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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298화 (298/530)

298화. 찻잔 하나

뚱뚱한 만옹 인태상은 혀를 찼다.

“쯧, 참으로 귀찮은 일이로고.”

가늘고 긴 흰 수염을 어루만지며 인태상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지금 높은 누각 꼭대기에 앉아 있었다.

세차게 부는 바람도 아랑곳없이, 그의 시선은 주택가 한가운데 있는 아담한 건물 한 곳을 향하고 있었다.

“검옹, 이 나쁜 놈 같으니 분명 같이 도련님께 들어 놓고 혼자 튀어?”

분이 풀리지 않았다는 듯 인태상은 중얼거렸다.

“에라이, 뒈질 놈. 길가다가 콱 눈먼 검에나 맞아라.”

악담을 했지만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을 인태상은 잘 알고 있었다.

차라리 검옹을 만난 다른 사람이 검을 맞으면 몰라도 말이다.

“으이구, 이 나이에 이게 무슨 고생이람? 그렇다고 도련님 부탁을 못 들은 척할 수도 없고…….”

그가 말하는 도련님은 문왕이다.

문왕은 삼태상에게 매우 특별한 존재였다.

일대상인에게 여전히 문왕이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도 삼태상에겐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래서 더욱 거절할 수 없었다.

이번 일이 상인의 뜻과는 무관한 문왕 개인의 복수, 혹은 화풀이에 불과하다 해도 말이다.

‘젠장, 그 미친 늙은 땡중만 아니었더라도.’

늙은 땡중, 신승 탓에 인태상은 운현을 놓쳤다.

문서의 주인일지도 모르는 창룡검주를 놓친 것과, 조정에 있던 협력자들이 단번에 일소된 사실에 일대상인을 크게 실망했다.

그러니 문왕의 처지가 이처럼 곤란하게 된 데에는 인태상의 책임도 있었던 것이다.

사락.

누군가 인태상의 뒤에 모습을 나타냈다.

“확인을 마쳤습니다.”

“그래, 지금 저곳에 있는 것이 확실하냐?”

“네.”

그들은 문왕이 이번 일을 위해 보내 준 수하들이었다.

홀로 움직이는 인태상이었지만, 황궁의 출입을 감시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이 나이에 그런 일까지 하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세 사람 중 한 명은 박 공공이 틀림 없습니다. 동창의 고수로 보이는 은밀 호위가 일곱이 있으며…….”

“필요 없다.”

인태상은 수하의 말을 막았다.

“그따위 것, 상관없이 전부 박살 내 버리면 될 것 아니냐?”

“네?”

수하의 반문 따위는 인태상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크흠, 그럼 어디……..”

스륵.

인태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천천히 내력을 끌어 올렸다.

후우우욱.

뚱뚱한 인태상의 체구가 부풀어 오르고, 그의 옷자락이 강풍을 만난 듯 펄럭였다.

뒤에 있던 수하는 새파랗게 질린 표정으로 뒤로 물러섰다.

수하의 경지도 낮지 않았지만, 그조차 인태상의 기세는 감당하기 어려웠다.

“하아아아.”

인태상이 두 손을 가슴께로 모으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덜컥.

멀리 보이던 자택의 덧창이 열렸다.

순간 인태상의 눈이 크게 떠졌다.

햇살이 눈부신 듯 가늘게 눈을 뜬 그는 인태상이 결코 잊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저, 저놈!’

찰나의 순간, 수많은 생각과 계산이 인태상의 머릿속에서 교차했다.

비슷한 누군가를 착각한 것일까? 아니면 그야말로 천운일까?

덧창이 열린 건 우연한 실수였을까, 혹은 무언가를 꾸미는 계략일까?

어째서 하필이면 지금 이 순간에 얼굴을 드러낸 것일까?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분명했다.

저 멀리 보이는 운현의 눈빛은 분명 인태상 자신을 똑바로 향하고 있었다.

으득.

인태상은 마음을 굳혔다.

어차피 할 일은 하나뿐이다.

자신이 말했던 것처럼, 박살 내면 그만이다.

“하아아!”

인태상은 모든 내력을 끌어 올렸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번쩍.

덧창에서 무언가 날카롭게 빛났다.

그 순간 인태상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무엇인가 자신을 향해 엄청난 기세로 날아오고 있었다.

‘헉.’

인태상은 지체하지 않았다.

그는 즉시 두 손을 힘껏 내뻗었다.

콰앙, 쌔애애액.

폭음과 섬뜩한 소리가 들린 것은 거의 동시였다.

본래 먼저 들렸어야 할 소리가 이제야 뒤따른 것이다.

콰과과곽.

허공에서 일어난 충돌은 엄청난 충격파를 사방으로 흩뿌렸다.

인태상의 옷자락과 머리카락은 물론, 누각 지붕의 기와들마저 속절없이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수하는 즉시 몸을 낮추었지만 충격의 여파에서 안전하지는 못했다.

“큭.”

이를 악물고 수하는 신음을 흘렸다.

그리고 충격파는 곧 사라졌다.

후두드득.

기와가 떨어지고 아랫쪽에서 놀란 사람들의 소리가 들렸다.

즉시 몸을 숨겨야 했지만 수하는 그럴 수 없었다.

인태상이 여전히 누각 꼭대기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놈.”

이를 악문 채 인태상이 중얼거렸다.

지금 그의 모습은 말이 아니었다.

머리카락과 수염이 흐트러진 것은 물론이고 옷자락마저 여기저기 찢어져 있었다.

그러나 가장 놀라운 것은 바로 그의 손에 쥔 무언가의 파편이었다.

파삭.

인태상이 손에 힘을 주자 파편이 흔적조차 없이 박살 났다.

그것은 바로 찻잔 조각이었다.

운현이 날려 보낸 찻잔이, 인태상의 전력을 다한 권격을 뚫고 코앞까지 날아들었던 것이다.

“……그때보다 더한 괴물이 되었구나.”

인태상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지금도 자신을 바라보는 운현의 그 서늘한 시선을, 그리고 자신의 등을 내달리는 한기를.

‘대체 어떻게?’

알 수가 없었다.

운현의 단전은 분명 자신이 부쉈다.

설령 신의 경지에 이른 의술과 영약이라 해도 벌써 회복했을 리는 없었다.

그런데 저놈은 그때보다 더욱더 괴물이 되어 있지 않은가?

탁.

저 멀리 보이던 덧창이 닫혔다.

그리고 운현의 모습도 사라졌다.

으득.

인태상은 이를 악물었다.

그는 나지막이 말했다.

“돌아가자.”

“그, 그럴 수 없습니다. 명령은 목숨을 바쳐서라도…….”

“그렇게 해서 할 수 있었다면 벌써 했다.”

인태상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리고 지금 이 소식은, 네놈의 보잘것없는 그 목숨보다 몇 배는 더 중요하니라.”

만옹 인태상은 두 번 말하지 않았다.

휘릭.

그는 즉시 모습을 감추었다.

남아 있던 수하는 잠시 머뭇거렸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스륵.

누각 꼭대기엔 더 이상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다만 부서진 첨탑과 기와만이 이곳에서 무엇인가 일어났다는 것을 보여 줄 뿐이었다.

***

츠즈즈즈.

새하얀 서리가 운현의 발 아래로 번져 갔다.

때에 맞지 않는 서리는 박 공공과 호 공자가 앉아 있던 탁자에 이르러서야 멈췄다.

자리에서 일어나 있던 호 공자와 박 공공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탁.

운현이 덧창을 닫았다.

오후의 환한 햇살이 사라지자 사방이 어두워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눈이 적응하자 사방은 천천히 본래의 모습을 회복했다.

“후우.”

그때까지 덧창에 손을 대고 있던 운현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다.

“미안하네, 박 환관.”

쓸쓸한 미소를 머금고 운현이 말했다.

그는 곧 호 공자에게도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놀라게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공자님.”

“……아니, 아닐세.”

호 공자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그 눈빛은 곧 놀라움과 감탄으로 변했다.

“대단하군.”

그건 확실히 대단한 일이었다.

순간 운현에게서 폭발적인 기세가 일어나더니 찻잔이 섬뜩한 소리와 함께 쏘아져 나간 것이다.

그것도 운현이 가볍게 손을 움직인 것만으로.

충격파의 영향은 없었지만, 허공에서 터져 나온 폭음만은 분명히 들을 수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운 학사님.”

박 공공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운현은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괜찮네. 마침 개인적인 은원이 있던 자여서 그만……. 허나 이것으로 위험은 사라졌다네.”

그 노인의 모습을 운현이 몰라볼 수가 없었다.

삼태상 중 한 명, 만옹 인태상.

운현에게 시신을 던지고 독고랑에게 치명적인 살수를 퍼부은 자.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붙잡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인태상의 경공은 운현이 따라갈 수 없는 데다가 이곳에는 지켜야 할 사람들이 있으니까.

하지만 격동에 휩싸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덧창을 붙들고 한참이나 마음을 가라앉혀야 했다.

“내가 사과를 해야겠군.”

호 공자의 말에 운현은 고개를 돌렸다.

진지한 눈빛으로 호 공자는 말했다.

“자네 곁이 제일 안전하다 했을 때 내가 웃었으니 말일세.”

운현은 깜짝 놀랐다.

“당치도 않습니다. 어찌 그런 말씀을…….”

그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눈앞의 이 사람은 결코 잘못을 인정해서는 안 된다.

사과는 더더욱 말도 안된다.

하늘은 결코 그릇되지 않으며 그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않으니까.

“아니야.”

호 공자는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 무례를 용서하기 바라네.”

그가 고개를 숙이는 일은 없었다.

한마디 말이 전부인, 그저 그것뿐인 사과였다.

그러나 운현은 급히 고개를 숙였다.

박 공공 역시 깊숙이 머리를 조아렸다.

그것은 운현을 향한 호 공자의 신뢰를 보여 주는 것이자 파격적인 예우였다.

잠시 후, 세 사람은 다시 탁자에 마주 앉았다.

서리는 이제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바깥에 있던 자는 누구였나?”

호 공자가 물었다.

“일대상인이 거느리는 삼태상 중 한 명입니다.”

“일대상인이라면 아까 자네가 배후라 했던 자로군.”

“그렇습니다.”

“광오 한 자로군. 감히 홀로[一] 크다고[大] 자처하다니.”

하늘[天]은 예로부터 홀로 크다는 의미로 알려져 왔다.

그러므로 스스로 일대상인이라 하는 것은 하늘을 자처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운현이 나지막이 말했다.

“그는 스스로 하늘이라 여기는 것이 아니라, 하늘[天] 위에[上] 있는 자[人]라 여기는 것입니다.”

호 공자의 표정이 굳었다.

상인은 일반적으로 수련이 깊은 도인을 일컫는 칭호다.

하지만 운현은 그 이름에 다른 의미가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자가 원하는 것은…….”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아마 그 이름 그대로겠지요.”

“감히!”

쿵.

분노한 호 공자가 탁자를 내리쳤다.

“참역을 도모한단 말인가!”

호 공자는 노를 숨기지 않았다.

예로부터 천자는 하늘을 대신하여 만백성을 다스리는 자다.

그러므로 하늘 위에 서겠다는 것은 곧 참람한 반역이자 노골적인 역모에 다름 아니었다.

“박 공공.”

“네, 공자님.”

박 공공이 즉시 고개를 조아렸다.

호 공자는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태가 이러하면 동창이 나서야 하지 않겠는가?”

“공자님의 말씀이 참으로 지당합니다.”

부드러운 웃음을 지으며 박 공공이 말했다.

“다만 아직 일의 전모가 드러나지 아니하였으니 잠시 기다리심이 좋을 듯합니다. 참역의 수괴가 명백해지면 설령 백만 황군을 동원하라 하신들 어찌 주저하겠습니까?”

“그렇군.”

호 공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박 공공은 운현을 향해 몸을 돌렸다.

“운 학사님.”

진지한 눈빛으로 박 공공이 말했다.

“이것은 단지 역도들을 뿌리 뽑는 것만이 아니라 천하의 운명이 달린 문제입니다.”

그의 말은 어쩐지 의미심장했다.

“공자님과 저는 그 운명을 운 학사님께 맡기고자 합니다. 이 일을 맡아 주시겠습니까?”

운현은 박 공공의 말을 곰곰히 곱씹었다.

그리고 되물었다.

“자네는 내게 무엇을 원하는가?”

“천하의 안녕을 위협할 만한 것이라면 그 무엇이든…….”

박 공공은 한치도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그 뿌리를 도려내어 주십시오.”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내게 그럴 힘은 없네.”

“힘은 저희에게 있습니다.”

말하는 박 공공의 눈빛은 단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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