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6화. 전권 대리인
단순 반복 작업으로 머리가 굳어 있던 태평맹의 문사가 새로운 상황을 인지하는 데는 시간이 좀 걸렸다.
하지만 일단 상황이 파악되자, 그는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섰다.
“으아악! 이건 여기서 기다리시면 안 되는데!”
“네?”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잠시만요!”
문사는 초청객을 놔둔 채 다급히 뛰어갔다.
그의 손에는 황금빛 문양이 새겨진 초청장이 펄럭이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문사는 중년인과 함께 헐레벌떡 달려왔다.
“어, 어서 오십시오. 귀인.”
화려한 비단옷을 입은 중년인은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그는 땀을 닦으며 애써 웃음을 지었다.
“앞쪽에서 기다렸는데 길이 엇갈린 모양이로군요. 불편을 끼쳐 드려 죄송합니다, 귀인.”
사실 그건 중년인의 잘못이 아니다.
조정에서 내려온 전권 대리인이 아무런 깃발도, 호위대도 없이 줄을 서고 있을 줄을 누가 알았으랴?
게다가 옷차림은, 나름 깔끔하긴 하지만 평범한 문사의 모습 그대로인 데다가 단 한 명 있는 호위조차 여성이 아닌가?
“괜찮습니다. 초청장에 무슨 문제가 있는 건 아닙니까?”
운현이 물었다.
“문제라니요. 그런 건 전혀 없습니다.”
중년인은 두손을 내저었다.
“아주 잘 오셨습니다. 귀인만을 위한 자리가 따로 준비되어 있으니 저를 따라오시지요.”
환한 웃음을 지으며 중년인은 말했다.
운현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무복을 입고 서 있던 진예림 역시 조용히 그들의 뒤를 따랐다.
그러다 문득 생각했다.
‘언뜻 보면 주인 뒤를 졸졸 따라가는 하인들 같네.’
그건 안내하는 중년인의 복식이 운현보다 훨씬 화려하고 고급스럽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중년인은 연신 웃으며 운현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훗.’
피식 웃으며 진예림은 발을 옮겼다.
드디어 태평맹 무림용봉지회에 들어선 것이다.
대외 총괄군사 당설련은 귀빈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특히 천하삼대상단으로 발돋움한 호암상단의 젊은 사무총관, 이서연은 중요한 인물이 아닐 수 없었다.
“정말 놀라운 안목이시군요. 감탄했어요.”
당설련의 말에 이서연은 미소를 지었다.
사무총관으로서 이서연의 안목은 가히 놀라울 정도였다.
그녀 한 사람 덕분에 호암상단의 이익이 두 배는 늘었을거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운이 좋았을 뿐이에요. 정작 중요한 문제는 제대로 못 보고 있으니까요.”
“중요한 문제라니요?”
당설련이 묻자 이서연은 살짝 멈칫한 후에 빙긋 웃었다.
“남자요.”
그 말에 당설련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 그건 저도 마찬가지네요.”
“푸훗.”
두 여인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때였다.
―군사님. 도착했습니다.
가느다란 전음이 당설련의 귀에 들려왔다.
당설련은 미소를 지은 채 이서연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럼 좋은 시간 보내세요. 사무총관님.”
“네, 감사해요. 대외 총괄군사님.”
자박, 자박.
당설련은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벗어났다.
슥.
수하가 모습을 드러내자 당설련이 물었다.
“지금 어디 있지?”
그녀의 목소리는 살짝 긴장되어 있었다.
“이곳으로 안내하고 있습니다.”
“전부 지시한 대로 했겠지?”
“네, 헌데…….”
당설련의 눈썹이 살짝 일그러졌다.
“초청객 줄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고 합니다.”
탁.
“뭐라고?”
당설련이 발을 멈추고 수하를 노려보았다.
수하는 즉시 고개를 숙이며 말을 이었다.
“복식이 평범한 문사의 것이라 알아볼 수 없었다고 합니다. 마차에도 관의 기를 달지 않았고 호위도 한 명뿐이었습니다.”
그 정도라면 알아볼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당설련은 표정은 펴지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무례를 행한 건 지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대체 왜……. 기인 흉내라도 내는 걸까?’
전권 대리인의 행동도 이해할 수 없었다.
정체를 숨기고 암행하는 것도 아닌데 당당한 관인이, 그것도 박 공공의 전권 대리인이 대체 왜 줄을 서고 문사의 복식을 하고 있단 말인가?
당설련이 상대의 속내를 파악하려고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옵니다.”
사락.
당설련은 즉시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얼굴에 거짓말처럼 화사한 미소가 번졌다.
꽃과 같은 웃음을 지으며 당설련은 사뿐싸뿐 귀인에게 다가갔다.
사박, 사박.
아직 거리가 멀었지만 당설련의 눈빛은 날카롭게 상대를 살피고 있었다.
‘과연.’
이미 들은 것처럼 상대는 수수한 문사 옷을 입고 있었다.
깔끔하고 단정하긴 하지만 다른 이들의 화려한 복식에 비하면 오히려 다른 의미로 눈에 뜨일 정도였다.
호위도 단 한 명뿐이었다.
그것도 간단한 무복을 차려입은, 그다지 뛰어난 미색이라 할 수도 없는 여인이다.
그에 비하면 귀인 옆에 있는, 당문의 방계 중에 특별히 가려 뽑은 총명하고 아름다운 아가씨가 더욱 출중해 보였다.
두 사람은 사뭇 웃음을 지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좋아.’
미소를 가득 머금은 채, 당설련은 나비처럼 사뿐사뿐 귀인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당설련의 가벼운 걸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탁.
멈춘 것은 발걸음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얼굴에 가득하던 꽃 같은 화사한 미소도 어느새 자취를 감추었다.
아름다운 그녀의 눈동자에는 경악이 번져 가고 있었다.
저벅.
웃으며 다가오던 귀인과 당문의 아가씨도 당설련을 발견했다.
“아.”
아가씨는 웃으며 운현에게 말했다.
“이분이 바로 태평맹 대외 총괄군사…….”
“다, 당신…….”
아가씨의 말은 당설련의 목소리에 끊어졌다.
의아한 시선들도 개의치 않고, 당설련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어떻게 여기에…….”
당설련의 얼굴은 충격과 혼란으로 가득했다.
“오랜만이군요.”
박 공공의 전권 대리인, 운현은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다시 만나 반갑습니다. 당 소저.”
운현은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그러나 당설련은 답례는커녕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대체 운현이 왜 여기 있단 말인가?
조정의 귀인은 어디가고 어째서 운현이 이 자리에 서 있단 말인가?
단전이 부서져 폐인이 되었거나 죽었을 거라던 바로 그 운현이 말이다.
당설련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 심상찮은 분위기를 안내하던 당문의 아가씨가 알아차렸다.
“운 대인, 이리로 오시지요. 대외 총괄군사님, 명하신 대로 귀인을 자리로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아, 그, 그래요.”
당설련은 당혹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지도 그녀는 알지 못했다.
“이리 오시지요, 운 대인.”
안내역의 아가씨는 능숙하게 운현을 안내했다.
운현은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를 따라 발을 옮겼다.
저벅, 저벅.
당문의 아가씨와 운현, 그리고 진예림은 당설련을 스쳐 지나갔다.
진예림이 슬쩍 당설련을 쳐다보았지만 당설련은 그것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운현의 뒷모습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쳐다볼 뿐이었다.
‘왜 저래?’
진예림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태평맹 대외 총괄군사인 당설련과 운현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녀는 도무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설마 또 치정 문제야?’
진예림의 눈썹이 일그러졌지만 운현은 보지 못했다.
그는 그저 당문의 아가씨가 하는 설명에 충실히 귀를 기울이고 있을 뿐이었다.
***
대회장 내 당설련의 임시 집무실.
대외 총괄군사 당설련은 거친 걸음으로 집무실로 들어왔다.
쾅.
부서져라 문을 닫은 당설련은 아드득 이를 갈았다.
“대체 무슨 속셈이야!”
콰앙.
탁자가 부서질 듯 소리를 내고 그녀의 앙칼진 목소리가 텅 빈 집무실에 쩌렁쩌렁 울렸다.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은 당설련은 거칠게 손을 휘저었다.
콰장창.
탁자 위에 있던 고급스러운 찻잔들이 속절없이 허공을 날았다.
날카로운 파편이 집무실 이곳저곳에 튀었지만 당설련은 상관하지 않았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네가 여길 나타나!”
당설련은 두 손으로 탁자를 짚었다.
그녀의 붉은 입술이 하얀 치아 아래 일그러졌다.
오늘을 위해 애써 단장한 머리와 화사하게 차려입은 옷매무새도 이곳저곳 흐트러져 있었다.
“하!”
당설련은 짧게 숨을 내쉬며 한 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흥분해서는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어떻게 흥분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운현.”
당설련은 이를 갈았다.
창룡검주 운현은 그녀의 적이다.
신승만 죽으면 자신들의 것이 되리라 여겼던 무림맹을 가로채 간 사람이 바로 운현이었고, 운현 탓에 그녀와 당문은 독선의 조력을 잃었다.
운현이 있었기에 모용세가가 세력을 온존했고 운현 때문에 창룡지회라는 것들이 들썩인다.
사라졌어도 정말로 말썽이라고, 그렇게까지 생각했던 운현이 아닌가?
그런데 하필이면 이곳, 당설련의 모든 것을 쏟아부은 이 대회에 그가 모습을 나타냈다.
그것도 가장 중요한 박 공공의 전권 대리인으로.
그가 그녀의 적이 아니라면 대체 누가 적이겠는가?
“대체 몇 번이나 내 계획을 망쳐야 만족할 거야!”
쾅, 우지직.
탁자가 소리를 내며 균열이 내달렸다.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을 행동까지 하며 당설련은 분노를 내뿜었다.
아득.
당설련은 이를 갈았다.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야.’
운현은 알고 있다.
무림맹이 무너지기 전, 문왕이 독선과 염중부를 접촉한 것을.
비록 증거는 없다지만 무림맹의 몰락과 당문의 연관성을 의심하는 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렇지 않아도 태평맹의 창설이 무림맹에 대한 배신이라고 수군거리는 판국에, 운현이 그 사실을 밝힌다면 어떻게 될까?
당문은 한순간에 배신자로 몰리며 모든 명분을 잃게 될 것이다.
‘아니, 명분은 이미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지.’
운현은 신승의 사제다.
사람들은 그를 보는 순간 신승을, 그리고 무림맹을 떠올릴 것이다.
강호 유일의 정통 세력이었던 무림맹을 말이다.
태평맹이 애써 묻으려 했던 과거의 망령이 한순간에 되살아나는 것이다.
‘여기서 죽여야 하나?’
어쩌면 가장 간단하고 확실한 해결책이다.
그럴 수만 있다면 말이다.
‘……아니, 그건 불가능해.’
운현이 모든 내력을 잃었어도 그렇게 할 수는 없다.
조정의 전권 대리인이 피살된다면, 태평맹이 아니라 무림 전체가 날아갈지도 모른다.
“하아아아.”
당설련은 어깨를 떨며 깊은 숨을 내쉬었다.
자신은 태평맹의 대외 총괄군사다.
설령 전장에서라도 침착과 냉정을 잃지 말아야 하니, 이런 일 정도로 흥분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운현의 그 웃는 얼굴만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치솟는 것 같다.
빠득.
당설련의 붉은 입술 사이로 거친 소리가 흘렀다.
“……방법을.”
싸늘한 눈빛으로 당설련은 중얼거렸다.
“방법을 찾아야 해.”
심혈을 기울여, 말 그대로 모든 것을 쏟아 준비한 기회다.
그걸 운현 단 한 사람 때문에 엉망으로 만들 수는 없었다.
대책을 세우고 방법을 찾아야 했다.
하지만 어떻게?
‘너…….’
마치 눈앞에 운현이 있기라도 한 양, 당설련의 눈동자에 서슬 퍼런 기세가 피어올랐다.
꽉 쥔 그녀의 고운 손은 미처 숨기지 못한 분노로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