에 내성을 지녔고, 아주 조금 맛보는 것만으로 그들 전부를 구분해 낼 수 있어요.”
당설련의 눈동자는 화를 내고 있었다.
“내가 아무 준비도 없이 무작정 달려드는 어리석은 여자 같아 보여요?”
운현은 할 말이 없었다.
비록 걱정이 되어 한 말이라도 상대의 자존심을 건드린 셈이 되어 버린 것이다.
“미안합니다. 그런 뜻은…….”
“아니면 됐어요.”
당설련은 길게 끌지 않았다.
“그리고 그리 쉽게 경계를 풀지도 마세요. 당문에는 입술에 발라 사용하는 독도 있으니까요.”
그 말은 시음하는 척하며 하독을 할 경우도 있다는 뜻이었다.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럴 생각이시라면 제게 경고를 해 주실 이유가 없겠지요.”
“과연 그럴까요?”
사락.
당설련은 자리에 앉았다.
“용독의 기본은 어떤 독을 쓰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상대의 경계심을 무너뜨릴까 하는 것이에요. 마지막 한순간, 찰나의 방심만 유도할 수 있다면 독의 종류나 하독 방법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사락.
찻잔을 들어 올리며 당설련은 말했다.
“특히 당신 같은 사람에게는요.”
“저 같은 사람요?”
“네.”
당설련은 찻잔을 든 채 담담하게 답했다.
“절대의 고수, 그리고 당대의 영웅요.”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차를 음미했다.
“크흠.”
운현은 헛기침을 했다.
“아무리 의례적인 수사라 해도 그 정도면 불편할 지경이군요.”
“설마요.”
달칵.
당설련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잊었어요?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알아요. 신승과 검성이 당신을 어떻게 대했는지, 철혈사왕과 할아버지께서 당신을 무어라 평했는지도 나는 똑똑히 기억해요.”
당설련은 두 손을 찻잔을 쥐었다.
떨리는 손끝을 감추려는 듯이.
“심지어 나는 당신이 할아버지의 난홍십이엽과 천향접을 파훼하는 모습을 똑똑히 보기까지 했지요. 그런데도 그저 의례적인 말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나요?”
미소를 머금은 채 당설련은 말을 이었다.
“무림맹이 무너지던 그날, 당신이 무슨 일을 했는지도 나는 아주 잘 알고 있어요. 아니, 나만큼 당신을 아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그녀는 운현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래서, 하는 말이에요.”
운현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리고 곧,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찻잔을 매만졌다.
“……그런가요?”
영웅은 자신이 아니라 독고랑이다.
하지만 그걸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무심코 찻잔을 들던 운현은 입술연지가 묻어 있는 부분을 발견하고 의식적으로 그 부분을 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