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0화. 태평맹 가주 회합
당설련은 눈살을 찌푸리며 생각했다.
창룡검주의 이름이 성도에 가득하다.
이럴 때 창룡지회가 무언가 수작을 부리지는 않을까?
어쩌면 창룡검주와 접촉하려고 시도할지도 모른다.
당설련은 급히 수하를 호출했다.
대기하던 수하가 즉시 당설련의 집무실로 들어왔다.
“성도에 이상한 소문이 돌지 않는지 확인해 봐.”
“네?”
반문은 당연했다.
이상한 소문이라면 이미 차고 넘치도록 있다.
바로 창룡검주에 대한 것 말이다.
그러나 당설련은 눈살을 찌푸렸다.
“태평맹의 내부 분열을 부추기는 소문이 있는지 확인하라고! 특히 영웅맹과 관련해서!”
“네! 알겠습니다.”
“전권 대리인 측에 감시는 붙여 놨지?”
“첫날부터 숙소를 주시하고 있습니다만 따로 접근하는 자들은 없었습니다.”
당설련은 눈살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아직 다른 세가나 창룡지회가 움직이진 않은 것 같았다.
“상단들과의 회동은?”
“이미 예정된 대로입니다. 천하삼대상단은 물론, 주요 대상단들과도 빠짐없이 일정을 조율해 놓았습니다.”
“잘했어.”
잠시 생각하던 당설련이 물었다.
“혁이는?”
당혁은 그녀의 동생이자 용봉지회의 우승자이다.
그의 돌발적인 행동 때문에 모든 것은 엉망이 되어 버렸지만 그녀에게 동생은 여전히 소중했다.
“문주님의 명에 따라 자택에서 자숙하고 있습니다. 의원에 의하면 건강은 양호하다고 합니다.”
당설련은 나지막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알았어. 나가 봐.”
“네.”
수하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고 집무실을 나갔다.
당설련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달칵.
창가로 천천히 다가가며 당설련은 이를 악물었다.
“그래, 어차피 결론은 정해져 있어.”
사락.
휘장 너머로 잘 꾸며진 정원이 보였다.
당설련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그저 쉽게 가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일 뿐이야.”
뜻은 변하지 않는다.
바뀌는 것도 없다.
그저 환경이 조금 변할 정도의, 그런 문제일 뿐이다.
당설련은 이를 악물었다.
화사한 정원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엔 서늘한 한기가 맴돌고 있었다.
***
성도 전체가 창룡검주의 명호로 들썩이던 그때, 정작 운현은 객잔 숙소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조관 일행과 함께 그간 수집한 정보들을 분류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수집 자체는 조관과 항장익, 담소하가 맡았지만 운현이 아니면 판단하기 어려운 것도 많았다.
그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바로 창룡지회였다.
“으음, 창룡지회라…….”
바스락.
수북한 서류들 속에서 담소하가 창룡지회에 대한 서류 한 장을 팔락이며 물었다.
“이거 혹시 대인께서 만드신 비밀 조직이라거나, 뭐 그런 건가요?”
운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런 적 없네.”
“그래요?”
담소하는 서류의 내용을 살피며 머리를 긁적였다.
“하지만 이들은 창룡검주의 뜻을 따르는 모임이라는데요? 귀주성 준위의 사건을 계기로 알려졌고, 이후에도 영웅맹에 산발적인 저항을 시도하고 있다고…….”
말하던 담소하가 눈살을 찌푸렸다.
“정체가 확실하지 않아서 배후가 정말 창룡지회인지 확인할 수 없는 사건도 많군요. 그래도 대강 추린 것만 해도 열 건이 넘어요.”
그 정도면 꽤나 성실한 활동이라 할 수 있었다.
“으음.”
운현은 생각해 보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글쎄? 짚이는 곳도 없고…….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군.”
말하던 운현은 진예림을 쳐다보았다.
“혹시 소저는 아는 바가 있습니까?”
“없어요.”
진예림은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우리 쪽은 아니에요. 우린 이런 비겁한 짓은 안 해요.”
그녀가 말하는 ‘우리’는 독고랑과 함께했던, 항주 인근 무관들의 정예들을 말하는 것이다.
“비겁한 짓요?”
“그래.”
담소하가 묻자 진예림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 봐. 이들은 창룡검주가 아니라 창룡의 뜻을 따른다고 했어. 별거 아닌 것 같지만 그 차이는 크거든? 창룡검주는 운 대인이지만, 창룡은 애매한 호칭이잖아. 나중에 발뺌할 여지를 마련해 둔 거지.”
그녀의 말대로였다.
창룡검주의 뜻을 따른다고 외친 경우도 있었지만 검기발현의 고수가 개입한 경우는 하나같이 창룡의 뜻이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이들은 그냥 창룡검주의 소문에 편승하고 싶었던 거야. 정말로 대의명분을 위한 거였다면 당당하게 드러냈겠지. 검기발현의 고수가 뭐가 두려워서 복면을 써?”
“음,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경우도 있잖아요. 정체를 감췄다고 무조건 의심하는 건……. 의도는 좋을 수도 있고요.”
“다른 사람의 명호를 내걸고 사람을 죽인 자들이?”
진예림은 코웃음을 쳤다.
“차라리 만백성의 뜻이니, 대의을 위해서니 했으면 그러려니 하겠어. 그것도 사실은 웃기지만.”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진예림은 말을 이었다.
“아무리 악인이라지만 이들은 운 대인의 이름을 대고 사람을 죽인 거야. 그 책임을 남에게 뒤집어씌우는 작자들이, 의도가 좋다고?”
노골적인 빈정거림이었지만 담소하는 반박하지 못했다.
진예림의 말이 옳았기 때문이다.
“분명히 단언하는데.”
가늘게 웃으며 진예림이 말했다.
“이 사람들, 절대 운 대인께 접촉하려 하지 않을걸? 자신들이 확실한 세력을 얻기 전엔 말이야. 못 믿겠으면 내기해도 좋아.”
담소하는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질 게 뻔한 내기를 왜 해요?”
그 역시 진예림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했다.
그러니 내기가 성립될 리가 없다.
“운 대인.”
진예림은 운현에게 말했다.
“정말 아닌 거죠?”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아닙니다.”
“그럼 이들하곤 거리를 두시는 게 좋아요. 하지도 않은 일의 책임을 뒤집어쓰고 싶지 않다면요. 아예 확실하게 나와는 상관없다고 공언을 해 두시는 것도 좋고요.”
“알겠습니다.”
“만일 이들이 접촉해 온다면 먼저 단호하게 해산을 요구하세요. 아니면 이름을 바꾸라고 하시든가요. 절대 애매한 태도를 보이시면 안 돼요. 그러면 그 순간 이자들과 같은 편으로 매도당하게 되니까요.”
운현은 그녀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했다.
비슷하지만 다른, 소위 사이비(似而非)는 적보다 더 위험하다.
“반드시 그렇게 하지요.”
운현은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진예림은 희미하게 미소를 머금었다.
“어, 접촉 안 할 거라면서요?”
뒤에서 들려온 담소하의 말에 진예림은 인상을 썼다.
“만일이잖아. 만의 하나, 몰라?”
“그러면 한 냥만 걸어도 이기면 만 배겠네요? 나 내기할래요.”
“뭐? 이게…….”
두 사람의 옥신각신 모습을 보며 운현은 빙긋 웃었다.
항장익은 물론 감찰어사 조관도 산더미같이 쌓인 서류들 사이에서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그거, 어떻게 하신 거예요?”
문득 진예림이 운현에게 물었다.
“뭐를요?”
“은젓가락으로 검을 부숴 버린 것 말예요.”
“검을 부숴요?”
“은젓가락으로?”
담소하와 항장익이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아, 그건…….”
운현이 웃으며 말했다.
“젓가락이 내 검 끝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러면 그냥 검과 검의 비무가 되니까, 그 뒤는 간단하지요.”
진예림은 물론 항장익과 담소하, 조관의 얼굴까지 이상하게 변했다.
“……그게 간단한 건가?”
“운 대인께는 그렇겠지.”
담소하와 진예림이 질렸다는 듯 말했다.
운현은 어깨를 으쓱했다.
조관이 나지막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저녁때도 되었으니 잠시 식사라도 할까요?”
“좋습니다.”
운현이 동의를 표하고 다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할 기분은 이미 멀찌감치 사라진 후였다.
그리고 그날 오후, 태평맹에서 운현에게 연락이 도착했다.
가주 회합에 운현을 초청한다는, 그리고 대외 총괄군사 당설련이 독대를 바란다는 내용의 정중한 서찰이었다.
운현은 기꺼이 그 초청에 응했다.
***
태평맹 총단.
운현은 당문의 아가씨, 당이령의 안내에 따라 진예림과 함께 대전으로 들어섰다.
당이령은 문 앞에서 운현에게 공손하게 예를 표했다.
자신은 함께 들어갈 수 없다는 의미다.
운현은 그녀에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당이령은 빙긋 웃으며 대답을 대신했다.
달칵.
문이 닫히고 운현은 대전을 돌아보았다.
대전 안은 사뭇 화려하고 고풍스러웠다.
당문과 제갈세가, 모용세가의 가주가 중앙 전면에, 그리고 다른 네 세가의 중진들이 좌편 벽쪽에 자리해 있었다.
우편 벽쪽으로는 대외 총괄군사 당설련과 대내 총괄군사 제갈기호의 모습도 보였다.
기록을 담당할 서기가 없는 것은 이 회합이 비공식적이라는 것을 보여 주고 있었다.
각 사람 앞에 놓인 간단한 과일과 향기로운 차 역시 마찬가지리라.
저벅, 저벅.
운현과 진예림은 그들을 향해 걸어갔다.
사락.
대외 총괄군사 당설련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서 오세요, 대인.”
부드러운 표정으로 그녀가 말했다.
“제가 새삼 소개할 필요도 없겠지만 당문의 문주이신 청염군 당천벽 대협, 그리고 제갈세가의 가주이신 군자검 제갈명 대협, 그리고 모용세가의 가주이신 관일검 모용단천 대협이세요.”
“어서 오시오.”
“감사합니다.”
소개될 때마다 가주들은 고개를 숙이거나 친근한 미소로 예를 표했다.
운현 역시 정중하게 답례했다.
“그리고 이분들은 공손세가의 가주님을 대신하여 참석하신 공손추현 대협, 혁련세가의 혁련필 대협, 단목세가의 단목기 대협과 남해검문의 황보선혜 소저예요.”
황보선혜는 미소를 지었고 혁련필은 담담한 눈빛이었다.
단목기는 흥미를 감추지 못했고 공손추현의 눈빛에선 특이하게도 적의가 엿보였다.
“태평맹 대내 총괄군사이신 제갈기호 대협과 그리고 저는 대외 총괄군사를 맡고 있는 당설련이지요.”
활짝 웃는 제갈기호와 가볍게 눈웃음을 짓는 당설련에게도 운현은 예를 표했다.
“그리고 다들 이미 아시겠지만.”
사락.
당설련은 가주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박 공공의 전권 대리인이신 운현 공이세요. 한때 무림맹에서 서기직을 맡으셨고…….”
희미한 미소를 머금으며 당설련은 말했다.
“신승의 사제이자 창룡검주라는 명호로 더 잘 알려진 분이시지요.”
운현은 다시금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반갑습니다. 운현입니다.”
우연의 일치일까?
이곳에 있는 대부분이 과거 무림맹 혹은 개인적으로 인연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앉으시지요.”
대외 총괄군사 당설련이 부드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운현의 자리는 세 가주들의 옆이었다.
박 공공의 전권 대리인에 대한 예인지, 혹은 신승의 사제라는 배분을 의식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운현이 자리에 앉고 진예림이 굳은 표정으로 그 뒤에 지켜섰다.
당설련이 직접 걸어와 운현에게 향기로운 차를 따라 주었다.
“감사합니다.”
“천만에요.”
당설련은 웃었다.
쏟아지는 시선 속에서도 운현은 느긋하게 잔을 들어 차를 음미했다.
달칵.
“좋은 차로군요.”
운현이 찻잔을 내려놓자 당문의 문주, 청염군 당천벽이 입을 열었다.
“사천의 특산이라오.”
“과연, 차의 본고장이라 할 만한 명품이로군요.”
“허허, 귀한 손님께 드릴 것이니 당연하지 않겠소? 초청에 응해 주셔서 감사하오. 운 공.”
당천벽이 운현을 부르는 호칭은 그를 조정 전권 대리인으로 대하겠다는 의도가 뚜렷했다.
“천만에요. 귀한 자리에 불러 주시니 저야말로 감사드립니다.”
물론 본래 초청한 대상은 운현이 아니라 박 공공이었지만 말이다.
“예전 무림맹 생각이 나는군요. 그때는 이렇게 좋은 분위기는 아니었지만요.”
무림맹이라는 말에 몇 사람의 표정이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