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7화. 신승의 그림자
운현은 당문의 아가씨, 당이령을 따라 대회장으로 들어갔다.
당이령이 안내한 자리는 귀빈석 중에서도 제법 상석이었다.
누가 봐도 칠대세가의 가주들이나 앉을 법한 자리였다.
“여기가 제 자리입니까?”
혹시나 싶어서 운현이 물었다.
당이령은 정중하게 말했다.
“네. 혹시 다른 자리를 원하시면…….”
“아니, 괜찮습니다.”
어차피 어디 앉으나 마찬가지다.
당이령에게 감사를 표하고 운현은 자리에 앉았다.
진예림도 호위로서 운현의 뒤를 지키고 섰다.
하지만 당이령은 떠나는 대신 운현 옆에 다소곳이 앉았다.
사락.
운현이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그녀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맹에 대해 궁금하신 것들이 있으시면 알려드려고 합니다. 혹시 불편하시다면…….”
“아니요. 감사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누가 누군지 알고 싶던 참이어서 운현은 감사히 그녀의 친절을 받아들였다.
아직 대회 시작 전이어서인지 귀빈석은 대부분 텅 비어 있었다.
사실 본래대로라면 운현도 당설련과 담화를 나누고 있어야 했다.
운현은 고개를 들어 대회장을 돌아보았다.
‘무림맹 때보다 훨씬 크네.’
귀빈석은 비무대와 아주 가까웠고, 덕분에 대회장은 더욱 크고 웅장하게 보였다.
이 대회에 쏟는 태평맹의 정성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모습이었다.
“후후, 그게 정말인가요?”
“하하하.”
유쾌한 웃음소리와 함께 몇 사람이 귀빈석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운현은 벌떡 일어섰다.
“아!”
들어오던 사람들도 운현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중 한가운데 서 있던 한 여인의 표정이 단번에 변했다.
운현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 소저!”
저벅.
일어선 운현은 반가운 듯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그녀, 이서연의 표정은 경악으로 굳어 있었다.
“오랜만이오, 이 소저. 아니, 서연 누이.”
운현은 반가운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자칫하면 손이라도 덥석 잡을 기세였다.
“우, 운 오라버니…….”
이서연은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운현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렇소. 나요, 서연 누이.”
그 모습에 진예림은 눈살을 찌푸렸다.
‘또야?’
대체 운현은 왜 가는 곳마다 아는 여자를 만나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여자들의 반응도 심상치가 않다.
태평맹 대외 총괄군사 당설련의 얼굴이 파랗게 질리더니, 저 여인 역시 경악을 감추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대체 저분은…….’
진예림이 고개를 저으며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는 사이, 이서연이 가까스로 말했다.
“……어떻게, 오라버니가 여기에…….”
“초청을 받았소.”
이서연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다.
초청이라니, 태평맹이 창룡검주 운현을 초청했단 말인가?
‘대체 이게 어떻게…….’
이서연은 더더욱 혼란스러웠다.
그럼 태평맹은 운현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었다는 뜻인가?
대체 무슨 의도로 이곳에 운현을 초청한 것일까?
자신이 알던 전제들이 무너져 내리니 이서연은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럼 다친 곳은…….”
운현은 빙긋 웃었다.
“괜찮소. 걱정해 줘서 고맙소. 아, 형수님과 아영 누이는 잘 있소?”
“아, 네. 잘 있어요.”
이서연 좌우에 있던 이들이 의아한 눈빛으로 운현을 보았다.
운현은 자신이 너무 오래 그녀를 붙잡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길 가는 사람을 막아선 셈이니 말이다.
“그럼 나중에 더 이야기합시다.”
운현은 웃으며 자리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서연은 한동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그녀의 두 눈은 마치 귀신이라도 보는 듯 운현에게 못박혀 있었다.
이서연은 단지 시작에 불과했다.
태평맹 칠대세가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하자 똑같은 광경이 몇번이고 반복되었다.
“우, 운 서기?”
“허억!”
“저, 저자가 대체 어찌 이곳에!”
문파도, 나이도 가리지 않았다.
무슨 세가의 태평맹 대표자도, 어디 문파의 외당 당주도 하나같이 운현을 발견하곤 경악의 표정을 지었다.
그때마다 운현은 그저 가벼운 웃음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일 뿐이었다.
그 후의 반응도 한결같았다.
그들은 애써 운현을 외면하며 허겁지겁 자리로 향했다.
예외라면 남해검문의 파진한과 황보선혜가 등장했을 때였다.
두 사람은 운현과 정중한 예를 나눈후 미소로 자리로 향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운현의 뒷모습을 날카롭게 노려보며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결국 보다 못한 진예림이 물었다.
“대인.”
진예림은 운현의 귓가에 속삭이듯 물었다.
“다들 왜 저러는 건가요?”
운현은 흠칫 놀라더니 자신의 귀를 문지르며 진예림을 돌아보았다.
“……깜짝 놀랐습니다.”
마치 원망하듯 운현이 말했지만 진예림의 눈빛은 날카롭기만 했다.
“크흠, 저들에게는…….”
헛기침을 한 운현은 주변을 슬쩍 돌아보았다.
운현과 시선이 마주친 이들은 다급히 고개를 돌렸다.
씁쓸한 목소리로 운현은 말했다.
“……아마 제가 망령처럼 보이기 때문일 겁니다.”
“네?”
진예림이 반문했다.
옆에 있던 안내 아가씨, 당이령도 의아한 눈빛으로 운현을 쳐다보았다.
운현은 씁쓸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저들은 제게서 신승의 그림자를 보고 있습니다. 그들이 고개를 돌리고 애써 외면하는, 지나간 과거의 망령 말입니다.”
신승의 이름은 곧 무림맹을 상징한다.
그리고 운현은 신승의 사제다.
그러므로 그들은 운현에게서 신승과 함께 무림맹의 그림자를 보는 것이다.
아예 있지도 않았던 것처럼, 심지어 입에조차 올리지 않는 무림맹을 말이다.
“흥.”
진예림은 나지막이 조소를 흘렸다.
“바보들이군요. 과거는 외면한다고 없어지는 게 아닌데.”
그 말에 운현은 진심으로 동의했다.
“네, 옳습니다.”
운현은 나지막이 말했다.
“외면한다고 없어지는 게 아니지요.”
회한이 서린 눈빛으로 운현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바로 그때였다.
“어이쿠!”
누군가의 쾌활한 목소리가 들렸다.
운현은 고개를 돌렸다.
커다란 체격의 제갈기호가 웃으며 운현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이거 운 서기님 아니십니까?”
“아, 제갈 공자!”
운현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갈기호는 대뜸 운현의 손을 붙들고는 만면에 웃음을 지었다.
“어이구. 이게 얼마 만입니까? 운 서기님. 아니, 이젠 서기가 아니지요? 하하하.”
“만나서 반갑습니다. 제갈 공자.”
“이곳까진 대체 어쩐 일이십니까? 오신다는 말도 못 들었는데요.”
“초청을 받았습니다. 정확히는 제 친우가요. 어쩌다 보니 제가 대신 오게 되었군요.”
“오, 그래요? 아주 든든한 친구를 두셨나 봅니다. 하하하. 아참, 저도 출세했습니다.”
제갈기호는 가슴을 내밀며 말했다.
“자그마치 태평맹 대내 총괄군사입니다. 뭐, 사실은 이름만 거창하지만요. 하하하하.”
“축하합니다. 제갈 공자.”
“감사합니다.”
두 사람은 빙긋 웃으며 서로 예를 표했다.
그 모습을 귀빈석의 모든 사람들은 똑똑히 보고 있었다.
이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제갈기호가 물은 것들은 그들도 역시 궁금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 그러고 보니 가주님께서도 오셨습니다.”
정중하게 예를 표하며 제갈기호가 옆으로 물러났다.
저벅, 저벅.
흰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한 사람이 걸어왔다.
무인이라기보다 노년의 학자와도 같은 풍모였지만, 두 눈에서 뿜어 나오는 범상치 않은 기세는 그가 바로 군자검 제갈명이라는 것을 보여 주고 있었다.
운현은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저벅.
제갈세가의 가주, 군자검 제갈명이 발을 멈췄다.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꼭 한번 찾아오라 했는데 어째서 이다지도 소원하였나?”
짐짓 책망하는 듯한 말이었지만 그건 대단히 친근한 말투였다.
“사람하고는. 날 만나러 오는 게 그리도 힘들던가?”
운현은 웃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찾아뵙고자 하였으나 여러가지로 형편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형편이 안 되었다면 어쩔 수 없지.”
가주 제갈명은 운현을 지긋이 바라보며 말했다.
“누구나 피치 못할 사정이라는 것이 있는 법이니까.”
“헤아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언뜻 흐뭇하기까지 한 광경이었지만 그 대화는 사뭇 의미심장했다.
그때였다.
저벅, 저벅.
“오, 이게 누구신가!”
중후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운현과 가주 제갈명은 고개를 돌렸다.
모용세가의 가주, 관일검 모용단천이 걸어오고 있었다.
“운 대인 아니신가? 하하하.”
모용단천은 놀라지도 혼란스러워하지도 않았다.
그는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운현에게 다가왔다.
제갈세가의 가주 제갈명은 운현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럼 다음에 또 보세.”
“네.”
그사이 다가온 모용단천은 제갈명과 가볍게 인사를 나누었다.
제갈명과 제갈기호가 자리로 움직이고, 모용단천은 운현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반갑소, 운 대인.”
짧은 인사였지만 모용단천의 눈빛은 천마디 말보다 더 따뜻했다.
“반갑습니다. 가주님.”
운현의 목소리가 살짝 떨린 건 어쩔 수 없었다.
인사는 그것뿐이었다.
모용단천은 몸을 돌려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뒤를 이어 나타난 사람은 모용진과 모용미였다.
“운 대인.”
모용진 역시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운현에게 예를 표했다.
“모용진 대협.”
운현은 고개를 숙였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다.
그러나 이곳은 마음을 터놓을 만한 곳이 아니었다.
운현과 모용진은 많은 감정이 담긴 눈빛을 나눈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사박.
모용미가 운현 앞에 섰다.
그녀는 손을 모으고 깊숙히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그 모습은 마치 한 송이 꽃과 같았다.
“아, 소저…….”
운현이 무어라 말하려는데 모용미가 고개를 들었다.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가 말했다.
“다시 뵙게 되어 정말로 기뻐요, 운 학사님.”
단지 그뿐이었지만 귀빈석의 모든 사람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운현을 향한 모용미의 진심이 어떠한지를.
“네, 소저.”
웃음을 머금으며 운현도 답했다.
모용미가 그녀의 자리로 향하고 운현도 앉았다.
그제야 운현은 자신의 자리가 다른 가주들 근처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태평맹 칠대세가의 가주들과 자리를 나란히 한 것이니, 엄청난 배려라고 아니할 수 없었다.
물론 본래 운현을 위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말이다.
‘다른 분들은 못 오셨나 보군.’
혁련세가와 단목세가 그리고 남해검문은,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가주가 폐관 수련 중이다.
염중부에게 입은 부상 탓에 얼굴조차 보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공손세가 역시 불탄 본가를 재건하느라 세가를 비울 형편이 되지 못했다.
‘그런데 왜 당문의 문주는 보이지 않는 거지?’
정작 있어야 할 문주의 모습이 없다.
운현이 의아하게 생각하는데, 문득 당설련의 목소리가 들렸다.
“천하의 동도 여러분.”
높이 솟은 누대 위에 당설련이 서 있었다.
그녀는 화려한 옷자락을 펄럭이며 당당한 표정으로 대회장을 내려다 보았다.
“비록 세상이 어지러울지라도 의기는 꺾이지 아니하며, 모두가 숨을지라도 의인은 반드시 떨치고 일어나는 법이니.”
내력이 실린 그녀의 목소리는 넓은 대회장에 똑똑히 울려 퍼졌다.
자리를 가득 메운 사람들은 숨조차 죽인 채 당설련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태평맹은 오늘 이 대회를 통하여 감히 하늘과 땅에 고하는 바입니다.”
당설련은 가늘게 웃었다.
“강호 무림의 새로운 태평성대는 바로 우리, 태평맹에 의해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입니다!”
당설련이 손을 뻗는 것과 동시에 사방에서 거대한 휘장이 펼쳐졌다.
“오오오!”
사람들은 감탄을 터트렸다.
파라라라락.
그것은 가히 장관이 아닐 수 없었다.
장정 열 정도는 능히 감쌀 정도로 넓은 휘장이 동시에 아래로 펼쳐지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놀라운 광경인데, 휘장에서 드러나는 태평맹이라는 글자는 하나같이 금빛으로 화려하게 수놓아져 있었다.
당설련은 두 팔을 활짝 벌렸다.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 갈 젊은 용봉들의 회합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팡, 팡, 팡.
여기저기서 폭죽이 터지고 오색 종이가 휘날렸다.
이미 기대로 달아올라 있던 사람들의 흥분은 최고조로 치솟았다.
“와아아아!”
엄청난 환호성과 박수가 터져 나왔다.
태평맹에 우호적인 사람들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마저 그 열기에 휩싸여 소리를 질렀다.
당설련은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우아하게 예를 표한 후, 누대에서 내려왔다.
사박, 사박.
누대 아래에서 대기하던 수하에게 당설련은 나지막이 말했다.
“시작해.”
“네!”
수하는 즉시 고개를 숙여 명을 받들었다.
당문의 문주도 아니고 칠대세가의 가주도 아닌, 대외 총괄군사 당설련의 선언에 의해 태평맹 무림용봉지회는 시작되었다.
당설련의 뺨은 살짝 상기되어 있었고 입가에는 자신만만한 미소가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자신이 애써 귀빈석 쪽을 보지 않고 있다는 건, 그녀 스스로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