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1화. 적이 없는 사람
“으음.”
염중부는 눈살을 찌푸렸다.
사실 장강에 상단이 너무 많은 건 상관없었다.
힘으로 쫓아내고 박살 내면 그만이니까.
가장 큰 문제는 일대상인에게 보내는 상납금의 규모가 어마어마해서 총단의 자금 상황이 넉넉지 않다는 점에 있었다.
대상단을 구성할 만한 능력을 가진 인재나 조직력이 없는 것도 치명적이었다.
자금이 부족하고 사람이 없는데 대상단 설립이 제대로 될 리가 없다.
눈앞에 엄청난 규모의 돈이 왔다 갔다 하는데도 지켜봐야만 하는 염중부의 속은 그야말로 타들어 가고 있었다.
“특히 요즘은 관의 감시가 강화되어 함부로 움직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항주 혈사의 여파가…….”
수하는 말을 흐렸다.
장강이 영웅맹의 세상이라지만 어디까지나 음지의 이야기다.
관리를 매수하고 협박을 해도 결국 영웅맹은 관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었다.
대상단이 반드시 필요한 또 다른 이유였다.
“어쨌든 대상단 설립을 위해 계속 노력하도록. 언제고 반드시 이루어야 할 일이니까.”
“명심하겠습니다.”
수하는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슥.
염중부가 손짓하자 수하는 뒷걸음질로 천천히 물러났다.
그가 나가고 홀로 남은 염중부는 혀를 찼다.
“쯧. 하나같이 무능한 것들뿐이라니…….”
자신은 영웅맹의 맹주다.
장강이 그의 세상이며 강호 무림을 양분하는 거대 세력 영웅맹이 그의 것이다.
그러나 정작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었다.
관을 무시하고 마음대로 활보할 수도 없고, 일대상인의 명을 거역할 수는 더더욱 없었다.
겉보기엔 화려하지만 자금 사정은 빠듯하고 조직 내에선 온갖 문제가 터져 나오는데 그걸 해결할 사람은 염중부 자신뿐이다.
애초에 산채와 수로채로 시작한 영웅맹이니 누구를 믿고 일을 맡길 수 있을까?
“으음.”
염중주는 신음을 흘렸다.
무엇보다 마음에 걸리는 것은 창룡검주 운현의 경고다.
지난번 독대로 얼마간의 여지를 얻어 낸 셈이지만 어떻게든 빠른 시일 내에 살 길을 찾아야 했다.
비록 그것이 운현과 일대상인 사이의 위험한 줄타기라 해도 말이다.
“젠장!”
쾅.
그의 주먹 아래서 고급스러운 팔걸이가 소리를 냈다.
영웅맹의 맹주, 철혈사왕 염중부는 불안과 초조로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
북경 외곽의 한 객잔.
운현은 감찰어사 조관과 그 일행을 다시 만났다.
“다시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대인.”
조관이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커다란 체격의 항장익과 작은 담소하, 그리고 진예림도 함께 고개를 숙였다.
운현은 웃으며 답례했다.
“저도 반갑습니다. 다들 앉으시지요.”
감찰어사 조관과 항장익, 담소하, 진예림은 자리에 앉았다.
다들 상기된 표정이었지만 진예림은 유독 뿌듯한 표정이었다.
운현은 그들을 보며 말했다.
“이미 들으셨겠지만 앞으로 함께 직무를 수행하게 되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조관이 두 손을 모아 예를 표하며 말했다.
“아닙니다. 저희야말로 대인과 함께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무엇이든 명하여 주십시오.”
운현은 미소를 지었다.
“사실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항주에서 이미 겪으셨듯 말입니다.”
조관 일행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철혈사왕 염중부와 운현의 대결은 지금도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그 엄청난 기세와 압도적인 검격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허나 이는 천하의 안녕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다소의 위험은 있을 것이나 저 또한 여러분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으니 너무 걱정 마시기 바랍니다.”
“중책을 수행함에 있어 어찌 목숨을 아끼겠습니까? 대인께서는…….”
“아니오. 아끼셔야 합니다.”
운현은 단호하게 말했다.
“저는 여러분과 함께 정보를 공유하고 판단을 나누며, 의견을 묻고 각자의 관점을 이야기할 것입니다. 이 중책을 수행함에 있어 여러분은 제게 가장 가깝고 신뢰하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빙긋 웃으며 운현은 말했다.
“그러니 목숨을 아끼십시오. 아시겠지요?”
조관은 물론 항장익도, 담소하도, 진예림도 잠시 말이 없었다.
슥.
감찰어사 조관이 정중하게 손을 모아 예를 표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대인.”
“감사합니다.”
운현은 부드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럼 우선 현재의 상황에 대해 나눠 볼까요?”
“네.”
먼저 조관이 준비한 여러 서류들과 함께 이야기를 시작했다.
생각보다 도찰원이 가진 정보는 빈약했다.
최근 영웅맹이 상단을 세우려고 한다거나, 태평맹이 무리한 확장을 계속해 오고 있다는 내용 정도가 다였다.
특히 태평맹에 대해서는 감찰대상이 아니어서 정보 자체가 별로 없었다.
“음.”
잠시 생각하던 운현은 조관과 일행을 바라보았다.
“조금 긴 이야기가 되겠습니다만…….”
운현은 일대상인에 대한 것들을 말하기 시작했다.
항주 혈사 당시 나타났던 흑창기마대와 단궁대, 실혼대, 그리고 황천대에 대해서 말해 주었고, 일대상인이 거느리는 삼태상과 혈공자 문왕, 암천무제와 철혈사왕 염중부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심지어 북해에까지 손을 뻗었던 것은 물론 신녹림과 장강수로채 연합의 배후에 암천무제, 혹은 문왕이 있다는 것도 말해 주었다.
운현과 독고랑 외에는 아무도 모르던 이야기들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운현은 일대상인의 목적을 밝혔다.
“역모…….”
감찰어사 조관이 굳은 표정으로 되뇌었다.
다른 일행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관에 몸담고 있는 그들은 그 단어가 주는 의미와 심각함을 잘 알고 있었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제 추측입니다만…….”
한숨을 쉰 운현은 말을 이었다.
“더욱 심각한 것은 그가 아직 모든 힘을 드러낸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무엇을 감추고 있는지, 무엇을 꾸미고 있는지 우리는 여전히 모르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조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서 황실이 운현을 특별감찰어사로 임명하고 전권을 맡겼는지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정도면 심각한 위협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니 앞으로는 태평맹이나 영웅맹에 한정하지 말고, 각 지역 문파들이나 상단의 움직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조관은 즉시 운현의 명을 받들었다.
“전국에 순행 중인 감찰어사에게 명을 내리고 각 지역 안찰사사와 포정사사에도 협조를 요청하도록 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태평맹 무림용봉지회에 대해서도 들으셨지요?”
“네. 성도까지 대강의 여정을 이미 계획해 놓았습니다.”
사천성 성도는 먼 곳이다.
조관은 이미 전체적인 여정을 준비해 놓고 있었다.
“혹시 개봉과 낙양을 들를 수 있겠습니까?”
잠시 생각하던 조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오래 머무르시지만 않는다면 문제는 없습니다. 혹시 무슨 이유인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네, 물론이지요.”
흔쾌히 대답한 운현은 말을 이었다.
“개봉 외곽에는 모용세가가 있습니다. 저와 무척 가까운 분들이시고 태평맹에 속한 세가이기도 하니 중요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박 공공의 초청이 아니었다면 항주 다음으로 모용세가를 찾아갔을 것이다.
“어, 그럼 모용세가도 태평맹으로 가지 않을까요?”
담소하가 문득 말했다.
모용세가는 태평맹 칠대세가 중 한 곳이다.
당연히 이번 용봉지회에 참석할 것이고, 날짜를 따져 보면 그때쯤엔 이미 출발했어도 이상하지 않다.
“그, 그렇군요. 담 공.”
운현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편하게 말씀하셔도 돼요. 그리고 낙양은요?”
담소하가 다시 물었다.
“소림에 가려고 하는데…….”
“그건 괜찮겠네요. 뭐하려고 가시는지 물어도 돼요?”
“소하 너, 대인께 너무 무례한 거 아냐?”
진예림이 얼른 끼어들었다.
운현의 표정이 살짝 굳은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운현이 말했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다들 알아야 하니까요.”
잠시 침묵하던 운현은 담소하에게 답했다.
“신승께서 무사하신지 확인하려 하네.”
신승이라는 명호는 조관도 들은 바가 있었다.
“무림맹의 그 신승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따지자면 제게는 사형이 되십니다. 그리고…… 제 목숨을 구해 주신 분이시지요.”
한 번도 운현은 그를 사형이라 부른 적이 없다.
당하기도 많이 당했고 그의 심계에 휘말려 늘 골탕을 먹기도 했다.
그러나 신승 불영은 언제나 진심으로 운현을 대했다.
무림맹이 무너지는 그 순간까지도, 신승은 운현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던졌다.
반면 진예림은 또 다른 의미로 놀랄 수밖에 없었다.
“신승의 사제라고요? 그럼 대체 배분이…….”
생각만 해도 까마득할 정도였다.
“어, 높은 거예요?”
담소하가 물었다.
진예림은 한숨을 쉬었다.
“높아. 배분이 절대적인 건 아니지만, 운 대인보다 위라고 자처할 사람은 없을걸?”
담소하도 놀란 표정을 했다.
“우와. 황실에선 귀인이고, 무림에선 최고로 높고, 검으로는 영웅맹 맹주를 꺾었으니 말 그대로 천하무적이네요.”
“담 제!”
항장익이 얼른 말했지만 이미 늦었다.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군.”
“천하에서 가장 강한 사람인 거요?”
“아니.”
운현은 말했다.
“적이 없는 사람.”
조관과 항장익, 진예림의 눈동자에 이채가 스쳤다.
담소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아, 그리고 누님이 갑자기 대인 편을 들던데 왜 그런거예요? 항주에선 짜증 나는 사람이라고 했었거든요.”
“내, 내가 언제!”
진예림의 표정이 확 일그러졌다.
운현은 빙긋 웃었다.
“그건 진 매에게 물어봐야 할 것 같은데? 담 제.”
담소하를 노려보는 진예림의 표정은 붉으락푸르락하고 있었다.
덕분에 일행을 향한 운현의 호칭도 자연스레 정해지고 있었다.
다음 날, 운현과 조관 일행은 북경을 떠났다.
소림을 들러 사천성 성도로 향하는 머나먼 여정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
운현 일행은 황하를 거슬러 낙양으로 향했다.
감찰어사의 신분인지라 모두가 평상복이나 간단한 무복을 입었고, 이전처럼 큰 마차나 호위가 뒤따르는 일은 없었다.
운현에게는 오히려 그것이 좋았다.
여러 날의 뱃길 끝에 낙양에 도착한 일행은 대도시 낙양에서 하룻밤을 묵고 숭산 소림사로 출발했다.
담소하는 ‘아직도 발밑이 흔들리는 것 같아요’라며 불평을 했지만 그래도 별탈 없이 소림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산문에서는 조금 말썽이 있었다.
소림은 무인들의 출입을 금하고 있었고, 운현의 속가제자 신분에 대해 산문을 지키는 무승들이 미심쩍어 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계율원 원주 전각의 도움으로 운현 일행은 간신히 소림사에 들어설 수 있었다.
그리고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다, 다비식이라니요?”
다비식은 불가의 장례 의식이다.
운현의 반문에 앞서 걷던 전각은 발길을 멈추고 운현을 돌아보았다.
“……설마 아직 모르셨단 말입니까?”
전각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운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전각은 운현이 정말로 몰랐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지막이 한숨을 흘린 전각은 조용히 합장하며 허탈한 표정으로 말했다.
“……불영 선사님은 이미 열반에 드셨습니다.”
어쩌면 운현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소림으로 가 보라던 염중부의 눈빛은 결코 호의가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도저히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 신승이, 천하를 손에 두고 희롱하던 신승이 죽다니?
“바깥에는 알리지 아니하였으나 이미 다비식을 치른 지 오래입니다.”
전각은 나지막이 불호를 외웠다.
“그럴, 수가…….”
운현은 순간 휘청했다.
“대인!”
조관과 항장익, 진예림이 급히 운현을 붙잡으려 했다.
그러나 운현은 가까스로 몸을 다잡았다.
“아니, 괜찮습니다.”
조관 일행에게 한 손을 들어 보이며 운현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아요.”
그러나 운현의 목소리는 전혀 괜찮지 않았다.
뻗었던 손을 거두지 못한 진예림이 입술을 깨무는데, 운현은 나지막이 한숨을 쉬며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신승께서…….’
독고랑이 죽고 신승 불영마저 떠났다.
가슴을 파고드는 차가운 바람에 운현은 어깨를 떨었다.
마치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