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9화. 아직 하나 더 있습니다
당혁에게 그건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다.
사랑하는 여인의 손길이 다른 남자의 얼굴을 쓰다듬고, 그녀의 붉은 입술이 타인의 귓가에 달콤한 말을 속삭이며 웃었다.
당혁이 비장한 각오로 치르는 비무에 황보선혜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러니 어찌 참을 수 있을까?
운현을 노려보는 당혁의 눈동자는 이미 분노로 일렁이고 있었다.
‘안 돼!’
제일 먼저 반응한 사람은 사람은 당설련이었다.
그는 급히 동생 당혁에게 전음을 보내려 했다.
그러나 이미 당혁의 목소리는 대회장에 울려 퍼진 후였다.
“비무?”
“창룡검주라니?”
“지금 대체 무슨…….”
대회장은 순식간에 술렁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강호에 이미 파다한 소문을 떠올리는 것은 금방이었다.
“창룡검주라면 영웅맹에 맞설 유일한 자라는 그 사람?”
“설마?”
“여기 있다고? 그 창룡검주가?”
소란은 점점 더 커져 갔다.
―영웅맹에 맞설 자는 창룡검주뿐이다.
그 소문을 들어 보지 못한 사람이 누가 있을까?
영웅맹의 횡포가 심해질수록 창룡검주에 관한 관심은 더욱 커져 갔다.
그러나 정작 창룡검주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런데 그 창룡검주가 바로 이곳에 있다니?
대회장에 가득한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은 일제히 귀빈석을 향했다.
귀빈석에 있던 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칠대세가의 주요 인사들을 제외하고 운현에 대해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특히나 중앙 비무대와 가까웠던 귀빈석에서는, 당혁의 칼끝이 누구를 향하는지 똑똑히 알 수 있었다.
놀란 표정으로 쳐다보는 당이령에게 운현이 말했다.
“잠시만 빌릴까요?”
“네, 네?”
무슨 말인지 당이령이 이해하기도 전에 운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륵.
“저 사람이 창룡검주라고?”
“전혀 모르는 사람인데?”
“어느 문파지?”
대회장의 모든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운현은 빙긋 웃었다.
“조심하십시오. 소협.”
그 목소리는 별로 크지 않았지만 당혁은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무슨…….”
당혁이 무어라 하려던 바로 그때였다.
휙.
운현이 가볍게 손을 저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쌔액.
날카로운 파공성과 함께 무엇인가 당혁을 향해 짓쳐 들었다.
“헉!”
우웅.
당혁은 즉시 내력을 끌어 올리며 오룡검을 휘둘렀다.
그리고 날카로운 쇳소리가 당혁의 눈앞에서 터져 나왔다.
카앙.
“크윽!”
주르륵.
당혁은 충격에 밀려 속절없이 뒤로 밀려났다.
만일 당천벽이 잡아 주지 않았더라면 비무대 바깥으로 나뒹구는 것을 피하지 못했으리라.
턱.
당천벽의 굵은 팔이 재빨리 당혁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한 손으로 당혁을 잡은 당천벽은 즉시 자신의 몸을 회전시켰다.
파라라락.
당천벽의 옷자락이 펄럭이며 당혁이 크게 한 바퀴를 돌았다.
그러고 나서야 당혁은 멈춰 설 수 있었다.
“아, 아버지…….”
당혁은 당천벽의 팔에 반쯤 안긴 채 놀란 눈으로 부친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부친은 당혁을 보고 있지 않았다.
“쯧.”
당천벽은 나지막이 혀를 찼다.
부친의 시선을 따라 눈을 돌린 당혁은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보았다.
‘헉!’
자신의 손에 들린 오룡검이 반으로 부러져 있었다.
챙, 탱그랑.
비무대 저편에 무엇인가가 떨어지며 반짝였다.
그것은 바로 부러진 오룡검의 조각과 한쪽이 뭉개져 버린 은젓가락이었다.
절반은 구겨져 본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지만, 햇빛에 반짝이는 그것이 은젓가락이었음은 분명했다.
‘이, 이게 대체…….”
당혁은 믿을 수가 없었다.
조금 전 그 충격은 창이 날아왔다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것이 고작 은젓가락 하나였다니?
게다가 그 은젓가락에 오룡검이 부러지다니?
도대체 어떻게 해야 이런 결과가 나올 수 있는지, 눈으로 보고서도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슥.
당천벽은 운현을 돌아보았다.
운현은 한 손을 뒤로 한 채 담담하게 말했다.
“아직 하나 더 있습니다만.”
반짝.
들어올린 그의 손에서 은젓가락 하나가 빛났다.
“그 정도면 되겠습니까, 아니면 더 해 드릴까요?”
“……충분하오.”
당천벽이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혁을 안았던 팔을 풀고, 당천벽은 운현을 향해 가볍게 예를 표했다.
“부족한 아들을 일깨워 주신 대인의 친절에 감사드리오.”
그가 운현을 ‘대인’이라 칭하는 것은 당연했다.
운현의 신승의 사제이며, 그 배분은 당문의 문주조차 경시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천만에요.”
웃으며 가볍게 고개를 숙여보인 운현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당이령을 보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빌린 것은 당문에 돌려 드렸으니 괜찮겠지요?”
“아, 네……, 네.”
당이령은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눈앞에서 터져 나가던 그 엄청난 기세를 본 당이령의 표정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게다가 조금 전 당혁은 운현을 분명 창룡검주라고 부르지 않았던가?
달칵.
운현이 가만히 내려놓은 은쟁반의 은젓가락 하나만이, 조금 전 그 광경이 착각이 아님을 말해 주고 있었다.
당혁은 멍하니 운현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은 너무나도 당연하게, 같은 귀빈석에 있는 황보선혜를 향했다.
‘아!’
황보선혜는 소매로 입을 가린 채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당혁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에 가득한 것은 바로 애처로운 연민이었다.
마치 불쌍한 사람을 바라보는 듯한 그녀의 눈빛이 당혁의 가슴을 후벼 팠다.
“……못난 놈.”
부친 당천벽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울렸지만 당혁에겐 들리지 않았다.
그저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그 안타까운 눈빛만 시야에 가득할 뿐이었다.
휘청.
당혁은 그대로 무너져 내리듯 주저앉았다.
당천벽은 눈살을 찌푸리며 비무대를 내려갔다.
저벅, 저벅.
당설련이 즉시 나섰다.
“움직여!”
그녀는 수하들을 시켜 오룡삼봉을 내려가게 하고 자신이 비무대에 직접 올랐다.
하지만 이후 대회가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 당혁은 하나도 기억할 수 없었다.
창룡검주를 향해 검을 겨누던 기세는 온데간데없었고, 지독한 패배감과 자괴감이 당혁을 짓누르고 있었다.
***
창룡검주에 관한 소문은 성도를 단번에 삼켜 버렸다.
영웅맹에 맞설 자는 창룡검주뿐이라는 그 소문을 듣지 못한 자가 누가 있으랴?
바로 그 창룡검주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당문의 문주조차 그를 대인으로 칭한 것과, 창룡검주가 태평맹의 귀빈석에 있었던 이유에 대해서도 온갖 추측이 나돌았다.
어느새 용봉지회와 태평맹에 대한 이야기는 거짓말처럼 자취를 감추고, 창룡검주의 명호가 성도에 가득했다.
태평맹 총단, 대외 총괄군사 당설련의 집무실.
당설련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반문했다.
“대내 총괄군사의 공식 요청이라고?”
“네, 그렇습니다.”
수하는 얄팍한 서찰을 정중하게 당설련에게 건넸다.
“창룡검주가 어떠한 연유로 초청되었는지에 대한 해명을 요구했으며, 영웅맹에 대한 맹의 대외 정책에 변화가 있는지에 대해 질의했습니다.”
“흥.”
당설련은 서찰을 펼치며 조소를 흘렸다.
“다 알면서 모른 척하기는.”
운현이 박 공공의 전권 대리인이라는 걸 제갈세가가 모를 리 없다.
아니, 애초에 칠대세가의 주요 인물들은 모두 알고 있었으리라.
다만 태평맹과 운현의 회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그것을 숨죽이며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갑자기 창룡검주의 존재가 만천하에 공개되어 버렸다.
그러니 태평맹의, 아니 당설련의 공식적인 해명을 요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박 공공의 전권 대리인을 주요 당직자 회합에 정식으로 초청하기 원한답니다.”
당설련의 인상이 와락 구겨졌다.
“그건 안 돼!”
생각할 여지도 없다는 듯 당설련이 말했다.
수하는 굳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허나 그러지 않으면 다른 세가의 의혹을 풀 수가 없습니다.”
의혹 따윈 없다.
그러나 문제가 터진 이상 공식적인 해명 절차는 필요하다.
그 방법으로 제갈기호는 운현의 공개를 요구한 것이다.
즉,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당설련의 숨은 패를 내놓으라고 말이다.
으득.
당설련은 이를 악물었다.
박 공공의 전권 대리인은 전적으로 당설련의 공이다.
그녀가 기획했고 이루었으며 당설련 자신이 밀약의 당사자가 될 예정이었다.
본래라면 대회 기간 내내,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녀가 그의 곁에 있어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게 무슨 꼴인가?
용봉지회는 결과적으로 창룡검주의 이름을 알린 셈이 되었고, 운현과 당설련은 첫 만남 외에는 눈길조차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다.
오히려 제갈세가나 모용세가, 남해검문이 운현과 더 친교를 다졌다.
이 상황에서 그가 주요 당직자 회의에 노출된다면 말 그대로 죽 쒀서 개 주는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칠대세가 전부가 그에게 공공연히 접촉을 시도할 테니 말이다.
이를 악물고 있던 당설련이 나지막이 신음을 흘렸다.
“……가주 회합에.”
“네?”
당설련은 눈을 들고 수하를 노려보았다.
“박 공공의 전권 대리인은 가주 회합에 초청할 것이라고 전해. 자세한 설명 역시 그곳에서 하게 될 거라고.”
현재 이곳에 있는 가주들은 당문과 제갈세가, 모용세가뿐이다.
그 외 세가들은 대표자나 중진 들이 대신 나오겠지만 그 영향력은 가주에 비길 바가 못 된다.
게다가 가주 회합은 당직자 회의보다 상급 기관이라 명분도 충분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하나 더.”
당설련은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
“가주 회합 후에 나와 비공개로 만날 수 있도록 준비해 둬. 그와 나, 단둘만. 알았어?”
수하는 고개를 숙였다.
“전권 대리인 쪽에 연락하여 의향을 타진하겠습니다.”
거절은 하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운현도 그럴 의도였을 테니까.
수하가 즉시 자리를 뜨고, 혼자 남은 당설련은 생각에 잠겼다.
‘문제는.’
당설련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무엇을 원하느냐인데…….’
운현은 대체 무엇을 원하는 것일까?
전권 대리인이라는 엄청난 권한을 손에 넣은 그가, 영웅맹과 맞설 오직 한 사람뿐이라는 명성까지 얻은 그가 원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본래 그가 가져야 했던 무림맹 맹주의 권력일까?
혹은 황제들조차 벗어날 수 없었던 재물과 색욕일까?
아니면 수많은 고수들이 꿈꿨던 천하제일인이라는 칭호일까?
으득.
“단전을 박살 냈다더니…….”
갑작스레 솟아오르는 분노를 당설련은 참을 수 없었다.
“대체 뭘 한 거야!”
쾅.
그녀의 손 아래서 서탁이 으직 소리를 냈다.
분명 단전이 박살 났다고 했다.
그런데 그가 한 손으로 가볍게 날린 은젓가락 하나가 오룡검을 단번에 박살 내 버렸다.
어떻게 그것이 무공을 잃은 사람의 모습일 수 있단 말인가?
‘웃.’
문득 당설련은 한기에 몸을 떨었다.
그날, 독선의 천향접을 파훼하던 운현의 모습이 눈앞에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저 그것만으로도 온몸에 소름이 돋는 듯했다.
‘가만.’
문득 든 생각에 당설련은 눈을 번뜩였다.
‘혹시 창룡지회라는 것들이 이 기회를 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