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검전 리마스터-305화 (305/530)
  • 305화. 태평맹 무림용봉지회

    사천성, 성도.

    태평맹 무림용봉지회 시작 사흘 전.

    성도는 도시 전체가 한껏 들떠 있었다.

    각 지역의 내로라하는 문파들은 물론 천하삼대상단을 비롯한 수많은 상단의 대표자들, 그리고 태평맹의 위세를 구경하고자 하는 호사가들까지 몰리며 성도는 사람으로 넘쳐났다.

    사람이 몰리자 성도의 상인들도 환호했다.

    오색 등이 요란하게 내걸리고, 온갖 노점이 곳곳에 문을 연 것은 물론, 유랑 극단과 재주꾼들까지 자리를 펴니 도시 전체가 축제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그날, 태평맹의 여섯 세가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같은 날에 성도로 들어섰다.

    대회의 주역인 여섯 세가들은 단번에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엄청난 환영 인파와 몰려든 구경꾼들로 인해 한동안 세가들의 행렬이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을 정도였다.

    세가들은 예기치 못한 상황에 어리둥절했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이번 대회가 사실상 태평맹의 개파대전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날 저녁, 태평맹 총단의 한 전각에서는 흥겨운 음악과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이번 대회에 참가하는 젊은 후기지수들을 위해 펼쳐진 연회였다.

    “오랜만입니다.”

    “하하하하.”

    “이거 반갑습니다.”

    젊은 후기지수들은 서로 인사를 나누기도 하고, 때로는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사흘 후면 서로 무공을 다투며 경쟁해야 할 상대였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향기로운 술과 달콤한 젊음에 취해 있었다.

    “하하, 황보 소저는 언제 봐도 아름다우시구려.”

    공손세가의 외당 부당주, 공손추현은 황보선혜에게 인사를 건넸다.

    두 사람 모두 인솔자 자격으로 연회에 참석한 터였다.

    황보선혜는 빙긋 웃으며 답했다.

    “감사해요.”

    공손추현은 연회장의 젊은이들을 보며 빙긋 웃었다.

    “다들 참으로 빛나지 않소? 나도 예전에는 저런 시절이 있었는데…….”

    “어머, 부당주님께서는 지금도 멋지신걸요?”

    중년에 접어든 공손추현의 입이 귀에 걸렸다.

    아름다운 아가씨의 칭찬은 비록 빈말이라도 듣기 기쁜 것이리라.

    “소저께서도 참으로…….”

    슥.

    공손추현이 황보선혜에게 가까이 다가서며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박.

    그러나 황보선혜는 즉시 뒤로 물러섰다.

    “그럼 저는 이만 실례하겠어요. 인사를 드려야 할 분이 있어서요.”

    “아, 저기 잠깐…….”

    그가 무어라 말했지만 황보선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사박, 사박.

    황보선혜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그녀는 커다란 창가로 다가갔다.

    차가운 밤공기가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하아.”

    그녀가 나지막이 한숨을 쉬는데 문득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소저.”

    고개를 돌린 황보선혜는 짐짓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당 소협.”

    저벅.

    훤칠한 키의 잘생긴 그 청년은 바로 당문의 촉망받는 젊은 후기지수, 당혁이었다.

    황보선혜는 씁쓸한 미소를 피워 올렸다.

    그녀의 모습에 당혁의 얼굴에 그늘이 짙어졌다.

    “혹시 저자가 무례한 짓이라도 한 것 아니오?”

    당혁은 멀리 있는 공손추현을 노려보았다.

    그 기세는 마치 당장이라도 검을 뽑을 듯 했다.

    “당 소협이 상관할 일이 아니에요.”

    그녀의 목소리는 사뭇 냉랭했다.

    공손추현에게조차 의례적인 미소를 짓던 것과는 아주 달랐다.

    “그런 말씀은 하지 마시오. 나는…….”

    당혁은 처연한 눈빛으로 황보선혜에게 다가갔다.

    아니, 다가가려 했다.

    사박.

    황보선혜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당혁은 흠칫했다.

    황보선혜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돌렸다.

    “더 이상 다가오지 마세요. 당신이 가까이 올수록 제 마음은 찢어지는 듯하니까요. ”

    “선 매…….”

    “그렇게 부르지도 마세요.”

    황보선혜는 고개를 저었다.

    슥.

    눈물 젖은 눈동자로 당혁을 올려다보며 그녀는 말했다.

    “당신은 문주의 직계이자 당문의 촉망받는 후기지수예요. 게다가 당신의 누님은 태평맹 대외 총괄군사이시니…….”

    “누님은 나와 상관없소!”

    당혁은 격한 어조로 말했다.

    “아버지께서 문주시면 뭐가 어떻단 말이오? 선 매는 내 진심을 알지 않소? 나는 선 매를 위해서라면…….”

    “제발 날 더 이상 비참하게 만들지 말아요.”

    황보선혜는 고개를 돌렸다.

    눈물을 삼키던 그녀가 시선을 피한 채 나지막이 말했다.

    “우리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어요.”

    “그렇지 않소!”

    당혁은 슬픈 얼굴로 말했다.

    “선 매, 선 매는 다른 사람에게는 그토록 다정하면서 어째서 내게는 이다지도 냉정하오? 제발 소저의 밝은 목소리를, 그 웃는 얼굴을 내게 다시 보여 주시오.”

    그러나 당혁의 호소는 헛되이 끝나고 말았다.

    “……제 목숨은 이미 그분의 것이에요.”

    당혁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지금 그녀가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당혁은 잘 알고 있었다.

    황보선혜의 생명의 은인이자 당혁은 비교도 할 수 없는 배분을 지닌, 지금도 강호 무림에 자자한 소문의 주인공.

    바로 창룡검주다.

    당혁은 질투로 이를 갈았다.

    “……허나 그는 지금 행방조차 알 수 없지 않소?”

    굳은 얼굴로 당혁이 말했다.

    그러나 황보선혜는 아무 말도 않았다.

    당혁은 흠칫했다.

    지금 그녀의 침묵은 많은 것을 말하고 있었다.

    “설마…….”

    “소협.”

    당혁의 말을 끊으며 황보선혜가 말했다.

    그를 쳐다보는 그녀의 눈에는 아직도 눈물이 가득했다.

    “부디 당문의 용이 되세요. 저 같은 여자는 잊고, 푸른 하늘을 날아가세요.”

    “선 매!”

    사락.

    당혁의 목소리엔 아랑곳없이 황보선혜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대로 연회장을 나왔다.

    사박, 사박.

    그녀의 뒷모습이 어둠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당혁은 눈을 떼지 않았다.

    황보선혜 역시 그의 시선을 느끼고 있었지만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으득.

    이를 악무는 당혁의 표정은 처참할 정도로 일그러져 있었다.

    ***

    운현 일행은 사천성 성도에 들어와 있었다.

    하지만 성도 전체가 사람으로 가득해서 비싼 값을 치르고도 형편없는 객잔밖에 구하지 못했다.

    더구나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아우, 시끄러워. 밤새도록 폭죽을 터트리는 바람에 잠을 설쳤잖아.”

    진예림이 투덜대자 담소하가 냉큼 대꾸한다.

    “저는 어떤 상황에서도 잘 수 있어요.”

    “자는 것도 능력이야?”

    진예림의 핀잔에도 불구하고 담소하는 꿋꿋했다.

    “지금 같은 경우엔 확실히 도움이 되잖아요?”

    “잘났다.”

    더 이상 옥신각신할 기력이 없는지 진예림은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말았다.

    하지만 아침이라고 나온 음식은 참지 못했다.

    “이거 사람이 먹으라고 내온 음식 맞아? 돈도 많이 받으면서 대체 왜 이런데?”

    “그러게요.”

    담소하 역시 인상을 찌푸렸다.

    항장익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마 식재료를 구하지 못한 것 아닐까?”

    성도의 물가는 폭등했다.

    당연히 객잔이 구할 수 있는 식재료의 질도 낮아질 수밖에 없었다.

    “저기, 그런데요.”

    문득 담소하가 말했다.

    “암행도 아닌 정식 방문인데, 안찰사나 포정사에 협조를 요청하면 되지 않나요?”

    모두의 시선이 운현을 향했다.

    담소하의 말대로였다.

    안찰사나 포정사라면 이런 열악한 음식이나 객잔으로 고생하지 않아도 되리라.

    “그건…….”

    “제가 반대했습니다.”

    조관이 무어라 하려는데 운현이 먼저 말했다.

    “순행 중에 감찰어사가 어찌 지방 대관의 영접을 받겠습니까? 대관들의 본분은 어디까지나 백성을 보살피는 것입니다.”

    담소하와 진예림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조관도 고지식하다 여겼는데, 그보다 더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곳의 대관들은 당문과 태평맹의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직무 수행을 위해서는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습니다.”

    운현의 말은 옳았다.

    조관 역시 그래서 찬성한 것이다.

    다만 운현이 아예 영접조차 거절한 탓에 사천성 지방 대관들이 일제히 숨을 죽였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지만 말이다.

    “나쁘지 않네요.”

    듣고 있던 진예림이 말했다.

    그녀는 반쯤 포기한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방 대관들에게 경고도 될 거예요. 당문이나 태평맹과 너무 유착하지 말라는 경고요.”

    “그렇군. 역시 대인께서는 생각이 깊으시군요.”

    항장익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거기까지 할 생각이 없었던 운현은 잠시 당황했지만, 결과적으론 나쁘지 않았다.

    “헤, 누님이 대인 편을 다 드네요?”

    담소하의 말에 진예림의 눈이 날카롭게 변했다.

    “너…….”

    “모두들 잠시 산책이라도 나갈까요?”

    운현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사천까지 와서 이런 음식을 먹는 건 조금 억울해서요. 산책하다가 좋은 음식점이 보이면 같이 식사라도 하지요. 물론 제가 사겠습니다.”

    박 공공이 당분간 쓸 정도라며 준 전표는 대저택을 몇 채는 살 정도였다.

    아무래도 국가 규모의 예산을 다뤄서 그런지 금전 감각이 아주 달랐던 것이다.

    게다가 필요하면 언제든, 얼마든 도찰원을 통해 청구할 수 있었다.

    과거 조관에게 맡겼던 여비도 거의 그대로 운현에게 돌아와서, 재정적으로 운현 일행은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맞아요! 사천은 독특한 요리로 유명한데, 이런 걸로 아침을 때우는 건 사천에 대한 모독이라고요!”

    담소하가 대번에 반색하고 항장익과 진예림도 기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자, 그럼 가지요.”

    운현은 조관에게 말했다.

    조관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섯 사람은 가벼운 마음으로 객잔을 나섰다.

    사천성 성도의 이국적인 아침 풍경이 그들을 반기고 있었다.

    ***

    며칠 후, 사천성 성도.

    태평맹 무림용봉지회는 별개의 대회장에서 진행되었다.

    참관을 원하는 이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대회장 앞은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지만, 감히 태평맹 앞에서 소란을 피울 자들은 없었기에 입장은 생각보다 순탄하게 진행되었다.

    정식 초청장을 가진 별도의 입구 역시 물론 준비되어 있었다.

    하지만 문파와 상단을 망라하여 발송된 정식 초청객이 워낙 많아서, 줄을 서는 일은 피할 수 없었다.

    ‘대단하네.’

    운현은 대회장 입구를 보며 내심 감탄했다.

    이 많은 사람들, 그것도 하나같이 제법 지위를 가진 이들이 줄을 서는 것도 마다않는다.

    태평맹의 위상이 어떤지 확연히 보여 주는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어서 오십시오. 초청장을 보여 주시지요. 감사합니다.”

    손님을 맞이하는 다섯 명의 문사는 입에 배어 버린 인사말을 쉬지 않고 되풀이했다.

    초청장의 번호와 신분을 확인한 후에는 따로 준비한 패를 내어주었다.

    “여기 신분패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이 패로 대회 기간 동안 별도의 확인 없이 입장이 가능하고 식당에서 언제든지 식사를 하실 수 있습니다. 숙소가 필요하시면 따로 문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네, 감사합니다.”

    숙련된 문사들이 끊임없이 일하는데도 초청객의 줄은 줄어들지 않았다.

    게다가 그들은 정식 초청장을 받을 정도로 영향력이 있는 자들이라 소홀히 대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자기 차례가 되어서야 초청장을 찾는답시고 짐을 뒤적거리거나, 온갖 시시콜콜한 질문을 해 대는 사람들을 대할 때면 문사들도 치솟는 혈압을 억지로 내리 눌러야 했다.

    “어서 오십시오. 초청장을 보여 주시지요. 감사합니다.”

    다음 사람이 다가오자 문사의 입에 배어 버린 인사말이 튀어나왔다.

    상대는 아직 초청장을 꺼내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여기 있습니다.”

    다행히 그는 바로 초청장을 내주었다.

    문사는 정중하지만 기계적인 태도로 초청장을 받았다.

    초청장의 번호와 신분을 확인하려던 문사는 멈칫했다.

    그리고 무언가 이상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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