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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300화 (300/530)

300화. 그게 사파다

만옹 인태상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는 눈을 꽉 감은 채 곧 떨어질 일대상인의 분노를 감수하고 있었다.

“그가 나타났다고?”

묵직한 목소리로 일대상인이 물었다.

인태상은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네, 그렇습니다.”

“어떻던가?”

“……네?”

의외의 물음에 인태상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일대상인의 눈동자에는 호기심이 여실히 드러나 있었다.

“자네 말대로 그가 내력을 잃었던가?”

“그, 그렇지 않았습니다.”

인태상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그놈은 이전보다……, 더 괴물이 되어 있었습니다.”

“후후.”

일대상인은 웃음을 흘렸다.

고개를 숙인 인태상을 내려다보던 일대상인이 문득 물었다.

“그가 문서의 주인이라 생각하나?”

인태상은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나 잠깐 보았던 운현의 서늘한 눈빛이 떠오르자 인태상은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아니라면, 아마 그 누구도 아닐 것입니다.”

그 엄청난 기세를 떠올리며 인태상은 가늘게 몸을 떨었다.

그때 느껴졌던 서늘한 한기가 아직도 등을 내달리는 듯했다.

“오랜만이군.”

인태상을 내려다보며 일대상인은 말했다.

“자네가 내 앞에서 다른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 말일세.”

인태상은 흠칫했다.

쿵.

그는 즉시 바닥에 이마를 찧었다.

쿵, 쿵.

두 번의 소리가 더해진 후에야 인태상은 고개를 들었다.

그의 주름진 이마엔 피가 선명하게 번져 가고 있었다.

“불충한 소신을 벌해 주시옵소서!”

“아니, 그럴 필요는 없네.”

스륵.

일대상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정도가 아니면 문서의 주인이자 하늘이 정한 내 대적자라 할 수 없을 테니까.”

사락, 사락.

왼쪽으로 걸어간 일대상인은 뒷짐을 진 채 한 손을 뻗어 난초를 매만졌다.

세심하게 가꾼 난초가 그의 손에서 윤기를 뽐내고 있었다.

인태상이 입술을 깨물고는 말했다.

“……명하시면 그를 이곳으로 대령하겠나이다.”

일대상인이 웃었다.

“자네들의 힘으로는 무리일세.”

그는 시선조차 돌리지 않았다.

그러나 인태상은 포기하기 않았다.

“허나 방법은 많습니다. 그자는 온갖 인연에 얽매여 있으니…….”

“됐네.”

일대상인은 단호하게 말했다.

“조급한 마음으로 어찌 대사를 이루겠나? 하늘이 이미 대역천의 궤를 내게 보였으니 모든 것은 순리대로 될 것일세.”

인태상은 잠시 주저했으나 곧 고개를 숙였다.

“네, 알겠습니다.”

운현을 이대로 놓아두는 것이 마음에 걸렸으나 일대상인의 뜻이 정해진 이상 절대 거역할 수는 없다.

“저, 그리고…….”

인태상은 주저하며 말을 이었다.

“도련님은 언제까지 저렇게 놓아두실 예정이신지요?”

난초를 바라보던 일대상인의 표정이 굳었다.

인태상은 속으로 아차 싶었지만 뱉어 낸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슥.

일대상인은 몸을 돌려 인태상을 바라보았다.

“……당분간은 그대로 놓아두게.”

문왕은 현재 일종의 근신 상태다.

외부 활동은 물론 부여된 권한들도 대부분 정지된 상태다.

“허나 도련님은…….”

“자네들의 걱정은 잘 알고 있네.”

언제 그랬냐는 듯 일대상인은 지극히 무심한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허나 천명은 억지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닐세. 스스로 깨닫기 전에는 모든 것이 헛수고일 뿐이니, 지금은 그대로 놓아두게. 적어도 당분간은.”

이렇게까지 말한 것은 일대상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배려였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인태상은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일대상인은 그저 담담한 눈빛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

만옹 인태상이 일대상인과 대화하던 그 시간, 혈공자라 불리는 문왕은 분노에 몸을 떨고 있었다.

“또 그놈이!”

콰앙.

화려한 탁자가 요란한 소리를 냈다.

문왕의 희고 고운 손이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지만 분노는 그 고통조차 삼켜 버렸다.

“기껏 환관 한 놈조차 죽이지 못하다니! 그래 놓고 무슨 만옹이야! 무슨 태상이냐고!”

악을 쓰며 소리쳤지만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으득.

문왕은 이를 갈았다.

비록 조정에 있던 문왕의 세력은 뿌리 뽑혔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박 공공을 죽이는 것은, 개인적인 복수이자 새로운 기반을 다지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인태상이 나섰음에도 박 공공을 죽이는 것은 실패했다.

바로 창룡검주 운현 때문에.

“놈…….”

운현을 떠올리며 문왕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생각해 보면 북해의 일을 망친 사람도 운현이었다.

운현 탓에 북해는 일대상인의 손을 벗어났고 무림맹과 협약까지 맺어 버렸다.

항주 혈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무림맹을 무너뜨리고 문왕이 기뻐하는 동안, 운현은 북경에서 조정에 있던 문왕의 동조자들을 숙청해 버렸다.

여러 해를 들여 구축해 왔던 조정의 기반이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이다.

완벽한 승리는 굴욕으로 변했다.

자신을 향한 시선이 모두 비웃음처럼 느껴졌고, 수군대는 말들은 험담으로만 느껴졌다.

무엇보다 자신의 무능함이 암천무제와 비교될 것을 생각하면 말 그대로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하지만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일대상인이 문왕의 모든 권한을 중지시키고 근신을 명했기 때문이다.

“이게 무슨 꼴이야!”

와장창.

오색 과일이 담긴 은쟁반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날아갔다.

“창룡검주, 창룡검주!”

악을 쓰던 문왕은 곧 목소리를 낮췄다.

“아니, 아니야. 이렇게 흥분해선 안 돼. 이대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아. 이대로는.”

문왕은 손톱을 깨물며 서성거렸다.

“놈을 잡아야 해. 내 손으로 그 놈의 목을 쥐어야 해. 그런데 어떻게 잡지? 어떻게? 어떻게?”

창룡검주를 잡을 수 있다면, 문서의 주인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을 수 있다면 상황은 단번에 바뀐다.

“어떻게?”

그러나 방법이 없었다.

자신은 이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손발이 묶이고 주어졌던 권한은 막혀 버렸다.

인태상에게 떼를 쓰듯 부탁했던 일까지 틀어져 버린 이 상황에서, 대체 어떻게 창룡검주를 잡는단 말인가?

“으윽.”

문왕은 고통스러운 듯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몸을 감싸 안았다.

어린아이처럼 웅크리며 문왕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 모습을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항주 영웅맹 맹주전.

철혈사왕 염중부는 눈살을 찌푸렸다.

“무림용봉지회?”

“네, 그렇습니다.”

문사 차림의 수하는 서류가 놓인 작은 서반을 올렸다.

염중부는 서류를 들고 건성으로 훑어보았다.

“흥. 뻔한 짓을…….”

서류를 툭 던지며 염중부가 말했다.

“이 기회에 자신들이 강호 무림의 유일한 정통 세력임을 과시하려는 것이겠군.”

“그렇습니다.”

“규모는?”

“공식 행사만 보름이 넘는 대규모 회합입니다. 각 지역의 주요 문파들은 물론 커다란 상단들과 관부의 유력자들에게도 초청장을 보냈다고 합니다.”

염중부의 입가에 비웃음이 걸렸다.

“아주 노골적이군. 상단은 물론 관부까지라니.”

수하는 염중부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그냥 놔둬도 될까요?”

이대로라면 태평맹의 세가 너무 커질지도 모른다.

수하의 염려는 당연했다.

그러나 염중부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놔두지 않으면? 가서 싸움이라도 걸라고? 뭐, 그것도 좋겠군. 싸우지 못해서 안달난 놈들이 지부마다 넘쳐나니까.”

최근 염중부의 골칫거리는 바로 그것이었다.

녹림과 수로채라는 태생적 한계 탓인지 각 지부마다 말썽이 끊이지 않았던 것이다.

멀쩡한 가문을 박살 내는 건 물론이고 심지어 협력 문파나 상단에까지 시비를 거는 놈들도 있었다.

“태평맹이 장강을 건드리지 않는다면 신경 쓰지 마라. 어차피 날뛰는 건 당문이나 제갈세가 정도다.”

“허나 이런 분위기라면 각 지부의 활동이 위축될지도 모릅니다.”

수하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천하에 태평맹만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문제다.

염중부는 생각에 잠겼다.

“특히 사천과 가까운 곳의 지부들은 사뭇 긴장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서는 우리도 무슨 대회 같은 것을 여는 것이…….”

“그럼 해.”

“네?”

수하가 의아한 눈빛으로 반문했다.

그러나 염중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을 이었다.

“태평맹이 회합을 갖는 동안 우리도 각 지부별로 대회를 열라고 전해라. 그들이 보름 동안 한다니, 우리도 날짜를 맞춰서 보름 정도 하면 좋겠지.”

“갑자기 어떤 대회를…….”

“아무거나.”

“네?”

자신도 모르게 수하가 반문했다.

염중부는 대번에 눈살을 찌푸렸다.

“뭐든 하라고. 연회를 열어서 술독에 빠져 살든, 아니면 피터지게 칼질을 하든 상관없으니까 무조건 크고 요란하게 해. 모든 지부에서 전부 다.”

“그, 그러면 지출이 엄청나게 커집니다. 현재 총단에 있는 자금으로는 도저히 감당이…….”

“누가 총단의 자금을 쓰라고 했나?”

염중부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필요한 돈은 각 지부에서 알아서 조달하라고 해.”

“허, 허나 지부에 그런 여력은…….”

장강에 산재한 각 지부의 수입은 최소한의 자금을 제외하고는 전부 항주의 영웅맹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철혈사왕 염중부가 돈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철저하게 직접 관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갑자기 대회를 열 자금이 지부에 있을리 없었다.

“웃기는 소리.”

그러나 염중부는 코웃음을 쳤다.

“지부장들이 자기 호주머니만 털어도 그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을 거다. 그놈들이 따로 수입을 챙기고 있다는 걸 내가 모를 것 같나?”

염중부는 사파의 생리를 너무나 잘 알았다.

그러나 정작 이 명을 전해야 하는 수하는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분명 엄청난 반발과 불평이 쏟아질 텐데 그걸 어떻게 감당한단 말인가?

“쯧.”

염중부는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각 지부에 전해라. 태평맹 무림대회 기간 동안 각 지부도 대회를 열되, 대회의 내용과 자금 조달 방법은 각 지부장의 판단에 맡기며 이 건에 관한 보고는 필요 없다고 말이다.”

수하는 눈을 껌뻑였다.

“그러면 알아서들 할 거다. 상단들에 강제로 할당을 시키든, 아니면 적당한 문파 하나를 작살내든.”

‘아.’

수하는 그제야 깨달았다.

이건 무언가를 강제로 시키는 것이 아니라 각 지부 마음대로 하도록 풀어주는 것이다.

“허, 허나 그러면…….”

“그러면, 뭐? 맹의 이름에 먹칠을 하게 될까 걱정되나? 아니면 다른 문파들과의 관계가 악화될까 봐? 혹은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을까 염려가 되나?”

수하는 대답하지 못했다.

사실 그렇게 될 것이 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철혈사왕 염중부는 피식 웃었다.

“우리는 사파야. 그게 무슨 말인지 아나?”

염중부의 입가에 완연한 비웃음이 걸렸다.

“원하는 것이 있으면 힘으로 빼앗고 거슬리는 놈이 있으면 짓밟는다. 명분 같은 건 필요도 없고 위선을 떨 이유도 없다. 사람들의 평판? 평판이 좋으면 칼이 안 들어가기라도 하던가?”

염중부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어차피 사는 게 다 그런 거다. 애써 미화할 필요도 없고 감출 이유도 없어. 그게 영웅맹이다. 그게, 사파라는 말의 의미야.”

조소를 머금던 염중부는 수하를 향해 물었다.

“장강 대상단의 설립은 어떻게 되고 있나?”

“자, 장강 대상단은…….”

수하는 얼른 서류를 뒤적였다.

“각 지역 상단의 반발이 만만치가 않습니다. 더구나 장강의 상권은 온갖 상단들로 이미 포화 상태여서, 새롭게 대상단을 구성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습니다.”

장강 유역의 상권 규모는 대단히 크다.

통행료나 보호비 명목으로 들어오는 돈도 결코 작지 않았지만 염중부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장강 상권 전체를 독점할 대상단을 원했다.

하지만 그것은 말처럼 쉽지 않았다.

“게다가 총단의 자금 상황도 좋지 않은 데다 마땅한 인재 역시 절대적으로 부족한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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