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9화. 특별 감찰어사
운현을 바라보며 박 공공은 말했다.
“운 학사님께서는 그저 손을 들어 지목해 주시면 됩니다. 누가 참역의 수괴이며 그 동조자인지 말입니다.”
박 공공은 거침없이 말을 이었다.
“그리하면 동창과 금의위가 즉시 그들을 도륙할 것이며, 백만 황군이 저들을 짓밟아 풀 한 포기 남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 목소리는 서늘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운현은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지금 박 공공의 말은 황실의 심정을 한치의 과장없이 표현한 것일테니까.
“……알겠네.”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 기꺼이 이 일을 받아들이겠네.”
“감사합니다.”
슥.
박 공공은 머리가 땅에 닿을 듯 허리를 굽혔다.
그 모습을 호 공자는 흡족한 듯 바라보고 있었다.
“자, 그럼 다들 일어서도록 하지.”
호 공자가 일어섰다.
운현과 박 공공 역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위의 안전을 확인한 연후에 움직이심이…….”
“괜찮네.”
박 공공의 말을 호 공자가 끊었다.
운현을 향해 빙긋 웃으며 호 공자는 말했다.
“운 학사의 곁이 가장 안전한 곳이라 하였으니, 함께 움직이면 될 것 아닌가?”
“오, 과연 그러하군요.”
박 공공 역시 웃으며 말했다.
“크흠.”
운현은 짐짓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아까는 몰랐는데 남의 입을 통해 들으니 부끄럽기 그지없다.
이래서 다들 과거의 일들은 숨기려고 하나 보다.
“그럼, 가시지요. 후훗.”
박 공공이 가벼운 걸음으로 앞장섰다.
호 공자가 그 뒤를 따르고, 운현은 조용히 맨 끝을 지켰다.
***
노인의 안내를 따라 세 사람은 저택을 떠났다.
높은 담과 담 사이의 은밀한 통로, 언뜻 벽처럼 보이는 문들, 그리고 안내인까지 바뀌며 생소한 저택들을 여럿 가로지른 후에야 그들은 한적한 숲에 이르렀다.
그곳에는 완전무장한 수백의 군사들이 이미 철통같은 경계를 서고 있었다.
“만나서 즐거웠네.”
호 공자가 빙긋 웃으며 운현에게 말했다.
“다음에는 조금 더 큰 집에서 보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운현은 공손히 예를 표했다.
호 공자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돌렸다.
“아, 그리고.”
몇 걸음 걷던 호 공자가 운현을 돌아보며 말했다.
“자금성에 온 것을 환영하네.”
그것은 언뜻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러나 운현은 호 공자의 말뜻을 충분히 알아들었다.
슥.
대답 대신 운현은 공손히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호 공자는 빙긋 웃고는 몸을 돌려 멀어져갔다.
그가 마차에 오르자 수백의 관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벅, 저벅.
자욱한 흙먼지와 함께 호 공자가 숲을 떠났다.
그래도 아직 백여 명의 관군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늘 이렇게 번잡한 것은 아니랍니다.”
변명하듯 박 공공이 말했다.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네.”
이런 철통같은 경계 태세가 된 것은 운현이 서찰을 통해 경고했기 때문이리라.
슥.
박 공공이 손짓하자 상급 무관 한 사람이 붉은 비단으로 덮힌 함 같은 것을 가져왔다.
사락.
비단이 걷히고 그리 크지 않은 고급스러운 목함이 모습을 드러냈다.
박 공공은 목함을 열었다.
달칵.
목함 안에 있는 것는 붉은 비단 두루마리와 정교하게 조각된 신분패, 그리고 한 권의 서책이었다.
“운 학사님께 특별 감찰어사의 직분을 내리신다는 황상 폐하의 성지(聖旨)입니다. 보고도 필요 없고 상급 기관의 감독도 받지 않으며 언제 어디서든 초법적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아주 특별한 지위지요.”
두루마리를 내려다보며 가늘게 웃던 박 공공이 문득 말했다.
“아, 물론 당장 쓰실 정도의 전표와 알아 두시면 좋을 듯한 것들을 기록한 서책도 있습니다. 제가 한 자 한 자 심혈을 기울여 적었지요.”
“자네가?”
운현은 의아한 표정으로 박 공공을 바라보았다.
문장이든 서찰이든 그가 글을 쓰는 걸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니예. 제가 직접요. 호호.”
박 공공은 부끄러운 듯 소매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그러고 보니 이 웃음도 정말 오랜만이다.
탁.
박 공공은 목함을 닫았다.
무관에게서 건네받은 목함을, 박 공공은 공손히 운현에게 내밀었다.
사락.
“감축드립니다.”
운현은 잠시 그 함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곧, 고개를 끄덕이며 목함을 받아 들었다.
“고맙네.”
목함은 하나도 무겁지 않았다.
그러나 그에 담긴 의미는 그렇지 않았다.
“그리고 이것은.”
박 공공은 무관에게 또 한 가지를 건네받았다.
그것은 바로 검이었다.
“황태자 전하께서 내리시는 것이옵니다.”
붉은 비단 수실과 화려한 금빛 문양으로 장식된 칼집은 이 검이 사뭇 범상치 않음을 보여 주고 있었다.
“용린(龍鱗)이라 하온데, 운 학사님의 명호에 어울린다 여기셨나 봅니다.”
용린이라면 용의 비늘이라는 뜻이다.
운현이 창룡검주임을 염두에 둔 것이리라.
사락.
운현은 박 공공에게서 검을 받아 들었다.
“뭐, 딱히 맘에 안 드시면 팔아 버리셔도 되고요. 설마 전하쯤 되시는 분이 줬던 걸 다시 내놓으라 하시겠습니까? 후후훗.”
사뭇 즐거운 듯 박 공공이 말했다.
황태자가 직접 하사한 검을 팔다니, 목숨이 아깝지 않고서야 누가 그런 짓을 하랴?
하지만 박 공공이라면 정말로 그럴 것도 같아서 운현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박 공공은 무관에게 눈짓했다.
무관은 즉시 예를 표하고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운 학사님.”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박 공공이 말했다.
“제가 이 일에 천하의 운명이 달려 있다고 한 뜻을 아시겠습니까?”
“만의 하나 이 일이 잘못되면.”
운현이 나지막이 답했다.
“다음 보위의 주인이 바뀔 수도 있다는 뜻 아닌가?”
박 공공은 빙긋 웃었다.
“그렇습니다. 역시 운 학사님이시군요.”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던 박 공공은 말을 이었다.
“동창은 결코 함부로 움직여서는 안 되는 곳입니다. 만일 동창이 전면에 나섰는데 제대로 된 결과를 얻지 못한다면, 그 책임은 결코 한두 사람의 목숨으로 대신할 수 없지요.”
그것은 운현에게 주어진 권한을 절대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양날의 칼과 같았다.
자칫하면 운현 자신과 박 공공, 그리고 황태자마저 위태롭게 할 수 있는 날카로운 칼 말이다.
“본래는 남은 역도들과 그에 동조한 문파들을 뿌리 뽑고자 시작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감히 황궁의 관리를 해하려 하고 참역까지 도모한다면 이는 결코 좌시할 수 없는 일이지요.”
운현은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나는 오히려 내 말만으로 이런 결정을 내렸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네.”
일대상인이니, 참역이니 해도 아직은 운현의 말뿐이다.
운현은 오히려 자신의 말을 무조건 믿는 박 환관이나 황태자의 결정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들이 운현에게 이토록 무한한 신뢰를 보내는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황궁은 복마전입니다.”
박 공공의 말은 너무나도 당연했다.
마(魔)가 엎드려 있는 곳, 언제 그 잔혹한 본성이 튀어나올지 알 수 없는 곳이 바로 황궁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을 의심해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습니다. 냉혹하게 사실을 직시하되 믿기로 결정한 사람은 끝까지 믿는다. 그것이 바로 전하와 제가 자금성에서 살아남은 방법입니다. 그래야 진짜 사람을 얻을 수 있으니까요.”
운현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말은 쉽다. 그러나 그것을 실제로 행하는 것은 지극히 어렵다.
어쩌면 천운이라는 단어는 운현이 아니라 박 공공에게 써야 하는 것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말이다.
“대단하군.”
운현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끝까지 믿는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닐 터인데.”
“물론 누구냐에 따라 많이 다르지요. 전하도, 저도 사람을 상당히 가리거든요. 후훗.”
웃던 박 공공이 문득 말했다.
“……알고 계셨지요?”
“알고 있었네.”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생각하던 것과는 많이 다른 분이시더군.”
호 공자가 누구인지 운현은 처음부터 알 수 있었다.
호군(濠君)이라 함은 호씨 집안의 자제라는 뜻이지만 호(濠) 지역 사람이라는 뜻도 된다.
그리고 현재의 황실이 시작된 지역이 바로 호주(濠州)다.
“아마 전하께서도 그리 생각하시겠지요.”
뜬구름 잡는 것 같았던 그 문답은 아마도 운현을 알기 위한 것이었으리라.
그리고 결정한 것이다. 운현을 믿기로 말이다.
마지막에 전한 환영 인사는 그런 의미였을 것이다.
“그래도 상당히 마음에 들어 하시던걸요? 그렇게 웃고 놀라시던 모습은 아주 오랜만이었으니까요.”
사실 황태자는 운현을 만나기 이전에 이미 마음을 정한 듯 보였다.
아마도 그 결정에는 박 공공이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리라.
“나도 놀랐네. 갑자기 전하께서 나오실 줄은 상상도 못 했으니까.”
“제가 황실의 예격으로 모시라 했다는 말을 못 들으셨습니까?”
즐거운 듯 웃으며 박 공공이 말했다.
“사사로이 손님을 청하며 어찌 황실의 예격을 운운할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원하셨으니 그리한 것이지요. 후후후.”
운현은 헛웃음을 흘렸다.
감찰어사 조관을 통해 그런 말을 듣기는 했다.
그러나 그저 예를 다해 모시라는 뜻으로만 알았지, 정말로 황실의 예격이 적용되는 자리였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나저나 운 학사께서 그리도 불신에 익숙해지시다니, 꽤나 험한 곳에서 지내셨나 봅니다요. 쯧쯧.”
박 공공이 짐짓 안됐다는 듯 말했다.
운현은 헛웃음을 흘렸다.
험한 곳이라면 황궁보다 더한 곳이 어디 있으랴?
“운 학사님.”
박 공공이 가벼운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태평맹이라는 곳을 아십니까?”
“이야기만 들었네.”
“현재 조정에 가장 적극적으로 손을 뻗치는 곳이 바로 태평맹입니다. 예전 무림맹과 달리 태평맹은 조정과 관계 개선을 원하고 있습니다. 만일 운 학사님이 아니었다면 다른 대안이 없을 정도였지요.”
영웅맹과 태평맹의 세상에서, 영웅맹을 제외하면 선택은 태평맹뿐이다.
그것은 조정의 경우뿐 아니라 상단이나 다른 중소 문파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현재의 강호 무림에는 태평맹 외에 대안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번에 그들이 무림용봉지회라는 큰 회합을 연다고 하더군요.”
“용봉지회?”
“네, 그렇습니다.”
용봉지회는 운현에게도 뜻깊은 단어다.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그들은 제게 아주 정중한 초청장을 보냈습니다. 함께 보낸 예물 또한 상당한 수준이었지요. 본래라면 하급 관리라도 보내서 축하의 말을 전할 정도로요.”
바스락.
박 공공은 서찰 하나를 꺼냈다.
언뜻 보기에도 무척이나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서찰이었다.
“하지만 과연 이들을 믿어도 좋을지, 저는 판단을 내리기 힘들더군요.”
박 공공은 서찰을 팔랑팔랑 흔들며 눈살을 찌푸렸다.
태평맹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다.
그러나 조정의 입장에서는 사실 태평맹이든 영웅맹이든 크게 다르지 않았다.
비록 태평맹이 적극적으로 협조할 뜻을 밝히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선뜻 신뢰할 수는 없었다.
“하여, 특별 감찰어사의 첫 임무로는 괜찮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어떠신지요?”
“알겠네.”
운현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확인해 보도록 하지.”
박 공공 역시 웃으며 서찰을 운현에게 건넸다.
바스락.
운현은 화려한 서찰을 지긋이 내려다보았다.
태평맹에 대해서는 운현도 많은 이야기들을 들었다.
무너진 무림맹과 관련해서 미심쩍은 것들도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러므로 태평맹은 운현이 반드시 확인해야 하는 곳 중 하나라 할 수 있었다.
“아, 그리고 도와줄 사람들도 필요하실 겁니다. 이곳까지 동행했던 감찰어사가 꽤나 유능하다더군요.”
“그들이라면 좋네.”
그 제안은 이미 예상하고 있던 것이었다.
감찰어사 조관이라면 신뢰할 만했고, 운현과 염중부의 일도 알고 있으니 한결 편했다.
“힘든 일을 안겨 드려 송구합니다. 무림은 험한 곳이라 하니 부디 보중하십시오.”
박 공공은 빙긋 웃으며 눈을 빛냈다.
“다음에는 반드시 오문(午門)으로 들어오시도록 할 테니까요.”
오문은 자금성의 정문이다.
오봉루(五鳳樓)라고도 불리는 크고 화려한 오문은 황제의 권위와 자금성의 위엄을 나타내는 상징과도 같았다.
“이미 지나가 봤는데 또 그럴 필요가 있겠나?”
운현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과거의 장원급제자는 오문으로 자금성에 들어가 황제에게 직접 관직을 제수받는다.
그러므로 운현은 자금성의 오문을 들어선 적이 있었다.
“내게는 오문보다 자네가 더 소중하네. 그러니 부디 몸조심하게.”
웃으며 운현이 말했다.
박 공공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우, 운 학사님이 이런 분이 아니셨는데. 그런 느끼한 말을 이토록 뻔뻔스럽게 하시다니……. 예전의 그 순수한 학사님은 어디로 가고…….”
정말로 충격받은 듯한 표정으로 박 공공이 중얼거렸다.
그러나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제 곧 박 공공이 무어라 할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물론 농담입니다. 호호홋.”
옷소매로 입을 가리며 박 공공이 웃었다.
그건 이제껏 운현이 본 미소 중에 가장 환하고 가슴 따뜻한 미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