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화. 빙설총명
수하는 당설련에게 정중하게 답했다.
“이것 탓이 아닌가 합니다.”
사락.
작은 두루마리가 당설련에게 건네졌다.
붉은 비단에 날아갈 듯한 금색 용 문양이 새겨진 그 두루마리를 보는 순간 당설련은 흠칫했다.
“바로 조금 전에 도착했습니다.”
수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당설련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것은 그녀 자신이 직접 친필로 적은, 특별히 신경을 써서 보냈던 초청장의 정식 답신이었기 때문이다.
“……설마.”
“네.”
수하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동창의 책임자이자 권력의 핵심 실세인 박 공공께서 보낸 것입니다.”
슥.
두루마리를 뻗는 당설련은 하얀 손을 살짝 떨리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저 이름만 알려도 성공이라 생각했던 박 공공에게서 회신이 오다니, 아무리 당문의 눈꽃이라 해도 가슴이 뛸 수밖에 없었다.
당설련은 즉시 두루마리의 끈을 풀었다.
파라락.
두루마리는 그리 길지 않았다.
날아갈 듯한 필체로 적힌 문장들을 당설련은 눈을 빛내며 읽어 내려갔다.
그녀의 아름다운 눈썹이 살짝 일그러진 것은 금방이었다.
“전권 대리인?”
생소한 단어를 중얼거린 그녀는 다시 두루마리의 내용을 살폈다.
그러나 다른 의도는 읽을 수 없었다.
격식을 차린 장황한 미사여구를 빼면 애초에 내용 자체는 지극히 간단했기 때문이다.
달칵.
당설련은 두루마리를 내려놓았다.
수하들의 시선을 알아차린 그녀는 짧게 말했다.
“박 공공은 못 와. 하지만 그의 전권 대리인이 올 거야.”
그 단어는 수하들에게도 생소했다.
하지만 생각에 잠긴 당설련에게 감히 되묻지는 못했다.
당설련은 길고 하얀 손가락으로 서탁을 두드렸다.
톡, 톡.
‘그런데 왜 안찰사나 포정사, 도지휘사가 그런 결정을 한 거지?’
권력 실세의 전권 대리인이 중앙에서 내려오면 지방 대관들은 맨발로 달려나가 영접하는 것이 보통 아닌가?
특히 그 전권 대리인이 참석하는 곳이라면 너도나도 얼굴을 들이밀것이고 말이다.
하지만 사천성 지방 대관들은, 맨발로 영접하는 거야 두고 볼 일이라 해도, 대회 참석에 대해서는 정반대의 행동을 하고 있다.
‘어쩌면.’
당설련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붉은 입술이 하얀 치아 아래에서 일그러졌다.
‘박 공공의 전권 대리인은 사신(死神)일지도 모른다는 뜻인가?’
동창과 도찰원이라면 관인들에겐 말 그대로 사신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그럴수록 더더욱 잘 보이려 할 터이다.
‘모르겠네.’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관인들, 특히 거만한 지방 대관들이 몸을 사릴 때는 분명 이유가 있다.
“흥.”
사락.
당설련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눈동자는 도전적으로 빛나고 있었다.
“어쨌든 상관없어. 조정 최고 실세의 전권 대리인이 오는 거야. 바로 이곳 태평맹에 말이야.”
동창과 도찰원을 한 손에 쥐고, 지금뿐 아니라 다음 권력의 최고 실세로 이미 공인되고 있는 박 공공이다.
그의 전권을 위임받은 사람이라면 본인 역시 중앙 정계에서 결코 비중이 작지 않을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해.”
당설련은 가느다란 미소를 흘렸다.
설령 그가 저승사자건, 혹은 야망과 권력에 불타는 효웅이건 상관없었다.
그를 반드시 자신의 편으로 만들 자신이, 당설련에게는 있었다.
아니 무조건 그렇게 해야 했다.
그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말이다.
“대회 상황을 다시 점검해야겠어.”
탁.
당설련은 탁자에 두 손을 짚고 서류들을 날카롭게 살폈다.
대회의 가장 큰 목적이 바뀌었다.
박 공공, 아니 조정의 전권 대리인 한 사람만으로도 이번 대회는 엄청난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진행 책임자들에게 중요 손님들에 대해 다시 알리고 전권 대리인을 무조건 최우선으로 대하라고 해. 특히 대회 기간엔 다들 분주하니까 절대 실수가 없도록……. 아니, 따로 전담 책임자를 지정하는 게 낫겠네.”
팔락, 팔락.
당설련은 서류를 넘기며 거침없이 말을 쏟아 냈다.
“대회장의 자리 배치도 다시 조정하고, 전권 대리인에게 참관을 권할 비무나 모임도 선별해 봐. 태평맹에 대한 이해와 호감을 높일 수 있도록 말이야. 그를 수행할 안내인은 당문의 방계 중에 총명하고 미색이 뛰어난 아가씨로 셋 정도 준비해. 아, 혹시 모르니 미소년도.”
팔락.
“내 대회 일정도 조정해 놔. 매일 그가 처음 만나는 사람과 마지막으로 보는 사람이 내가 돼야 해. 알겠어?”
“그렇게 준비하겠습니다.”
“일정과 세부 사항이 확정되는 대로 내게 보고해.”
“네, 군사님.”
당설련은 살짝 흥분되어 있었다.
그저 축하 서신 정도만 받아도 성공이라 여겼는데 박 공공은 자그마치 자신의 전권을 위임한 대리인을 보냈다.
흉인지 길인지는 알 수 없었다.
태평맹과 손을 잡겠다는 뜻일 수도 있고, 관이 무림에 직접 관여하겠다는 의미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가 태평맹과 대화를 하려 한다는 점이다.
‘그럴 수밖에. 태평맹 외에는 대안이 없으니까.’
조정은 결코 영웅맹과 손을 잡을 수 없다.
그렇다면 선택은 태평맹뿐이다.
현재의 강호 무림은 영웅맹과 태평맹의 세상이니까.
“후후훗.”
붉은 입술 사이로 웃음이 흘렀다.
당문의 눈꽃, 당문설화 당설련은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태평맹이 강호 무림의 유일한 정통 세력으로 인정되고, 당문이 진정한 천하제일문으로 우뚝 서는 날이 바로 눈앞에 다가온 것만 같았다.
***
희미한 등불이 어둠 속에서 방을 밝혔다.
글조차 읽을 수 없을 정도였지만 상관없었다.
이곳에 모여있는 자들에게 이 정도의 어두움은 아무런 장애도 되지 않았으니까.
“창룡검주가 나타났단 말이오?”
한 청년의 입에서 놀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래요.”
낭랑한 여인의 목소리가 답했다.
“바로 그 창룡검주가요.”
“오오.”
감탄의 목소리가 번져 갔다.
다들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는데, 여인은 짐짓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에요. 그는 이번 태평맹 대회에 모습을 드러낼 거예요.”
놀라움이 더욱 커져 가고, 누군가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그것을 아셨소? 그는 지금 어디 있소?”
느긋한 목소리로 여인은 답했다.
“죄송하지만 그건 아직 밝힐 수 없어요.”
“어째서요?”
“창룡검주의 뜻이에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녀의 말과 태도는 창룡검주와 은밀한 교감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에 충분했다.
아니, 그건 사실이었다.
그녀는 아무도 모르던 창룡검주의 행방과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까지 알고 있었으니까.
“……그가 우리의 회합에 대해 알고 있소?”
“그가 무어라 하였소?”
“지난번 준위의 일은 알고 있더이까?”
여기저기서 목소리들이 튀어나왔다.
그러나 여인은 빙긋 웃었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않을까요?”
무슨 의미냐는 듯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여인은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중요한 건 창룡검주가 모습을 드러냈다는 점이에요. 이 사실이 우리의 회합에 어떤 영향을 가져올지, 그 점을 생각해야 하지 않겠어요?”
“어떤 영향이라니…….”
의아한 듯 한 청년이 말했다.
“생각할 게 뭐가 있소? 창룡검주의 이름은 현재 영웅맹에 맞서는 상징과도 같으니, 당연히 우리의 회합도 힘을 얻게 되지 않겠소?”
“그 상징성은.”
살짝 한숨을 내쉬며 여인이 말했다.
“우리가 만든 것이지요. 비록 창룡검주는 그의 명호일지 몰라도, 창룡지회는 우리의 것이에요. 그렇지 않나요?”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 역시 소문에 편승한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들의 활동 덕분에 그 소문이 더욱 커졌음은 부인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소저의 말은 우리가 주도권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오?”
“물론이에요.”
여인은 단호하게 말했다.
“태평맹 내에서 우리와 뜻을 함께하겠다는 젊은이들은 이전보다 훨씬 많아졌어요. 당문과 제갈세가의 전횡에 분노하는 이들도 아주 많이 늘었지요.”
그녀는 거침없이 말을 이었다.
“장강은 어떤가요? 영웅맹에 맞설 자는 창룡검주뿐이라는 소문이 천하에 파다해요. 누가 이 상황을 만들어 냈지요?”
여인은 가늘게 웃었다.
“바로 우리예요. 우리 창룡지회가 지금의 이 상황을 이루어 냈어요. 대의가 우리에게 있고, 하늘의 뜻이 이 회합에 있다는 증거이지요.”
아름다운 그녀의 눈동자가 빛났다.
“그러니 천하를 움직이는 것은 반드시 우리여야 해요. 상대가 비록 창룡검주라 해도 변하는 것은 없어요.”
그녀의 말은, 적어도 이곳에 있는 이들에게는 한 점 거짓 없는 진실이었다.
“소저의 말씀이 참으로 옳소.”
누군가 나지막이 말했다.
“허나 창룡검주 역시 태평맹에 대해서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는 않을 것이오. 태평맹은 어찌 보면 무림맹에 대한 배신이니까.”
무림맹을 불태운 사람은 혈공자 문왕이되, 무림맹이라는 조직 자체를 붕괴시킨 것은 사실상 태평맹의 창설이다.
창룡검주 운현은 무림맹을 세운 신승의 사제이니 당연히 태평맹을 좋게 볼 리가 없었다.
“그러니 우리의 정체를 밝히고 뜻을 함께할 것을 청하는 것이 어떻소? 창룡검주가 함께한다면 우리는 대단한 명분을 얻을 수 있을 것이오.”
‘신승의 사제’가 가진 명분은 대단히 크다.
그것은 곧 신승이 세운 무림맹의 적통이라는 의미나 다름없었다.
회합에 불과한 창룡지회가, 적어도 명분에 있어서는 태평맹을 압도하게 되는 것이다.
“대협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예요.”
여인이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허나 지금이 적절한 때인가에 대해서는, 조금 의문이 드는군요.”
말을 꺼냈던 청년이 의아한 눈빛으로 물었다.
“어째서요?”
“첫째, 창룡검주는 우리 회합의 중요성을 아직 모르고 있어요.”
차분한 목소리로 여인은 말을 이었다.
“그에게는 소림이 있고 또한 모용세가가 있어요. 비록 의기가 넘친다고는 하나 아직은 회합에 불과한 우리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할지는, 잘 모르겠더군요.”
그 말에 반론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창룡검주와 친밀한 교감을 나눈 사람은 오직 그녀뿐이니까.
“둘째로, 우리의 정체를 밝히는 것은 아무리 창룡검주에게라 해도 위험해요. 태평맹이 그와 대립할 것이 분명한 이상 당분간은 오히려 거리를 두는 것이 나아요. 지금 우리의 회합이 드러났다가는 대사를 그르치고 말 거예요.”
자신의 말에 귀 기울이는 사람들을 슬쩍 돌아보며, 여인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마지막으로, 시간은 여전히 우리 편이에요. 태평맹 대외 정책이 변하지 않고 당문의 전횡이 계속되면 결국 태평맹 내부에서도 불만이 터져 나올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그저…….”
하얀 손을 살짝 쥐며 그녀는 말했다.
“손을 뻗어 잡기만 하면 돼요. 태평맹의 주요 요직은 우리가 장악하게 되고, 창룡지회의 뜻은 강호 무림을 덮게 되겠지요.”
그녀의 말은 참으로 달콤하게 들렸다.
하지만 그만큼 조급함도 컸다.
“지금도 우리와 뜻을 같이하겠다는 이들은 많소. 대체 언제까지 더 기다리자는 것이오?”
여인은 방긋 웃었다.
“길지는 않아요. 하지만 아직은 아니에요. 어설픈 시도는 오히려 적을 대비케 만들 뿐이죠.”
또 다른 청년이 조심스레 말했다.
“대회가 끝나면 당문의 독주가 고착화될지도 모르오. 신중한 것은 좋으나 자칫 때를 놓치게 되지는 않겠소?”
“말씀드렸듯이 시간은 우리 편이에요.”
여인은 부드러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당설련은 다른 문파들의 자존심을 너무 우습게 보고 있어요. 비록 현실적인 문제로 태평맹을 떠날 수는 없다지만, 대놓고 군림하려는 당문의 행태를 가만히 두고 볼 문파는 없어요. 결국 이번 대회는 태평맹 내부의 불만을 심화시킬 것이고 상대적 박탈감은 더욱 커지겠지요. 바로 그때가, 우리가 전면에 나설 때예요.”
살며시 미소 지으며 그녀는 말했다.
“그 후에는 마땅히 영웅맹을 벌해야겠지요. 그러면 창룡검주께서도 기꺼이 우리의 선봉이 되어 주시지 않겠어요?”
“과연, 과연!”
누군가 감탄을 터트리며 말했다.
“소저의 지혜가 이토록 뛰어나니 과연 빙설총명이라 아니할 수 없소. 당설련이 눈꽃이라 하나 어찌 소저에게 비하겠소이까?”
빙설총명은 눈처럼 차갑고 얼음처럼 투명한 지혜라는 뜻이다.
또한 그 말은 그녀의 미모를 한껏 추켜세우는 표현이기도 했다.
“과찬의 말씀이세요.”
배시시 웃으며 여인은 대답했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발그레 상기되어 있었다.
“이제 결론은 난 것 같소.”
진지한 목소리로 다른 청년이 말했다.
“대의가 우리에게 있고 빙설총명의 지혜 또한 우리와 함께하니, 강호의 무너진 도의를 일으켜 세울 날도 머지않았소!”
여인의 목소리가 기다렸다는 듯 그 뒤를 이었다.
“또한 가증스러운 당문의 위선을 벗겨내고 무림의 진정한 정통 세력으로 설 날도 곧 머지않았어요.”
그들은 동시에 서로의 시선을 마주쳤다.
그리고 격앙된 음성으로 외쳤다.
“창룡지회를 위하여!”
소리를 높이는 그들의 눈빛은 어둠 속에서도 맹렬하게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