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8화. 용봉지회의 우승자
태평맹 무림용봉지회는 뜨거운 환호 가운데 진행되었다.
대회장에 있는 세 곳의 비무대에서는 칠대세가의 젊은 후기지수들이 치열하게 서로의 기량을 겨뤘다.
운현은 귀빈석에서 느긋하게 비무를 관람했다.
그에 대해 알고 있는 칠대세가 주요 당직자들의 경계심도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제갈세가의 가주와 친근한 인사를 나눈 영향이 컸다.
생각해 보면 그가 이 자리에 있다는 건 적대감이 없다는 뜻 아닌가?
둘째 날에도 운현은 귀빈석에 모습을 나타냈다.
당문의 아가씨 당이령의 설명을 들으며 운현은 호위인 진예림과 함께 비무를 참관했다.
가끔은 모용세가의 모용진이나 남해검문의 파진한과 함께 나란히 앉아 비무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모용미나 황보선혜 역시 스스럼없이 운현에게 말을 걸었다.
칠대세가 사람들은 운현에 대한 경계를 느슨하게 내려놓았다.
그리고 태평맹 무림용봉지회의 셋째 날.
여느 때처럼 당이령의 설명을 들으며 비무를 보던 운현은 문득 누군가 다가서는 것을 느꼈다.
저벅.
운현은 고개를 들었다.
앞에 서 있는 사람은 과거 무림맹 당시 혁련세가의 대표자였던 혁련필이었다.
“아, 반갑습니다. 혁련 대협.”
운현이 일어나며 말했다.
얼굴은 이미 첫날 보았지만 서로 고개만 숙였을 뿐, 실제로 인사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러나 혁련필은 고개를 숙이지도, 인사를 하지도 않았다.
“당신에게는…….”
무뚝뚝한 어조로 혁련필은 말했다.
“감사하고 있소.”
어찌 보면 무례한 말이었지만 운현은 오히려 놀랐다.
신승으로부터 운현까지 혁련세가는 악연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혁련세가의 혁련필이 운현에게 먼저 감사를 표한 것이다.
운현은 나지막한 한숨을 쉬며 물었다.
“가주께서는 무사하십니까?”
마지막으로 운현이 보았을 때는 큰 부상을 입고 있었다.
혁련필은 어두운 표정으로 답했다.
“……아직 의식을 찾지 못하셨소.”
그것은 외인에게 밝힐 만한 말이 아니었다.
공식적으로 혁련세가의 가주는 폐관수련 중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혁련필은 운현에게 굳이 숨기려 하지 않았다.
“그렇군요.”
고개를 끄덕인 운현은 혁련필에게 말했다.
“제가 도울 일이 있겠습니까?”
혁련필이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그러나 곧 그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맙지만 사양하겠소. 우리는 반드시 이 어려움을 이겨 낼 것이오.”
그의 눈동자는 강렬하게 빛나고 있었다.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혁련필은 운현을 향해 가볍게 예를 표했다.
“그럼.”
운현 역시 혁련필에게 답례했다.
혁련필은 몸을 돌려 자신의 자리로 걸어갔다.
그 뒷모습을 씁쓸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운현에게,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라버니.”
운현은 고개를 돌렸다.
황보선혜가 방긋 웃으며 옆자리에 앉았다.
“아, 소저…….”
그녀가 운현 옆에 앉는 건 벌써 익숙한 일이었다.
운현이 자리에 앉는데 황보선혜가 문득 말했다.
“괜찮아요? 안색이 좋지 않아 보여요.”
“내가요?”
의아해하는 운현에게 황보선혜는 심각한 표정으로 얼굴을 가까이 했다.
“네. 확실히 여기가…….”
그녀는 운현을 향해 손을 뻗었다.
흠칫 고개를 뒤로 했지만 그녀의 부드러운 손 끝은 이미 운현의 뺨에 닿고 있었다.
“피곤하신 거 아닌가요?”
근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황보선혜가 말했다.
본래 귀엽고 호감가는 미인인 그녀다.
가까운 황보선혜의 얼굴에 운현의 가슴이 살짝 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 나는 괜찮…….”
사락.
황보선혜는 손을 거뒀다.
그리고 옆에 놓인 은쟁반에서 은젓가락으로 작은 과실을 들어 올렸다.
“이거라도 드셔 보세요. 사천에서만 나는 과일인데 피로 회복에 좋아요.”
“고, 고맙습니다.”
아예 입에다 넣어 줄 듯한 기세였지만 운현은 손으로 과일을 받아 들었다.
황보선혜는 빙긋 웃었다.
평소보다 유독 적극적인 그녀의 모습에 운현은 살짝 당황했다.
하지만 그건 길지 않았다.
달칵.
은젓가락을 내려놓은 황보선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시나 해서 와 봤어요. 괜찮으시다니 다행이네요.”
운현은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
“고맙습니다. 소저.”
“아, 그리고.”
황보선혜는 몸을 숙여 앉아 있는 운현의 귓가에 속삭이듯 말했다.
“떠나시기전엔 꼭 제게 말씀해 주세요. 갑자기 오라버니의 모습이 안 보이기라도 하면 저는 무척 걱정할 거예요.”
그녀의 눈빛은 슬퍼 보이기까지 했다.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간다고 말하는 정도야 무엇이 어려우랴?
“그, 그러지요.”
“고마워요.”
황보선혜는 몸을 세우고 운현을 내려다보며 방긋 웃었다.
그리고 가벼운 걸음으로 자리로 돌아갔다.
운현이 고개를 갸웃하는데 문득 진예림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인.”
나지막한 그 음성에 담긴 불편한 감정을 운현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한껏 목소리를 낮춘 진예림이 말했다.
“제가 드릴 말씀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곳에서 노골적인 애정 행각은 좋지 않아요.”
운현은 화들짝 놀랐다.
애정 행각이라니, 그런 건 절대 아니었던 데다가 심지어 운현 탓도 아니지 않는가?
“아니, 그건 애정 행…….”
“아니면 이곳의 모든 사람들에게, 방금 그건 애정 행각이 아니었다고 해명이라도 하실 건가요?”
운현은 말문이 막혔다.
본래 의도가 어떻건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보였다는 것을 지금 진예림은 지적한 것이다.
“물론 대인께도 사정이 있으시겠지만…….”
“고맙습니다.”
운현의 목소리에 진예림의 말이 끊어졌다.
진지한 눈빛으로 운현은 말했다.
“각별히 유념하지요. 소저의 충고에 감사드립니다.”
따로 예는 표하지 않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진예림은 짐짓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녀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황보선혜를 향했다.
황보선혜는 어느새 다른 귀빈들과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뭘 노린 거지?’
진예림은 황보선혜를 경계하고 있었다.
황보선혜는 스스로의 매력을 잘 알고 있는 것은 물론, 자신이 다른사람에게 어떻게 보이는지도 항상 신경 쓰고 있는 사람이다.
그런 여자가 절대 이유 없이 행동할 리가 없다.
그사이, 안내를 맡은 당이령이 운현에게 대회 상황을 알려 주었다.
“방금 세 번째 비무가 끝났어요. 유력한 우승 후보인 당혁 공자의 비무였는데, 놓치셔서 아쉽네요.”
당이령은 공손한 태도로 말했다.
“하지만 곧 마지막 비무에 출전할 테니 그때 보실 수 있을 거예요.”
이제 셋째 날인데 비무는 마지막을 향하고 있었다.
칠대세가의 젊은 후기지수들 뿐이라 비무 자체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차피 비무는 명분일 뿐이다.
이후에 이뤄질 수많은 문파와 상단 들의 회동이 태평맹에는 더 중요했다.
운현에게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비무가 끝나면 반드시 당설련이 접촉을 시도해 올 것이다.
그때야 비로소 그의 일이 시작되는 것이다.
물론 지금도 감찰어사 조관과 항장익, 담소하는 태평맹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분류하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말이다.
***
마지막 비무를 끝으로 태평맹의 새로운 오룡삼봉이 결정되었다.
예상대로 반 이상이 당문 소속이었다.
당문의 아가씨 당이령은 살짝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오룡삼봉으로 뽑힌 후기지수들은 각 지부에서 중책을 맡게 될 거예요. 용봉의 징표로 남자들에겐 오룡검, 여자들에겐 삼봉검이 수여되지요. 아, 여자인데 왜 봉(鳳)이냐고 생각하시겠지만…….”
일반적으로 봉은 숫컷, 황은 암컷을 이르는 말이다.
그러나 운현은 빙긋 웃었다.
“알고 있습니다.”
“네?”
느긋한 표정으로 운현은 말을 이었다.
“애초에 봉은 용과 같은 전설의 신수라 성별을 따지지 않았습니다. 대대로 용이 군주의 상징으로, 그리고 봉황이 그 반려의 문양으로 쓰였던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지요. 봉과 황의 구분을 하게 된 건 나중의 일인데, 아마도 남녀 간의 연정을 전설의 새에 비유하면서 나타난 문학적 현상으로…….”
말하던 운현은 멈칫했다.
당이령이 놀라운 눈으로 운현을 보고 있었다.
“크흠.”
운현은 헛기침을 하며 말을 얼버무렸다.
“뭐, 상징이라는 건 대부분 관용적 표현인지라 결국 해석하기 나름이니까요.”
“어떻게 아셨어요?”
자신도 모르게 당이령이 물었다.
운현은 어색하게 웃었다.
“예전에 살짝, 궁금해져서요. 그때 찾아봤습니다.”
그건 무림맹 용봉지회가 끝난 후 서기를 하던 때였다.
용봉지회의 봉은 수컷을 뜻하는 말임을 떠올리고 의아한 마음에 경전을 뒤져 가며 용례를 확인한 것이다.
궁금한 것은 자신이 직접 확인하는 것이 학사들의 방식이니까.
“그러셨군요. 아! 문주님이세요!”
운현은 고개를 돌렸다.
단단한 체격을 가진 노년의 사내가 중앙 비무대로 오르고 있었다.
강렬한 눈매가 인상적인 그는 바로 당문의 문주, 청염군 당천벽이었다.
절기인 독기공이 마치 푸른 불꽃 같다 하여 청염군이라는 명호를 얻은 그는 대단히 위압적인 기백을 지니고 있었다.
희끗희끗한 머리와 허연 수염만 아니면 중년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저벅, 저벅.
당천벽은 비무대에 서 있는 여덟명의 후기지수에게 다가갔다.
오룡삼봉으로 선발된 그들은 긴장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우승자인 당혁 역시 굳은 표정으로 서 있었다.
‘훗.’
당천벽은 희미한 웃음을 머금었다.
당혁은 바로 그의 막내아들이기도 했다.
엄하게 키워서인지 부친을 어려워하고 커서는 반항의 빛도 엿보였다.
그러던 당혁인지라 당천벽에게는 오늘의 결과가 더욱 흐뭇했다.
당천벽은 오룡삼봉을 돌아보며 말했다.
“용봉의 칭호를 쟁취한 것을 축하한다.”
내력이 담긴 그의 목소리가 대회장 전체에 묵직하게 울려 퍼졌다.
“자네들은 태평맹의 미래이며 강호 무림의 미래다. 그 막중한 책무를 잊지 말고 힘써 정진하도록 하라.”
당천벽은 옆에 선 무사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검을.”
무사는 즉시 여덟 자루의 검을 공손히 내밀었다.
용이 장식된 다섯 자루의 오룡검과 봉황이 새겨진 세 자루의 삼봉검.
모두가 사천 최고의 장인이 만든, 가히 명검이라 할 만한 것들이었다.
오룡검 한 자루를 들어 올린 당천벽이 말했다.
“오늘 그대들에게 이 검을 내리니, 항상 스스로를 돌아보아 이 검 앞에 부끄럽지 않은 자가 되도록 하라.”
슥.
당천벽은 우승자인 당혁에게 검을 내밀었다.
당혁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고 두 손으로 검을 받아 들었다.
“와아아아!”
엄청난 환호가 쏟아져 나왔다.
대회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은 모두가 일어나 새로운 용봉들을 축하해 주었다.
운현 또한 기쁜 마음으로 박수를 보냈다.
지켜보던 당설련 역시 미소를 머금고, 당천벽의 입가에도 웃음이 걸렸다.
사람들의 환호성이 천천히 잦아들자 당천벽의 묵직한 목소리가 다시 대회장을 울렸다.
“젊은 그대들의 노고를 축하하는 의미에서…….”
웃음을 피워 올리며 당천벽은 말했다.
“개인적으로 원하는 것들이 있다면 들어주도록 하지.”
“오오오.”
사람들은 탄성을 흘리며 기대로 눈을 빛냈다.
당문의 문주이자 사천의 주인인 당천벽이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하는 것이다.
당연히 흥분되는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원하는 바가 있습니다.”
당혁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의 안색은 여전히 딱딱하게 굳어 있었지만 모두는 그저 긴장 탓이려니 여겼다.
“그래, 무엇이더냐?”
슥.
당혁은 고개를 들었다.
“저는 비무를 원합니다.”
“비무?”
당천벽은 의아한 눈빛을 했다.
혹시 막내아들이 자신과의 비무를 원하는 것인가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당천벽의 짐작은 틀렸다.
당혁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대로 오룡검을 뽑았다.
쉬익.
오룡검의 칼날의 서슬 퍼런 빛을 번득였다.
당천벽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당혁의 검이 향한 사람은 그가 아니었다.
“나는 비무를 원한다!”
당혁이 귀빈석을 노려보며 외쳤다.
“바로 당신, 창룡검주와 말이다!”
번뜩이는 오룡검의 끝은 운현을 똑바로 향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