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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303화 (303/530)
  • 303화. 양귀비의 연못

    운현은 모용미에게 그간 있었던 일들을 간단히 이야기해 주었다.

    모용미는 놀라기도, 기뻐하기도 했다.

    독고랑의 장례를 치렀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그랬군요.”

    그녀는 진심으로 슬퍼했다.

    그 모습이 운현에게는 너무나 고마웠다.

    소림을 찾았던 이야기를 했을 때, 모용미는 나지막이 말했다.

    “신승께서 열반에 드셨다는 건 저희도 알고 있었어요.”

    작은 한숨을 쉬고 모용미는 말을 이었다.

    “아마 태평맹 문파들은 모두 알고 있을 거예요. 하지만 아무도 말하지는 않아요. 태평맹은 아예 무림맹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행동하거든요.”

    왜 태평맹이 그러는지 운현은 알 수 있었다.

    무림맹을 언급하는 순간 당연히 찾아올 책임을 철저히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자박, 자박.

    모용미가 조금 주저하다가 물었다.

    “감찰어사시라면, 관인이 되기로 하신 건가요?”

    운현은 이미 그녀에게 북경에서 있었던 일을 말해 주었다.

    물론 황태자나 박 공공과 말했던 중요한 기밀들은 제외한 채였다.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운현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답했다.

    “하지만 와불 선사님의 말씀처럼, 저도 제 길을 가야만 하겠지요.”

    모호한 대답이었지만 모용미에게는 충분했다.

    예전에도 그러했듯이 운현은 여전히 운 학사이며 창룡검주인 것이다.

    남이 뭐라든 자신의 길을 가는.

    “아, 혹시 태평맹에 대해 제가 알아 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까?”

    문득 생각난 듯 운현이 물었다.

    모용미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정작 저희도 많은 것을 알지는 못해요. 당문은 대단히 폐쇄적어서 심지어 제갈세가조차 잘 모르는 것으로 알아요.”

    ‘제갈세가…….’

    운현은 문득 제갈세가의 가주, 군자검 제갈명이 떠올랐다.

    범상치 않은 옥패까지 내어주던 군자검 제갈명은 과연 운현을 어떻게 대할까?

    “그나마 저희와 남해검문은 상황이 나은 편이에요. 혁련세가와 공손세가, 단목세가는 현상 유지도 어렵다고 하더군요. 결국 태평맹은 온전히 당문의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모용미는 이전의 총명하고 신중한 눈빛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그 모습이 운현은 보기 좋았다.

    “아참, 상아나 모용진 대협은 어떻습니까? 관일검 대협께서도 잘 지내시지요?”

    모용미는 배시시 웃었다.

    “상아는 늘 똑같아요. 운 학사님 이야기를 들으면 아주 기뻐할 거예요. 할아버지와 오라버니도 잘 있고요.”

    “지금은 아니더라도 반드시 찾아뵙겠습니다. 먼저 안부를 전해 주세요.”

    “네, 그럴게요.”

    환하게 웃으며 모용미가 말했다.

    바로 그때였다.

    자박.

    “운 서기님?”

    또 다른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운현과 모용미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곳에서 발랄한 분위기의 낯익은 아가씨를 발견했다.

    바로 남해검문의 황보선혜였다.

    “정말 운 서기님이셨군요!”

    탓.

    놀란 표정으로 말한 그녀는 즉시 운현을 향해 달려왔다.

    “아, 황보 소…….”

    운현이 인사를 하려는데, 단숨에 다가온 그녀는 그대로 운현을 끌어 안아 버렸다.

    팍.

    “헉!”

    운현이 놀라 소리를 지르고 모용미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황보선혜는 아랑곳없었다.

    그녀는 아예 운현의 가슴에 얼굴을 묻어 버렸다.

    “무사하셨군요. 진짜로 무사하셨어요!”

    “저, 저기 소저!”

    운현이 다급하게 말했지만 황보선혜는 놓지 않았다.

    아담한 외모와 달리 성숙한 몸매를 가진 그녀가 달라붙으니 운현은 당혹스럽기 그지 없었다.

    “철혈사왕에게서 저희를 구해 주신 이후, 도무지 소식을 알 수 없어서 얼마나 가슴을 조였는지 몰라요. 흑흑.”

    황보선혜는 어깨를 들썩였다.

    그 말이 운현을 차분하게 만들었다.

    자신을 이렇게 생각해 주었다니 고마운 일이 아닌가?

    “……황보 소저.”

    “네?”

    황보선혜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귀여운 눈동자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조금 진정하시지요.”

    슬그머니 황보선혜를 밀어내며 운현이 말했다.

    황보선혜는 화들짝 놀라 떨어졌다.

    “어머, 죄송해요. 너무 반가워서 그만…….”

    그녀는 살짝 얼굴을 붉히며 옷소매로 눈물을 찍어 냈다.

    그리고 그제야 알아차렸다는 듯, 모용미를 보았다.

    “아, 모용 소저께서도 계셨군요.”

    방긋 웃으며 황보선혜가 말했다.

    “네. 황보 소저.”

    하지만 모용미는 순수하게 반가워 할 수가 없었다.

    지금 황보선혜의 눈빛은 분명히 모용미를 경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아가씨의 눈빛이 가진 의미를 알아차린 사람은 또 있었다.

    “뭐야? 여기서도 또야?”

    진예림은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운현이 창룡검주인 것을 안 이후, 진예림은 광주에서 본 그의 모습들은 착각이거나 오해라고 여겼다.

    독고 대협의 스승이자 의형인, 그 엄청난 검을 보여 주던 창룡검주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지금까지 보아 온 운현은 조용한 학자의 풍모를 지닌 절대강자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런데 두 아가씨에게 양다리를 걸친 듯한 저런 모습이라니!

    심지어 여인들이 운현을 대하는 태도는 보통 친밀한 것이 아니지 않는가?

    “이야, 역시 운 대인쯤 되는 분은 아름다운 아가씨들이 줄을 서네요.”

    옆에 선 담소하가 진예림의 속도 모르고 감탄했다.

    언뜻 보면 양손의 꽃이니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진예림은 한숨을 쉬었다.

    “……저 사람을 정말 믿어도 되는 걸까?”

    물론 이미 운현을 따르기로 정한 뜻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미심쩍은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광주의 말썽도 여자 때문이 아니었던가?

    “그놈의 영웅호색…….”

    진예림은 짜증 난다는 듯 중얼거렸다.

    감탄하는 담소하와 미심쩍은 진예림의 시선 가운데, 운현은 여전히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

    운현은 모용미, 황보선혜와 함께 화청지 주변을 잠시 거닐었다.

    황보선혜가 ‘생명의 은인’이라며 운현을 놓아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평상시라면 자리를 비켰을 모용미도 이때만은 운현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결국 운현은 두 아가씨와 함께 다시 한번 산책을 해야 했다.

    “아, 그러니까 두 분은 여기서 우연히 만난거군요?”

    황보선혜가 밝게 웃으며 말했다.

    “네, 그렇습니다.”

    “이전부터 서로 소식을 주고받던 것도 아니고요.”

    “물론이지요.”

    쓸데없는 오해를 부를까 싶어 운현은 적극적으로 해명했다.

    하지만 모용미의 표정은 살짝 어두워지고 있었다.

    “그랬군요.”

    환하게 웃던 황보선혜는 문득 운현을 올려다보았다.

    “그날 이후, 많은 사람들이 운 서기님을 찾았답니다. 저희도 백방으로 알아보았지만 아무도 운 서기님의 행방을 모르더군요. 저는 너무나 걱정이 돼서…….”

    감정이 복받쳐 오르는 듯 황보선혜는 입술을 깨물었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그녀의 모습에 운현은 가슴이 뭉클해졌다.

    “미안합니다. 저는…….”

    “아뇨. 괜찮아요. 이렇게 무사하시니 정말 다행이에요.”

    황보선혜는 운현을 쳐다보며 웃었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여전했다.

    “저, 혹시…….”

    살짝 얼굴을 붉히며 황보선혜가 말했다.

    “오라버니라 불러도 될까요?”

    “네?”

    운현은 깜짝 놀랐다.

    하지만 황보선혜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사락.

    황보선혜가 고개를 숙이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흙바닥을 개의치 않고 운현에게 절을 하고 있는 것이다.

    “소, 소저!”

    “오라버니께서는 저와 남해검문의 은인이세요.”

    고개를 든 황보선혜는 운현을 똑바로 올려다보며 말했다.

    “저는 오라버니께서 제 목숨을 구해 주신 것을 결코 잊지 않겠어요.”

    사실 그녀의 말은 옳았다.

    운현이 철혈사왕 염중부를 막아선 덕분에 남해검문과 혁련세가는 항주를 탈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염중부는 운현을 뒤쫓아온 것인 데다가, 본래 그녀를 구하려던 것이 아니었던 운현은 이런 과분한 감사를 받을 수 없었다.

    “아닙니다, 황보 소저. 저는 단지…….”

    사락.

    황보선혜는 가만히 일어섰다.

    그리고 결연한 눈빛으로 말했다.

    “고마워요. 오라버니. 제 진심을 부디 잊지 말아 주세요.”

    그녀의 눈동자는 촉촉이 젖어 있었다.

    운현은 짐짓 헛기침을 했다.

    황보선혜는 예쁘고 귀여운 데다 운현을 매우 살갑게 대한다.

    그러나 운현은 그녀가 조금 거북했다.

    아마도 그건 아가씨와는 담을 쌓은 서생 시절을 보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볼게요.”

    황보선혜는 운현에게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모용미에게도 가볍게 인사를 한 후, 그대로 몸을 돌렸다.

    사박.

    황보선혜가 한 발을 옮겼을 때였다.

    “소저.”

    운현이 그녀를 불렀다.

    황보선혜는 가만히 돌아섰다.

    정중한 목소리로 운현은 말했다.

    “소저의 뜻은 깊이 간직하겠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번 태평맹 무림용봉지회에 참석할 예정입니다.”

    황보선혜의 눈동자가 빛났다.

    “그때까지 저에 대한 것은 비밀로 해 주시기 바랍니다.”

    “네.”

    빙긋 웃으며 황보선혜는 말했다.

    “사람들이 아주 많이 놀라겠네요.”

    그녀의 말은 의미심장했다.

    모용미도 그건 전적으로 동감이었다.

    운현은 신승의 사제다.

    그가 나타나면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운현에게서 신승의 그림자를, 무림맹을 떠올리게 되리라.

    “그럼 곧 다시 뵈어요.”

    환하게 웃으며 황보선혜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대로 멀어져 갔다.

    사박, 사박.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모용미는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저도 가야겠어요.”

    모용미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운현에게 말했다.

    “아, 그러시겠습니까?”

    운현은 아쉬운 기색이 역력했다.

    그 모습에 모용미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잠시 우울해졌던 기분도 사라지고, 다시금 반가움이 가슴을 채우고 있었다.

    “네, 금방 다시 볼 테니까요.”

    그녀의 모습은 환하고 부드러웠다.

    운현의 입가에도 저절로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

    사천성 성도, 태평맹 총단.

    대외 총괄군사 당설련은 집무실에서 대회 진행 상황을 점검하고 있었다.

    “준비 상황은?”

    “모든 것이 예정대로입니다.”

    수하가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대회에 필요한 물자의 반입과 반출 역시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으며 각종 시설 역시 모든 준비가 마쳤습니다.”

    “소속 세가들은 언제 오지?”

    “대회 시작 삼 일에서 오 일 전에 도착할 예정이라고 알려 왔습니다. 허나 첩보에 의하면 서안과 한중에 일부 세가들이 머무르고 있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흥.”

    당설련은 비웃음을 흘렸다.

    그들의 생각이야 뻔하다.

    아직도 자신들이 주인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초청 인사들의 참석 현황은?”

    문사 차림의 또 다른 수하가 대답했다.

    “대부분의 문파가 참가 의사를 밝혔습니다. 다만 병을 이유로 몇 문파가 불참을 알려 왔습니다.”

    바스락.

    당설련은 가볍게 서류를 살펴보고는 눈을 들었다.

    참가하지 않은 문파들에 대한 대처는 대회 이후라도 상관없었다.

    “허나 상단들은 예외없이 전부 참석합니다. 천하삼대상단과 각 성의 내로라하는 상단은 물론이고, 초청받지 못한 상단들까지 이곳 성도에 몰려들고 있다고 합니다.”

    당설련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 그래야지.”

    돈에 민감한 상단들은 오히려 재빠르게 분위기를 파악하고 있었다.

    초청받지 못했더라도 어떻게든 얼굴을 비쳐야 하는 곳이, 바로 이번 태평맹 무림용봉지회라는 것을 말이다.

    “관에서는?”

    수하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초청장을 보낸 대부분의 지방 대관들이 축하의 인사를 전해 왔으나 참석 의사를 밝힌 곳은 없습니다. 게다가 본래 참석하기로 했던 사천성 대관들마저 긴급한 공무를 이유로 축하 서신으로 대신하겠다고…….”

    “뭐?”

    당설련의 눈꼬리가 날카롭게 올라갔다.

    다른 지방 대관들의 불참은 어차피 예상된 일이었다.

    그들이 자신의 지역을 떠나 이곳 사천까지 올 리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천성의 대관들까지 못 온다는 건 의외였다.

    “그게 무슨 소리야? 다른 데도 아니고 이곳 사천성의 지방 대관들이 못 오겠다고 했단 말이야?”

    “그렇습니다.”

    수하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했다.

    당설련은 입술을 깨물었다.

    사천성의 지방 대관인 안찰사, 포정사, 도지휘사야말로 누구보다 당문과 유착 관계가 깊은 자들이다.

    태평맹의 일에 발 벗고 나섰으면 나섰지 이렇게 모른 척할 리는 없다.

    “이유는?”

    싸늘한 눈빛으로 당설련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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