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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297화 (297/530)

297화. 제 곁이 가장 안전합니다

호 공자가 문득 운현에게 물었다.

“그러면 자네는 창룡검 같은 것은 가지고 있지 않겠군?”

운현은 살짝 당황했다.

그러나 곧, 검법이 아닌 병기에 대한 말임을 알아차렸다.

아마도 호 공자는 운현이 그런 검을 가지고 있으리라 생각한 모양이다.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가? 이거 조금 실망이로군. 혹시 대단한 보검 같은 것이라도 볼 수 있을까 했는데…….”

보검이라면 있다.

아까 노인이 받아들었던 운현의 짐과 검이 저쪽 한 켠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북해의 검, 미명이라면 충분히 보검이라 하고도 남을 것이다.

“제 검은.”

그러나 운현은 미명을 쳐다보지 않았다.

자신의 가슴을 가볍게 짚으며 운현은 말했다.

“이곳에 있습니다.”

미소를 지으며 운현은 호 공자를 바라보았다.

“공자님께서도 가지고 계신 것처럼요.”

“하하하.”

호 공자는 호탕하게 웃었다.

“그래, 과연 그러하군. 내게도 내 검이 있지.”

“그 검을.”

운현은 나지막이 말했다.

“분노나 탐욕 혹은 공포가 쥐지 않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호 공자는 빙긋 웃었다.

“걱정 말게. 내 검을 쥐는 자는 언제나 나 자신일 것이니.”

운현은 깊숙히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감히 주제넘은 말을 받아 주시니 감사합니다.”

“괜찮네.”

호 공자는 웃음을 흘렸다.

“학사들의 목이 뻣뻣하고 다른 사람 일에 참견하기 좋아한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는 바이니까. 하하하.”

슥.

호 공자는 박 공공을 돌아보았다.

“박 공공. 자네가 그리도 만나고 싶어 하기에 누군가 궁금했는데, 이런 사람이었군.”

“송구하옵니다.”

박 공공이 깊숙이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호 공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이상적인 경향이 있으나 그것도 나쁘진 않지.”

호 공자는 운현을 돌아보며 말했다.

“다만 내가 기대했던 것과는 상당히 다르지만 말일세.”

다를 수밖에 없었다.

무림의 고수를 만나 놀라운 것이라도 볼 줄 알았는데, 난데없이 학사를 만나 강론을 들은 기분일 테니 말이다.

“그대의 힘을 견식하는 것은 적당한 기회에 하기로 하고…….”

호 공자는 운현과 박 공공을 돌아보며 말했다.

“오랜만에 만났을 테니 두 사람은 좀 더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게. 나는 먼저 일어나겠네.”

달칵.

호 공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운현과 박 공공도 동시에 일어섰다.

그러나 운현이 한 말은 작별의 인사가 아니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응?”

의아한 호 공자의 반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운현은 박 공공에게 물었다.

“박 공공께서는 현재 사가(私家)에 거처하고 계시오?”

박 공공은 빙긋 웃었다.

“말씀을 낮추시지요, 운 학사님.”

“아니, 그래도 공공께 어찌…….”

“그리 아니하시면 저는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박 공공은 짐짓 뾰로통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까지 돌렸다.

운현은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본래 박 환관의 고집이 보통 아닌 데다가, 다급한 일이라 어쩔수 없었다.

“……크흠, 자네는 지금 사가에 머물고 있나?”

“아닙니다.”

박 공공은 언제 토라졌었냐는 듯 환하게 웃으며 답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제가 머물곳은 그저 황궁뿐이지요.”

권력을 잡은 환관들은 대부분 황궁을 나가 대 저택에서 생활했다.

큰 집에 처첩을 여럿 들이고 양자를 두는 것도 흔했다.

자신의 권세를 과시하고 열등감을 보상받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박 공공은 오직 황궁에서만 머물렀다.

그가 가진 권력을 생각하면 상당히 이례적인 경우라 할 수 있었다.

“그럼 혹시 황궁을 나온 적은…….”

“이번이 몇 년 만의 첫 외출이옵니다. 후훗.”

박 공공은 기쁜 듯 웃었다.

그러나 운현의 표정은 굳었다.

“공자님.”

운현은 호 공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외람된 말씀이오나, 잠시 저와 함께 계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어째선가?”

호 공자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운현은 대답했다.

“제 곁이 가장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호 공자는 잠시 멍한 표정이 되었다.

그러나 곧 웃음을 흘렸다.

“하하하. 아니, 미안하네. 본래 웃으려던 것은 아닌데……. 하하하하.”

호 공자는 웃음을 거두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자네가 내 안전까지 걱정해 줄 필요는 없다네.”

“운 학사님, 이 저택은…….”

박 공공이 무언가 말하려는데 운현이 말을 끊었다.

“일곱이 아니라 칠십 명이 지킨다 해도 안심할 수 없네, 박 공공.”

박 공공의 표정이 순간 변했다.

지금 운현은, 이곳을 은밀히 숨어서 지키는 동창 고수들의 숫자를 정확히 말했기 때문이다.

호 공자 역시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알아차렸다.

운현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이미 내 서찰을 받았겠지만 그들은 자네를 노릴 가능성이 크네. 황궁 안에 있는 자네를 그들이 감히 어찌할 수는 없겠지만, 지금이라면 충분히 노릴 만하다 여기겠지.”

운현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지금 박 공공은 은밀하게 움직이느라 호위를 극단적으로 줄인 상태였다.

“후훗.”

그러나 박 공공은 가늘게 미소를 지었다.

“그 정도의 위험은 제게 흥밋거리조차 되지 못한답니다. 그보다 훨씬 간교하고 악독한 무리들의 위협을 이미 충분히 겪었으니까요. 하지만…….”

박 공공은 호 공자를 향해 말했다.

“위험은 피해 가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겠지요.”

자신이라면야 이미 각오가 되어 있지만 자칫 호 공자가 휘말릴지도 모른다.

그런 일은 결코 없어야 했다.

“흐음.”

호 공자는 곧 결정을 내렸다.

“그러면 운 학사의 말대로 하지.”

털썩.

호 공자는 자리에 앉았다.

“감사합니다.”

운현은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세 사람은 다시 탁자에 앉았다.

“그럼,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게.”

찻잔을 들어 올리며 호 공자가 말했다.

자신은 신경 쓰지 말라는 뜻이었다.

운현은 감사의 예를 표한 후, 박 공공에게 고개를 돌렸다.

“……잘 지냈나?”

그 짧은 문안에는 많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

황궁에서 지내는 삶이 어떠한지 운현은 안다.

순간의 실수로도 목숨을 잃고, 애매히 휘말려 고초를 당할 수도 있는 곳이 바로 황궁이다.

하물며 사람 취급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환관이야 오죽하랴.

그러니 박 환관이 평범하게 잘 지냈을 리가 없다는 것을, 운현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물론 잘 지냈습니다.”

박 환관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저는 의외로 친구가 많거든요.”

그의 눈가가 촉촉이 젖어드는 것을 운현은 알 수 있었다.

차마 말로 할 수 없는 수많은 감정들이, 그 짧은 말을 통해 운현의 가슴에 전해 왔다.

“운 학사님께서야말로 잘 지내셨나요?”

“응.”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잘 지냈네.”

목소리가 살짝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운현도 눈가가 뜨거워지고 있었으니까.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운현은 그저 애매한 찻잔만 매만졌다.

“……얼마 전.”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박 공공이었다.

“저는 오랫동안 조정에 뿌리를 내려왔던 한 계파를 무너뜨렸습니다. 그들은 대대로 영예를 누려 왔으며 또한 황실과 조정에서 수많은 사건을 일으켜 온 자들이었습니다.”

박 공공은 사뭇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들의 말이면 아니 되는 일이 없었고, 그들의 허락이 아니면 아무것도 되지 못하였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참람하게도 황위 계승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였습니다.”

운현은 진지한 눈빛으로 귀를 기울였다.

“허나 그들은 자신들의 위세를 믿고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감히 역도들과 결탁하여 항주의 행정, 감찰, 군정을 모두 마비시킨 일이었지요. 심지어 항주에서는 수천의 군세가 충돌하는 일까지 있었으니, 이는 의심의 여지조차 없는 대역죄입니다.”

운현은 그 말에 동의했다.

무장한 수천의 군세가 움직이는 것을 그 어떤 나라가 좌시할 수 있을까?

더구나 그것을 조직적으로 은폐했다면 대역죄라는 말이 과연 부족하지 않았다.

“그들의 죄가 하늘에 닿았으니 어찌 그들이 목숨을 부지하겠습니까? 그들의 가문은 하루아침에 멸문당했고, 함께 영화를 누린 자들 역시 남김없이 사로잡혀 투옥되었습니다.”

박 공공은 서슬 퍼런 눈빛으로 말했다.

“과거 그들이 수많은 무고한 자들을 역모로 몰아 죽이고 내쫓은 것처럼 말입니다.”

‘아.’

운현은 알 수 있었다.

박 공공은 마침내 복수를 해내고야 만 것이다.

금군 교두 일충현을 죽게 하고 운현을 황궁에서 나가게 만든, 바로 그 계파를 말이다.

“……잘했네, 박 공공.”

가슴이 뭉클해졌다.

“마땅히 그리되어야지, 마땅히…….”

통쾌한 감정 같은 건 없었다.

그러나 운현의 마음 한구석에서는 무언가가 천천히 녹아내리고 있었다.

“이제 조정과 황실에 그들의 세력은 없습니다.”

박 공공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러나 아직 영웅맹이 남아 있지요.”

“영웅맹이 아닐세.”

운현은 담담하게 말했다.

“항주의 일을 도모한 자는 문왕이며, 그 배후는 바로 일대상인이라 하는 자일세.”

박 공공은 물론 호 공자의 눈빛도 변했다.

“……역시.”

빙긋 웃으며 박 공공이 말했다.

“운 학사님을 모신 건 올바른 선택이었군요.”

박 공공은 굳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조정은 소위 무림인이라 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풀만 뒤척이다 정작 독사를 놓치는 우를 범하는 것은 원치 않으며, 자칫 들불로 번지는 사태 역시 원하지 않습니다. 새로이 열릴 시대를 생각하면 더더욱 그러하지요.”

그 비유는 정확했다.

무턱대고 무림 문파를 탄압하다가 정작 핵심을 놓치고 후환을 남기는 것은 박 공공이 원하는 바가 아니다.

이런 일들로 인해 자칫 민심이 흉흉해지고 사회가 불안해지는 것 역시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앞으로 보위에 올라 천하를 다스릴 새로운 천자의 통치를 생각하면 더더욱 말이다.

“허나 적임자를 찾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막강한 권한이 주어지는 일인 데다가, 관에는 무림에 영향력을 미칠 만한 인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속가제자들이 군문에 투신하는 일들은 종종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무림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기 힘들었다.

게다가 주어질 권한을 생각하면 가볍게 사람을 세울 수도 없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의 말 한마디에 문파의 운명이 갈릴 수도 있을테니 말이다.

“무림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기꺼이 자원할 문파들은 많았습니다만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저희와 생각 자체가 다르니까요.”

박 공공이 원한다면 기꺼이 손을 내밀 문파나 세가들은 많다.

그러나 그들을 믿을 수 있을까?

황실의 권위와 위엄보다 자신들의 자존심을 우선하며, 천하를 경영하는 것보다 이해득실을 먼저 셈하는 자들을 과연 신뢰할 수 있을까?

절대 그렇지 않았다.

“하지만 운 학사님이시라면, 이야기가 다르지요.”

박 공공은 빙긋 웃었다.

운 학사가 어떠한 사람인지 박 공공은 잘 안다.

그의 사람됨이 어떠한지, 그가 어떤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지도 알고 있다.

그가 뿌리부터 문사라는 것은 물론, 때로는 고지식하게 정도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는 것도 잘 안다.

그런 그가 천하에서 가장 강한 다섯 사람 중 하나를 이길 정도라면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지 않는가?

“운 학사님. 저는…….”

“잠깐.”

운현이 박 공공의 말을 끊었다.

달칵.

찻잔을 쥔 운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그저 덧창이 닫힌 커다란 창 하나만이 있을 뿐이었다.

“운 학사님?”

박 공공의 의아한 목소리로 묻고 호 공자 역시 운현을 쳐다보는데, 정작 운현은 두 사람을 돌아보지도 않았다.

“……역시.”

운현이 나지막이 말했다.

“그래도 다행이로군. 최악의 경우는 아니니까.”

“그게 무슨…….”

저벅, 저벅.

박 공공의 말에는 대답도 없이 운현은 창문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두 손으로 덧창을 활짝 열였다.

덜컥.

오후의 햇살이 창문 가득 쏟아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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