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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302화 (302/530)

302화. 하늘 위에 노니는 용

다 쓰러져 가는 초막 앞에서 운현은 와불을 만났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눈을 들어 보니 어느새 와불이 운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굽은 허리와 검버섯 가득한 손, 그리고 주름진 얼굴.

그는 신승의 스승이자 운현에게 심상수련을 가르쳐 준 바로 그 와불 선사였다.

“……선사님.”

운현이 멍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냐, 이놈아.”

퉁명스러운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운현의 눈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선사님.”

운현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쯧쯧, 다 큰 놈이 눈물은……. 나이가 아깝구나, 나이가.”

구박하듯 와불이 말했다.

그러나 와불의 목소리 역시 흔들리고 있었다.

“선사님…….”

운현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이미 와불은 알고 있으련만 그에게 이 사실을 알리는 것이 자신의 책임인 것만 같았다.

“……고얀 놈이지.”

와불이 고개를 들어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가에 반짝이는 것은 뜨거운 눈물이었다.

“스승보다 먼저 날개를 펴고 훨훨 날아가다니, 참으로 고얀 놈이야.”

툭.

운현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자신이 초막 앞에 무릎을 꿇고 있다는 것도 그제야 알아차렸다.

슥.

와불은 운현을 내려다보았다.

“삶과 죽음은 그저 이편과 저편에 불과할 뿐이니라. 그러니 너는 너무 마음 아파할 것 없다. 불영 그놈은 끝까지 하고 싶은 대로 살다가 갔으니까.”

사락.

앙상하고 주름진 와불의 손이 운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고 보니 그놈도 제법 괜찮은 인생을 살지 않았느냐? 갔다고 슬퍼해 줄 사람도 있고. 클클클.”

“선사님…….”

울음인지 웃음인지 알 수 없는 소리를 흘리던 와불은 문득 고개를 들어 조관 일행을 보았다.

“왔으니 차라도 한잔들 하고 가시게. 이놈도 일으켜서 평상 위에 앉히고.”

와불은 몸을 돌려 초막 안으로 들어갔다.

“……대인.”

조관이 나지막이 말했지만 운현은 일어서지 못했다.

바람이 끝없이 가슴속으로 불어들고 있었다.

***

찻잔을 쥔 와불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새벽에 물을 길러 나간 어린 승려 하나가 산신령을 만났다고 소리치며 뛰어왔다더구나.”

와불은 피식 헛웃음을 흘렸다.

“차라리 제석천이나 사천왕을 만났다고 할 것이지, 불자 주제에 산신령은 무슨……. 아무튼 선풍도골의 그 노인이 불영의 시신을 전해 주고 사라졌단다. 아무것도, 아무 말도 남기지 않은 채 말이다.”

선풍도골의 노인이라면 혹시 독선일까?

아니면 운현이 모르는 그 누군가일까?

알 수가 없었다.

“소림의 전례를 따라 화장을 하고 내가 직접 사리를 수습했다. 뼛가루는 숭산 사방에 뿌렸고.”

“……그렇군요.”

운현은 나지막이 말했다.

신승 불영은 죽었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일이지만 사실이었다.

“이제 가라.”

와불이 조용히 말했다.

“불영이 자신의 길을 갔으니 너도 네 길을 가야 할 것 아니냐?”

운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결국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네, 선사님.”

와불은 고개를 끄덕였다.

운현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와불을 향해 큰절을 올렸다.

“……부디, 건강하십시오.”

“건강 못 해도 오래는 살 테니 걱정 마라. 네놈 손자가 혼인하는 것 정도는 너끈히 볼 테니까. 클클클.”

언제 침울했냐는 듯 와불은 장난스럽게 웃었다.

운현 역시 미소를 머금었다.

눈에는 여전히 눈물 자국이 뚜렷했지만 말이다.

사락.

“아, 그리고.”

운현이 일어서는데 문득 와불이 말했다.

“북해의 내력보다는 네 검이 더 소중한 것이니라. 잊지 말도록 해라.”

“네?”

자신도 모르게 운현이 반문하자 와불은 와락 눈살을 찌푸렸다.

“내가 이미 말했잖느냐. 네놈의 수련검은 하늘 위에 노니는 용과 같아서 도무지 그 실체를 알 수 없다고. 천하에 이 와불이 모르겠다고 한 것이 많은 줄 아느냐?”

짜증을 내며 와불이 말했다.

“그러니 착각하지도 말고 헷갈리지도 마라. 네가 봐야 할 건 오로지 네 검뿐이니라. 알겠느냐?”

운현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명심하겠습니다. 선사님.”

“그래, 그럼 가라.”

짐짓 아무렇지 않은 듯 와불이 말했다.

운현은 조용히 예를 표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벅.

조관 일행과 함께 운현은 와불의 초막을 떠났다.

되돌아본 운현의 눈에 들어온 모습은 여전히 차를 홀짝이는 와불의 뒷모습뿐이었다.

유난히 작아 보이는 그 어깨에, 어쩐지 운현은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소림을 떠나며 운현은 작은 삼베 주머니 하나를 꺼내 들었다.

신승이 건네주었던, 이 땅에선 구경도 할 수 없다는 찻잎이었다.

자신이 열반에 들면 아무 강에라도 뿌려 달라 한 것이지만 운현은 숭산을 떠나며 그 찻잎을 꺼냈다.

파라락.

한 줄기 바람이 손에 쥔 마른 찻잎을 이리저리 휘날렸다.

찻잎은 곧 메마른 낙엽과 풀잎 사이로 모습을 감췄다.

그러나 이곳을 지나는 산짐승들은 그 향에 귀를 쫑긋 세울 것이고 혹 쉬어 가는 참배객들은 문득 풍겨 오는 향에 고개를 갸웃할 터이다.

결국은 찻잎들도 흙 사이에서 썩어 가겠지만, 그 향이 숭산을 떠돌았다는 사실만은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다.

비록 그것이 찰나에 지나지 않는 순간이라 해도.

사락.

손바닥에 남은 마지막 찻잎마저 바람에 날려 보내고, 운현은 조용히 소림을 떠났다.

***

낙양을 떠난 운현 일행은 서안에 도착했다.

장안이라고도 불렸던 유서 깊은 이 도시는 사천의 관문인 한중으로 통하는 곳이기도 했다.

운현 일행은 서안에서 잠시 머무르게 되었다.

감찰어사 조관의 제안 때문이었다.

“우선 서안에서 태평맹의 정보를 수집하고 상황을 파악하는 편이 나을 듯합니다.”

조관은 말을 이었다.

“이곳은 사천에 접해 있으니 안찰사사에 태평맹에 대한 정보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도찰원과 연락하는 것도 이곳이 낫습니다.”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여기서 대비를 하고 사천으로 들어가기로 하지요.”

“그럼 저와 항 제가 안찰사와 포정사를 만나고 오겠습니다. 대인께서는 진 매, 담 제와 함께 서안이라도 한번 둘러보시지요.”

“알겠습니다.”

조관의 배려에 운현은 감사를 표했다.

담소하나 진예림도 반짝이는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사실 북경부터 이곳 서안까지 거의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달려왔기 때문이다.

“그럼, 한번 돌아볼까요?”

“넵!”

운현의 말에 담소하가 힘차게 답했다.

그렇게 세 사람은 오랜만에 여유로운 시간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조관은 물론 심지어 운현도 알지 못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태평맹 총단에 일찍 도착하기를 싫어하는, 당문의 계략이나 이국적인 성도의 분위기를 꺼려 한 다른 세가들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또한 대부분의 세가들은 영웅맹 지부가 있는 중경보다는, 그 전에 장강을 건너 관도를 따라 서안을 거쳐 한중으로 들어가는 것을 선택했다.

덕분에 지금 이곳 서안에는 태평맹 칠대세가 중 당문과 제갈세가를 제외한 다섯 세가가 몰려 있는 아주 기이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

서안의 거리.

운현은 담소하, 진예림과 함께 산책을 하고 있었다.

“와, 역시 서안이네요. 오래된 도시 느낌이 확 나요.”

담소하가 이리저리 눈을 돌리며 말했다.

“난 그냥 그저 그런데? 건물도 낡고, 쓸데없이 크기만 하고.”

“누님.”

한숨을 쉬며 담소하가 말했다.

“아는 만큼 보이는 거죠. 저 낡은 벽에 붙은 문양이 서역풍인 건, 서역 문물이 활발하게 들어왔다는 뜻이라고요.”

운현도 살짝 놀랐다.

그저 특이한 문양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그런 의미가 있다니.

하지만 진예림은 물러서지 않았다.

“모르니까 보이는 것도 있거든? 저 낡은 문양에 아무도 신경 안 쓰는 건 이제 서역 교류는 한물갔다는 뜻 아냐.”

운현은 다시금 놀랐다.

서안이 영화를 누리던 것은 과거다.

그걸 진예림은 정확히 지적해 낸 것이다.

담소하와 진예림이 다시 으르렁거리려는 것을 보고 운현이 얼른 말했다.

“담 제, 혹시 가 볼 만한 데가 없을까?”

“있어요!”

담소하가 얼른 답했다.

“서안이면 화청지죠! 바로 양귀비의 연못 말이에요.”

“양귀비?”

진예림도 흥미를 보였다.

“네. 미녀로 소문난 그 양귀비요. 그녀가 미모를 유지한 비결이 바로 화청지래요. 거기 온천수가 피부에 아주 끝내준다고…….”

“그래? 그러면 가자.”

진예림은 짐짓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

그러나 즉각적인 그 반응은 운현과 담소하의 웃음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뭐 해요? 빨리 와요.”

어느새 저만큼 앞서간 진예림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운현은 담소하와 함께 느긋하게 발을 옮겼다.

***

화청지는 서안 시내에서 제법 먼 곳에 있었다.

멀다고 진예림이 살짝 짜증을 내기도 했지만, 화청지에 도착했을 때는 모두들 감탄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름다운 여산(驪山)의 풍광과, 날아 올라갈 듯 아름답게 지어진 화청궁의 모습이 너무나 잘 어울렸기 때문이다.

“멋지군.”

운현이 감탄하며 말했다.

자금성처럼 장엄한 느낌은 없었지만, 오래된 건축 양식들은 옛스럽고 아담한 멋이 있었다.

담소하는 으쓱한 표정으로 말했다.

“화청궁의 역사는 무려 수천 년이나 돼요. 제일 유명한 것이 바로 천하제일 미녀인 양귀비죠. 뭐, 그녀 탓에 나라는 망했지만요.”

“나라가 망한 게 여자 잘못이야? 왕이 멍청한 거지.”

진예림이 툭 던지듯 말했다.

“자그마치 나라의 명운이 걸린 일인데, 상황이야 어떻든 최고 책임자가 전적으로 잘못한 거지. 미색에 홀렸느니, 간신배에 속았느니……. 전부 치졸한 변명이잖아.”

운현은 진예림의 말에 공감했다.

물론 국정에 소홀할 정도로 양귀비가 아름다운 탓도 있었을 테지만, 인간적인 면모라는 이유로 면죄부를 주는 것도 옳지는 않다.

“헹, 그런 건 여자들이 더 심하잖아요.”

담소하 역시 이대로 물러날 사람이 아니었다.

“사랑 이야기라면 무조건 헬렐레해서는……. 별것도 아닌 이야기에 눈물부터 글썽이며 ‘아, 정말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야’라고 홀랑 넘어가잖아요.”

“난 아니거든?”

“저도 아니거든요?”

“뭐가 아니라는 거야!”

이젠 의미조차 알 수 없는 말싸움이 되어 버린 두 사람의 다툼을 바라보며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바로 그때였다.

“아!”

젊은 아가씨의 목소리에 운현은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눈을 크게 부릅떴다.

‘아.’

운현 역시 놀라움으로 말을 잇지 못했다.

수수하지만 정갈한 옷과 부드러운 머릿결, 차분하고 성숙한 느낌의 아름다운 아가씨가 놀란 눈으로 운현을 쳐다보고 있었다.

“……운 학사님.”

그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아름다운 그녀는 바로 모용세가의 아가씨, 모용미였다.

“모용 소저…….”

운현도 말을 잇지 못했다.

순간 모용미의 아름다운 눈동자에 왈칵 눈물이 맺혔다.

“소저!”

운현은 깜짝 놀라 모용미에게 다가갔다.

“……무사하셨군요.”

눈가에 맺힌 눈물을 아랑곳 않은 채, 모용미가 말했다.

“다행이에요. 정말, 다행이에요.”

모용미는 눈물을 감추려는 듯 고개를 숙였다.

떨리는 그녀의 어깨가 너무나도 가련해 보였지만 운현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 진작 찾아뵈었어야 했는데…….”

“아니에요.”

모용미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젖은 눈으로 운현을 바라보았다.

평소 조용하고 차분한 그녀가 지금은 격동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무사하신 것만으로도 너무나 고마워요. 정말로…….”

감정을 이기지 못한 듯 모용미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소저.”

운현의 목소리에 모용미는 얼른 소매로 눈물을 찍어 냈다.

그녀는 애써 웃음을 머금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간 어떻게 지내셨나요? 혹시 다치신 곳은 없어요?”

아직도 젖어 있는 모용미의 눈동자는 운현을 향한 그녀의 마음을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었다.

“네. 저는 괜찮습니다. 소저는요?”

모용미는 웃었다.

“저야 늘 괜찮아요.”

하지만 그녀의 눈가에 반짝이는 눈물은 숨길 수가 없었다.

“……잠시 걸을까요? 소저.”

“네.”

운현은 발걸음을 옮겼다.

그 옆을 모용미가 조용히 따랐다.

담소하와 진예림 역시 대강 분위기를 파악하고 멀찍이 서서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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