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1화. 경고
운현은 느긋하게 찻잔을 들어 올렸다.
그때였다.
“운 공께서는 관인이시오?”
질문한 사람은 공손세가의 공손추현이었다.
그 눈빛은 사뭇 도전적이었다.
운현은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언제부터였소?”
“언제부터라니요?”
“당신이 관을 위해 일한 것이 언제부터냔 말이오. 혹시 예전 무림맹에서도 그랬던 것 아니오?”
말하는 공손추현의 눈동자에는 적의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당설련의 표정이 단숨에 굳어 버렸다.
공손추현의 말은 분명 무례이자 도발이었다.
운현에게 예전부터 관의 끄나풀이 아니었느냐고 묻는 셈이니 말이다.
담담한 목소리로 운현은 말했다.
“아니었다고 하면, 믿으시겠습니까?”
“흥. 관의……. 관을 위해 일하는 자의 말을 어찌 믿을 수 있겠소?”
공손추현이 본래 ‘관의 개’라는 말을 하려던 것을 모든 사람은 알 수 있었다.
관부와 무림은 본래 사이가 좋지 않다.
관부는 무림인들을 잠재적인 범죄자 취급하며 무조건 복종을 요구했고, 무림인들에게 관부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실력도 없으면서 돈만 밝히는 거만한 작자들에 불과했다.
그런 갈등은 무림의 힘이 강하던 무림맹 시절 최고조에 달했다.
그때는 관부조차 무림맹의 눈치를 본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러니 공손추현이 관원을 무시하는 것도, 그리고 운현에게 본래 관의 사람이 아니었냐며 따지는 것도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도 상대를 봐 가면서 할 일이다.
일개 관원도 아니고 박 공공의, 사실상 조정의 전권 대리인인 운현에게 그게 할 행동이란 말인가?
“공손……!”
“저도 한 가지 궁금한 게 있군요.”
당설련이 무어라 하기 전에 운현이 먼저 말했다.
“그 발언은 당신의 생각입니까, 아니면 가주이신 공손월 대협의 뜻입니까?”
공손추현의 눈썹이 와락 일그러졌다.
“어디서 감히 가주님을……!”
“공손세가의 가주께서는.”
운현은 찻잔을 가볍게 매만졌다.
“얼마 전 안찰사를 통해 조정에 서신을 보내셨더군요. 관도 통행의 안전을 위한 조정의 활동에 기꺼이 협력할 의향이 있다고 말입니다. 무림에 관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협조할 뜻도 밝히셨지요.”
그것은 박 공공이 한 자 한 자 정성들여 적었다는, 바로 그 책자에 있던 내용이었다.
듣기에 따라서는 태평맹과 강호 무림에 대한 공손세가의 배신 행위가 아닐 수 없었다.
“그, 그럴 리 없소!”
공손추현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건 말도 안……!”
“그러면.”
운현의 목소리가 그의 말을 끊었다.
빙긋 웃으며 운현은 말했다.
“한번 가주께 서찰을 보내 볼까요? 공손세가의 공손추현이 저를 신뢰할 수 없다 하니 저 또한 그를 믿을 수 없으며, 그의 목을 쳐서 가져오지 않으면 조정에 적대 의사를 보인 것으로 간주하겠다고 말입니다.”
‘헉.’
조정에 적대 의사를 보인 것으로 간주하겠다는 말이 가진 의미는 컸다.
게다가 지금 운현의 눈동자는 서늘하기 그지없었다.
그 눈빛은 목을 쳐서 가져오라는 말이 결코 거짓이 아님을 말해 주고 있었다.
“그, 그건…….”
갑자기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공손추현의 눈빛은 사시나무처럼 흔들렸다.
그는 운현과 시선도 마주치지 못했다.
“훗.”
운현은 웃었다.
“농담입니다.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할 시간은 없으니까요.”
슥.
고개를 돌려 당설련을 바라보며 운현이 말했다.
“하지만 상당히 불쾌하군요. 이것이 태평맹의 대접인가요?”
당설련은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사락.
공손히 몸을 굽히며 당설련은 예를 표했다.
“무례를 사과드립니다.”
고개를 숙인 채 그녀는 말했다.
“공손세가에는 엄중한 항의를 보낼 것이며 이 시간 이후 그의 발언권은 박탈하겠습니다. 그의 무례가 태평맹의 뜻이 아님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공손추현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당설련이 항의한다면 자신은 대표자는 물론 외당 부당주의 자리까지 잃을 것이 뻔했다.
“알겠습니다. 사과를 받아들이지요.”
“감사합니다.”
당설련은 조용히 몸을 세웠다.
공손추현은 다급히 말했다.
“기다리시오! 나는…….”
그러나 순간 날아든 당설련의 살기에 그는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당문설화라는 명호처럼, 얼음처럼 차가운 살기가 공손추현을 뒤덮었던 것이다.
공손추현의 안색은 아예 파랗게 변했다.
주위를 돌아보았지만 도움은커녕 그를 쳐다보는 사람조차 없었다.
나지막한 신음을 흘리며 결국 공손추현은 시선을 떨구었다.
‘쓰레기 같은 놈.’
당설련은 그런 공손추현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운현을 도발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설마 아직도 과거 무림맹 시절 거대 문파의 환상 속에 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저 당설련의 일을 망치려던 것일까?
어느 쪽이건 당설련으로서는 한심하기 그지없는 행동이었다.
“관(官)은.”
운현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불법한 자들에게 두려움이 되는 곳입니다. 여러분이 국법에 어긋난 일을 한 적이 없다면, 설령 조정의 권력자라 해도 거리낄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물론 많다.
그러나 지금 운현의 말은 중대한 의미를 담고 있었다.
‘결국…….’
당설련은 입술을 깨물었다.
‘손을 잡지 않겠다는 뜻이네.’
조정은, 아니 운현은 태평맹에 불법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동시에 태평맹과 손을 잡지 않겠다는 명확한 의사 표명이기도 했다.
태평맹이라고 예외를 두진 않겠다는 뜻이니까.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소.”
문득 관일검 모용단천이 말했다.
“근래 창룡지회라는 자들이 있다 하오. 혹 그들과 연관이 있소?”
그건 분명 모용단천의 호의였다.
운현에게 해명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
순간 운현은 뒤에 서 있는 진예림의 득의양양한 표정이 보이는 듯 했다.
“아무 연관도 없습니다.”
몇 사람의 눈빛이 변했다.
“허나 그들은 창룡검주의 뜻을 따른다 하고 있습니다.”
제갈기호가 물었다.
그 물음 역시 그의 호의다.
운현은 미소를 머금었다.
“저야말로 궁금합니다. 그들이 대체 무슨 의도로, 제 허락조차 구하지 않은 채 제 명호를 함부로 더럽히는지 말입니다.”
고개를 저은 후, 운현은 말을 이었다.
“저는 창룡지회라 하는 이들과 아무런 관계도 없으며 그들의 행동은 저의 뜻과는 전혀 무관합니다. 그러니 혹시라도 그들을 아시거나 만나게 되신다면. ”
단호한 눈빛으로 운현은 말했다.
“제 이름을 파는 비겁한 짓을 즉시 중단하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대단히 분노하고 있으며,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는 것도 더불어서요.”
운현의 의도는 명확하게 전달되었다.
이 말은 곧 태평맹 내에 퍼져 나가게 될 것이고, 창룡지회라는 이름에 현혹당하는 일은 현저히 줄어들 것이다.
당설련의 눈빛조차 감탄하듯 변하고, 운현은 진예림이 잘했다고 칭찬하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운 공의 뜻은 잘 알겠소.”
제갈세가의 가주 군자검 제갈명이 말했다.
“그러면 조정에서 우리 태평맹에 따로 전할 것은 없다고 보아도 좋소?”
“그렇습니다.”
운현의 대답은 그들을 실망케 했다.
하지만 운현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전권 대리인으로서는요.”
가주 제갈명의 눈동자가 빛났다.
“그 말은…….”
“조정은 태평맹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현재 무림 문파들 중에 신뢰할 만한 곳은 태평맹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제갈명은 물론 다른 사람들의 표정도 밝아졌다.
“그러나 태평맹이 국법을 준수하고 나라를 위하는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구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웅맹이 그러하듯, 힘을 가진 자들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기 마련이니까요.”
진지한 표정으로 운현은 말을 이었다.
“제가 이곳에 온 것은 조정이 태평맹에 최소한의 신뢰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라고 봐도 좋습니다. 그러니 이후의 일은, 여러분의 행동에따라 결정되겠지요.”
“행동이라는 건.”
황보선혜가 낭랑한 목소리로 물었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지요?”
운현은 빙긋 웃었다.
“혈공자 문왕, 그리고 그의 배후 세력.”
사람들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운현은 한마디 한마디 힘을 주어 말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들과 연관되지 마십시오. 그들과 손을 잡는 순간, 그 누구라도 조정의 적으로 간주될 것입니다.”
그것은 서슬 퍼런 경고였다.
조정의 적이 된다는 건 곧 천하의 적이 된다는 뜻이다.
“지극히 옳은 말씀이군요.”
당설련의 조용한 목소리가 대전에 울렸다.
“영웅맹과는 관련되지 않는 것이 가장 현명한 선택이지요.”
영웅맹의 맹주는 염중부이나 주인은 혈공자 문왕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그렇기에 당설련의 말은 언뜻 합당한 것으로 들렸다.
“글쎄요?”
운현은 빙긋 웃었다.
“반론의 여지는 있지만, 대체로 옳은 말씀이군요.”
그 말이 가진 의미를 어떤 사람들은 단숨에 알아차렸다.
운현은 혈공자 문왕과 영웅맹을 분명히 구분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그 말의 의미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당설련은 정확히 알아들은 사람에 속했다.
그녀의 안색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
호암상단의 영애이자 사무총관인 이서연은 사천성 성도에 없었다.
태평맹과 상단의 회합은 어차피 겉치레일 뿐, 중요한 내용은 이미 첫날 저녁 당설련과 밀약을 맺어 마무리한 후였다.
그래서 이서연은 호암상단의 다른 책임자를 남겨두고 미련없이 성도를 떠났다.
그보다 더욱 중요한 회합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후우.”
이서연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녀는 날카로운 눈매로 시녀에게 물었다.
“어때?”
“대단히 아름답습니다.”
젊은 시녀는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거울 속에는 화려하고 매혹적인 여인의 모습이 비취고 있었다.
그러나 이서연은 만족하지 못했다.
“안 되겠어.”
사락.
이서연은 화려한 머리 장식을 풀어 버렸다.
“전부 지워. 좀 더 가볍게 다시 해.”
“네. 알겠습니다.”
오랫동안 공들인 화장이었지만 시녀는 즉시 명을 받들었다.
“그리고 옷하고 신발도 다시 가져와. 전부 다.”
그건 수십 벌에 달하는 옷과 신발을 다시 가져와야 한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옆에 섰던 시녀들은 즉시 고개를 숙였다.
“네. 사무총관님.”
시녀들이 사라지자 이서연은 자리에 앉아 고개를 들고 화장을 위해 눈을 감았다.
시녀의 능숙한 손길이 얼굴로 느껴졌다.
이미 반나절 이상을 소비하고 있었지만 이서연은 과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가 만날 사람은 대단히 까다롭고 변덕스럽다.
지난 몇 번의 만남이, 그리고 그가 했던 일들이 그것을 분명히 보여 주고 있었다.
결코 허점을 보여서는 안 된다.
그로 인해 문중상단은 후계자를 잃고 무너졌으며, 그의 덕분으로 호암상단은 천하 삼대상단으로 우뚝 섰다.
사실상 천하에 손꼽히는 다섯 상단의 명운이 그 한 사람으로 인해 나뉜 것이다.
그는 바로 혈공자 문왕이었다.
이서연은 바로 그를 만나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이제는 그로 인해 이서연의 운명이 결정 될 때가 되었으니까.
그리고 오래 투자해 온 상품의 결실을 수확할 때도.
‘반드시.’
이서연은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성공시키고야 말겠어.’
그녀의 눈빛은 결의로 가득 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