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6화. 북경의 재회
운현이 탄 마차는 제법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북경으로 들어선 것이 확실했지만, 휘장으로 창을 가린 터라 바깥을 볼 수가 없었다.
소리로 보아 복잡한 북경 도심을 지나는 듯한데도, 마차는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
마차 안에 함께 타고 있는 무관들도 표정 변화 하나 없이 묵묵히 앞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북경이라…….’
이렇게 돌아오게 될 줄은 몰랐다.
아니,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해 보지도 않았었다.
황궁을 나가던 그날, 이제 이 도시와는 영영 인연이 없으리라 생각했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사실 잘 아는 곳도 아니네.’
운현이 북경 시내에 머무른 것은 전시를 준비하던 몇 개월뿐이었다.
그나마 시험을 앞둔 압박감으로 인해 시내 구경 같은 건 생각도 하지 못했다.
과거에 급제한 이후에는 바로 창룡전에 들어갔으니, 이 번화한 대도시는 운현에게 여전히 낯선 곳일 뿐이다.
‘북경보다 황궁이 더 친숙하다니…….’
운현은 문득 쓴웃음을 지었다.
창룡전, 문연각, 그리고 수많은 황궁의 전각들.
지금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는 광경들이다.
그리운 풍경들, 익숙한 모습들, 그리고 이제는 다시 볼 수 없는 사람들.
운현은 문득 가슴이 아려 오는 것을 느꼈다.
추억이란 포근하면서도 아픈 것인가 보다.
따각.
문득 마차가 멈추고 문이 열렸다.
무관 두 사람이 먼저 내려서고 운현이 그 뒤를 따랐다.
저벅.
그곳은 한적하고 조용한 저택의 안마당이었다.
담이 높아 바깥이 보이지 않았지만 북경의 주택가 같은 곳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단정하게 차려입은 노인이 운현에게 예를 표했다.
“아, 네.”
운현도 그에게 답례했다.
“짐을 주시지요.”
뒤에 내린 무관이 노인에게 운현의 짐과 검을 건넸다.
무관들은 운현에게 정중히 예를 표하고는 다시 마차에 올랐다.
따각, 따각.
마차는 바로 대문을 빠져나갔다.
닫히는 대문 바깥으로 보이는 것은 그저 또 다른 높은 담뿐이었다.
“이리로 오시지요.”
노인은 정중하게 운현을 안내했다.
저벅, 저벅.
높은 담에 비해 저택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다.
작은 사잇문을 지나자 정원과 단아한 건물 한 채가 모습을 드러냈다.
“좋은 곳이군요.”
운현이 정원을 보며 말했다.
그리 크지 않은 정원은 세심하게 잘 꾸며져 있었다.
“감사합니다.”
노인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운현은 그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섰다.
달칵.
‘호오.’
내부의 모습에 운현은 내심 감탄했다.
화려하지도, 초라하지도 않은 집 안은 마치 누군가의 서재인 양 고즈넉한 정취가 가득했다.
사방의 창은 덧창까지 모두 닫아 햇빛은 들어오지 않았지만, 사방을 은은하게 밝힌 등불은 옛스러운 느낌마저 전해 주는 듯했다.
“앉으시지요.”
노인의 권유에 따라 운현은 탁자에 앉았다.
또르르륵.
따뜻한 차향이 집 안에 퍼졌다.
운현에게 차를 낸 노인은 정중하게 말했다.
“곧 나오실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노인은 부드러운 웃음을 지은 후 밖으로 나갔다.
홀로 남은 운현은 차를 음미했다.
편안한 분위기와 따뜻한 차는 운현의 심신을 어루만져 주었다.
그렇게 운현이 잠시 찻잔의 온기를 느끼고 있을 때였다.
달칵.
문이 열렸다.
무심코 고개를 돌리던 운현은 반색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무나 반가운 얼굴이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아, 박 환…….”
운현은 인사조차 끝맺지 못하고 말을 멈췄다.
박 환관 뒤로 비단옷을 입은 낯선 중년인이 들어서고 있었다.
“운 학사님.”
박 환관, 아니 박 공공이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그간 별래무양 하시었습니까?”
“아, 박……, 공공께서도 잘 지내셨소?”
“저야 늘 그렇지요. 후훗.”
박 공공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고급스러운 자주빛 태감의만 아니라면 예전 박 환관 그대로라 해도 믿을 정도였다.
“이분은 호군(濠君)이라 하시는 공자님이옵니다.”
박 공공이 중년인을 소개하며 말했다.
“학사님을 꼭 한번 보기 원하시기에 이렇게 함께 모셨사옵니다.”
“반갑소.”
중년인이 운현에게 말했다.
“박 공공에게 이야기를 많이 들었소이다.”
운현은 잠시 주저했다.
훤칠한 풍채와 귀티 나는 인상, 검은색 비단옷에 같은 검은색 수실로 은은하게 문양을 넣은 고급스러운 복식.
적어도 보통 집안의 공자가 아닌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운현이 주저한 것은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호군이라…….’
호군이라는 것은 문자적으로 호씨 집안의 자제라는 뜻이다.
그러나 운현은 그 뒤에 숨은 의미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운현은 슬쩍 박 공공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박 공공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빙긋 웃고 있을 뿐이다.
운현은 어쨌든 최대한 정중하게 예를 표하는 수밖에 없었다.
“저는 운현입니다. 공자님을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하하, 너무 예를 차리지 마시오.”
호 공자는 호탕하게 웃더니 박 공공을 돌아보며 말했다.
“자, 이렇게 서 있지 말고 앉도록 하지. 운 학사께서도 앉으시오.”
박 공공은 깊숙이 허리를 숙이며 그의 말을 따랐다.
호 공자가 먼저 탁자에 앉고, 박 공공과 운현이 둘러앉듯 자리를 잡았다.
어느새 나타난 노인이 정중한 태도로 두 사람에게 차를 내고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흐음.”
호 공자는 운현을 향한 흥미를 숨기지 않았다.
“운 학사께서 검을 잘 아신다고, 박 공공이 말하더군.”
“저는 관직을 떠난 지가 오래되었으니 학사라 일컬으심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운현은 정중하게 말했다.
“그저 운현이라 불러 주십시오.”
호 공자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허나 박 공공은 늘 운 학사라 부르던데? 그렇지 않은가?”
돌아보는 호 공자의 시선에 박 공공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관리가 관직에서 물러나면 더 이상 벼슬아치라 할 수 없겠사옵니다마는, 학사(學士)는 배울 것이 있는 한 언제까지고 학사 아니겠습니까?”
호 공자는 고개를 끄덕이곤 운현을 바라보았다.
“그렇다는군.”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때도 제가 박 공공의 말을 이기지 못했는데 지금도 그렇군요. 역시 저는 아직 배울 것이 많은가 봅니다.”
“하하하.”
호 공자는 유쾌하다는 듯 웃었다.
“듣자니 운 학사는 전시의 장원 출신이라 하던데, 그렇다면 나라의 큰 인재가 아닌가?”
문득 호 공자가 운현을 쳐다보며 물었다.
그것은 당연히 나라를 위해 일해야 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다름 아니었다.
“자신을 위해 일하는 것은 재주에 달린 일이지만, 나라를 위해 일하는 것은 하늘이 허락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 말은 상황만 허락한다면 언제라도 나라를 위해 일할 수 있다는 뜻인가?”
“저는 부족한 사람이라 하늘이 허락하실 것 같지가 않군요.”
“그야 알 수 없는 일이지.”
호 공자는 운현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의미심장하게 미소 지었다.
운현은 애매한 미소로 답했다.
“어떻게 검을 알게 되었나? 본래 무가 출신인가?”
호 공자는 자연스럽게 하대를 하고 있었다.
게다가 던지는 질문도 갑작스럽고 단도직입적이다.
운현은 정중하게 대답했다.
“아닙니다. 맡은 일에 충실하고자 하여 뒤늦게 배운 것인데, 아마도 길이 맞았나 봅니다.”
“천운이로군.”
호 공자가 말했다.
“평생 그 한 길로만 정진해도 이루지 못하는 사람들이 허다한데 뒤늦게 시작하여 대성하였다니 말일세.”
“그렇습니다. 참으로 천운이지요.”
운현은 호 공자의 말에 동의했다.
사실 지나간 일들을 그저 천운이라 치부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 진부한 단어 외에 또 무엇이라 말할 수 있으랴?
“자네는 강한가?”
호 공자의 목소리에 운현은 고개를 들었다.
“듣기로는 그대가 무림에서 가장 강한 다섯 명 중의 하나를 이겼다고 하던데, 솔직히 그렇게 보이지 않아서 말이네. 무림은 힘이 지배하는 곳이라 하지 않나?”
“무림을 힘이 지배한다고 말한다면, 사람을 지배하는 것이 곧 힘이라는 것과 같습니다.”
“음?”
호 공자의 눈썹이 살짝 일그러졌다.
무슨 뜻이냐는 반문이다.
“무림은 은(恩)과 원(怨)을 힘으로 해결합니다. 그러니 힘이 지배한다는 것 역시 어느 정도 사실이겠지요. 허나 그곳 역시 사람들이 사는 곳입니다.”
운현은 조용히 말을 이었다.
“강과 호수가 얽혀서 세상을 이루듯, 강호 무림 역시 사람들이 얽혀서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러니 무림을 지배하는 것이 힘이라 한다면, 곧 사람을 지배하는 것이 힘이라는 것과 같습니다.”
호 공자를 바라보며 운현은 물었다.
“공자님께서는 사람을 지배하는 것이 힘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흐음.”
잠시 생각하던 공자가 반문했다.
“그렇다면 그대는 사람을 지배하는 것이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잘 모르겠습니다.”
호 공자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운현의 말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다만 한 가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오직 스스로 허락한 것만이 그를 지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호 공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운현이 말했다.
“분노가 자신을 지배하도록 허락할 때에만 분노는 그를 지배할 수 있습니다. 욕심이 스스로를 다스리도록 허용할 때에만 탐욕은 그를 다스리지요. 그러므로 무엇이 자신을 지배하든지, 그것은 스스로가 선택한 결과입니다.”
“허어.”
호 공자는 나지막이 탄식을 흘렸다.
“그대의 말은 마치 도인과도 같군.”
그러나 곧 호 공자는 눈살을 찌푸렸다.
“허나 힘은 사람을 강제로 복종시키지 않는가? 그래서 사람들이 무력을 원하고, 또 강해지고자 하는 것이 아니던가?”
“비록 무력이 사람을 복종시키는 것 같으나 잠시만 그러할 뿐입니다.”
운현은 조용히 말했다.
“그것은 마치 모래를 움켜쥐는 것과 같아서 허망한 착각에 불과합니다. 아무리 손을 휘저어도 모래는 언제 그랬냐는 듯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 본래 있어야 할 곳으로 가 버리지요.”
“무력으로는 사람을 지배할 수 없다는 뜻인가?”
“쓰임새가 다르다는 뜻입니다. 무력은 또 다른 무력을 꺾을 수 있을 뿐이지요.”
“또 다른 무력을 꺾을 뿐이라…….”
호 공자는 운현의 말을 되뇌었다.
“허나 지금도 단지 힘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고통당하는 자들이 허다하지 않은가?”
“그 말씀을 들으니 기쁩니다.”
운현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들의 형편을 살피는 것이 힘을 가진 자의 마땅한 책무라고 옛 성현들께서는 말씀하셨지요. 그러므로 진정으로 강한 사람은, 큰 힘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올바르고 굴하지 않는 정신을 가진 자입니다.”
“흐음.”
호 공자는 무언가 생각하는 듯 손가락으로 탁자를 톡톡 두드렸다.
“그래도 힘이 있다면 타의에 의해 자신의 뜻이 꺾이는 일은 없겠지. 자네도 그렇지 아니한가? 그 무력으로 무림을 종횡하였을 테니 말이야.”
종횡이라면 거침없이 활보하며 다녔다는 뜻이다.
그 목소리에는 운현을 향한 부러움과 함께 씁쓸한 회한이 배어 있었다.
“종횡보다는.”
운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도망가는 일이 더 많았습니다.”
호 공자는 의아한 눈빛으로 운현을 쳐다보았다.
운현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참으로 비참한 모습으로 도망쳐 간신히 목숨을 건졌습니다. 한때는 모든 것을 잃은 것 같았는데, 그래도 좋은 사람들 덕분에 다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참으로 사람을 강하게 하는 것은…….”
운현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사람의 정(情)이 아닌가 합니다.”
호 공자의 입가에도 은은한 미소가 걸렸다.
“……그런가?”
잠시 침묵하던 호 공자가 다시 물었다.
“사람들이 그대를 창룡검주라 한다지?”
“아, 그건…….”
운현은 쑥스러움을 애써 감추며 말했다.
“제가 스스로 지은 이름입니다.”
호 공자는 의외라는 듯 운현을 쳐다보았다.
자기가 자신의 호를 짓는 건 문사에게도 흔치 않은 일이다.
“그런가? 창룡(蒼龍)이라, 참으로 큰 포부를 가지고 지었군.”
“그런 것이 아니오라…….”
운현은 어색한 표정으로 말했다.
“제가 황궁의 창룡전에 머물던 때에 지어서 그렇습니다.”
“아, 창룡전…….”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호 공자가 말했다.
그 역시 어색함을 감추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