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5화. 행방을 알 수 없는 용
태평맹 대내 총괄군사, 제갈기호는 모용미를 보며 생각했다.
‘어찌 보면 모용세가야말로 올바른 방법을 택한 것인지도.’
모용세가는 내실을 다지며 신중하게 세를 넓혀 가고 있었다.
반면 제갈세가의 공격적인 확장 정책은 수많은 부작용을 낳았다.
물리적인 충돌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고 견제도 심했으며 소모되는 재정도 엄청났다.
당문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문파들의 극심한 반발과 악평에도 불구하고, 당문은 말 그대로 미친 것처럼 세를 넓히고 있었다.
당연히 엄청난 부작용이 발생하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압적일 정도로 지부를 확장하고 있는 이유는 분명했다.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까 공손세가는 어려운 세가들을 도와 달라고 말했지만, 알고 보면 당문이나 제갈세가 역시 목숨을 걸고 질주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상의 개파대전인 이번 무림용봉지회 역시 당문과 태평맹의 우위를 공식화하려는 시도 중 하나이고 말이다.
‘그나저나 대회 명칭이 너무 식상한데?’
태평맹 무림용봉지회라니, 무림맹의 용봉지회와 너무 똑같지 않은가?
사실 태평맹 내에서 무림맹을 언급하는 것은 암묵적인 금기에 속했다.
태평맹은 마치 무림맹이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행동해 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중요한 대회의 명칭을 용봉지회라고 하다니?
당설련의 성격을 생각하면 참으로 이례적인 결정이 아닐 수 없었다.
“용봉지회에서 무슨 소중한 추억이라도 있었나?”
어깨를 으쓱하며 제갈기호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 말을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항주의 고급 기루.
영호준은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흐트러진 모습으로 식당에 내려왔다.
식탁에 앉아 있던 소림의 혜천은 눈살을 찌푸렸다.
“시주.”
맞은편에 털썩 앉는 영호준을 향해 혜천이 말했다.
“항주에 온 지도 벌써 사흘입니다. 헌데 계속 이 주루에만 머물러 있는 건 무슨 연유입니까?”
또르르륵.
차를 따르며 영호준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그야 이곳 음식이 탁발보다 낫고, 포근한 침상이 노숙보다 훨씬 편해서지요.”
혜천은 눈살을 찌푸렸다.
어려서부터 소림에서 자란 혜천에게는 속세의 상식이란 것이 없었다.
끼니는 탁발로, 잠은 무덤가에서, 옷은 망자의 수의를 기워 입는 것이 그에게는 당연했다.
때문에 혜천은 소림을 나서며 노자는커녕 갈아입을 옷조차 가지고 나오지 않았다.
물론 영호준은 기겁했다.
무림의 선배라는 명분과 온갖 이유를 동원한 끝에, 영호준은 여정의 주도권을 쥐고 곧장 항주의 이 기루로 온 것이다.
하지만 승려인 혜천에게 기루가 편할 리가 없다.
승복을 입고 있는 것만으로도 온갖 종류의 시선을 다 받고 있으니 말이다.
“항주에 온 것은 영웅맹에 대한 정보를 모으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까?”
“물론 그렇지요.”
탁.
찻잔을 내려놓으며 영호준이 말했다.
“항주의 고급 정보들은 모두 이곳으로 모이거든요.”
믿을 수 없다는 듯 혜천은 눈살을 찌푸렸다.
영호준은 아랑곳없이 점소이를 불러 간단한 음식을 주문했다.
점소이가 주방으로 사라지고, 영호준은 추억을 되살리듯 말을 이었다.
“아십니까? 여기 있던 매향이는 애교가 아주 끝내줬습니다. 살짝 콧소리가 섞인 간드러진 목소리는 돌부처도 돌아앉을 정도로 매력적이었지요. 지금은 북경에 있는 고관대작의 후처로 들어갔지만. 그러고 보니 두 사람은 어디갔습니까?”
그가 묻는 두 사람은 자신의 사제인 진하성과 혜천의 사제 원정이었다.
화산파가 영호준에게 진하성을 동행시킨 것처럼, 소림은 혜천에게 원정을 함께 내려보낸 것이다.
“두 사람은 영웅맹에 대한 정보를 모으러 갔습니다. 그보다 대협의 고급 정보라는 게 어쩐지 고급 기녀에 대한 정보 같습니다만.”
혜천이 쉽사리 믿지 않는 것도 당연했다.
지난 사흘간, 영호준은 말 그대로 밤낮으로 기녀들과 어울렸기 때문이다.
혜천과 원정, 그리고 영호준의 사제인 진하성은 그저 방에 틀어박힐 수밖에 없었다.
승려와 도사 된 신분으로 여색을 가까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호준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건 안 듣는 것보다 못하지요. 모든 사람이 거리낌 없이 왕래할 수 있어야 참으로 길이듯, 내 귀에 좋은 것만 들어서야 어찌 참으로 듣는 것이라 하겠습니까?”
혜천은 눈살을 찌푸렸다.
말은 옳은 것 같은데 핑계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사이 점소이가 간단한 요리를 가져왔다.
영호준은 젓가락을 들어 식사를 시작했다.
“그래서 무언가 중요한 이야기라도 들으셨습니까?”
“태평맹에서 무림용봉지회를 연다고 하더군요.”
“무림용봉지회요?”
“네.”
영호준은 음식을 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이참에 강호 무림 유일의 정통 세력으로 자리잡으려는 것이겠지요. 그간 넓힌 세력권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으려는 의도도 있겠고요. 아, 스님은 무림맹의 용봉지회에 온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렇군요. 아, 생각해 보면 그때가 참 좋았지요.”
젓가락까지 멈춘 영호준은 상념에 잠기듯 먼 곳을 바라보았다.
“철없던 젊은 시절, 꽃 같은 아가씨와 꿈결같은 날들을 보내던 그때가 말입니다. 그녀의 살결에선 마치 향기가 나는 듯했지요. 뭐,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다 독이었지만 말입니다.”
“수도자들에게 여색은 당연히 독이지요.”
“아니, 그게 아니라…….”
“대협의 여성 편력엔 관심이 없습니다.”
혜천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보다 태평맹에 대해 더 이야기해 보시지요.”
“태평맹은 그게 전부입니다.”
영호준은 다시 젓가락을 분주히 움직이고, 혜천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것이 대협이 말한 고급 정보입니까?”
“얼마 전 영웅맹에 이상한 손님이 왔다더군요.”
음식을 우물거리며 영호준이 말했다.
“관원 넷과 문사 한 명이 아침 댓바람부터 영웅맹을 찾아왔다고 하지 뭡니까? 오, 이건 제법 맛있는데?”
영호준은 고기 한 점을 입에 넣으며 감탄했다.
같은 도가라도 육식을 금하는 무당과 달리 화산은 비교적 관대했기에 딱히 문파의 법도를 어긴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적어도 소림의 승려 앞에서 할 행동은 아니다.
“크흠. 관원이라, 확실히 이상하군요.”
“이상한 쪽은 관원이 아니라 문사입니다.”
영호준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그 문사가 영웅맹 맹주를 독대했거든요. 아무도 없이, 단둘만요.”
영웅맹 맹주는 철혈사왕 염중부다.
그가 단둘이 만날 상대라면 보통 중요한 인물이 아니라는 뜻이다.
“……기녀가 그런 것까지 알더란 말입니까?”
“그러니까 고급 정보지요. 그리고 남자는 다들 바보거든요. 자기가 똑똑한 줄 아는 바보 말입니다.”
혜천은 영호준의 남녀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관원이 동행했다면 그 문사는 조정의 고관일지도 모르겠군요. 설마 영웅맹이 관에 줄을 대려는 것일까요?”
“쯧쯧. 그게 정보를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한계입니다.”
영호준은 혀를 찼다.
“그건 해석이 아니라 관찰이지요. 그런 말은 누가 못하겠습니까? 다른 정보를 결합하여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 내야, 비로소 해석이라고 하는 겁니다.”
면박을 준 영호준이 말을 이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 자존심 강하고 허영심 많은 철혈사왕 염중부가 독대씩이나 해 줄 상대가 천하에 몇이나 있을까요? 관원요? 말도 안 되지요. 무인이라면 말 그대로 한 손에 꼽을 정도이고…….”
짐짓 손가락을 접던 영호준이 혜천을 바라보았다.
“문사라면 한 명뿐입니다.”
“그게 누구입니까?”
달그락.
영호준이 긴 나물 한 줄기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행방을 알 수 없는 용 말입니다.”
혜천은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영호준은 그 나물을 용의 형상이라고 말하려는 걸까?
텁.
영호준은 나물을 입에 넣었다.
“그 문사는 다음 날 항주를 떠났다더군요. 행선지는 모르지만 북쪽을 향했다고 합니다.”
“그가 창룡검주란 말씀입니까?”
“오, 알고 계셨습니까?”
“아닙니다. 하지만 하도 소문을 들어서…….”
영웅맹에 맞설 자는 창룡검주뿐이다.
그 소문을 항주까지 오면서 대체 몇번이나 들었는지 모른다.
영웅맹이 기승을 부릴수록, 그 소문은 더욱 더 널리 퍼져 가고 있었다.
“그가 문사였습니까?”
“와불 선사께 못 들으셨습니까?”
“선사께서는 말이 없으신 분이라…….”
“그럼 그의 배분에 대해서도 듣지 못했겠군요.”
들었을 리가 없다.
전대 대조사 와불은 그런 것을 전혀 괘념치 않는 데다, 소림의 다른 승려들은 입에 올리기도 꺼려 할 테니 말이다.
“저야 화산의 제자이고 스님은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지만, 그는 와불 선사의 심득을 전해받았다고 하더군요.”
혜천의 안색이 변했다.
심득을 전수받았다면 정식 기명제자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출가를 했건 안 했건, 배분은 변하지 않는다.
“그, 그러면…….”
“네. 소림 장문인의 사숙이 됩니다. 스님께는 아마, 사숙조쯤 되시겠지요?”
갑작스러운 존칭은 혜천을 놀리기 위한 것이리라.
그러나 혜천은 그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소림 장문인의 사숙이라니, 특히 사승관계가 엄격한 소림에서는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자, 영웅맹도 볼 만큼 봤으니…….”
영호준은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태평맹도 봐 둬야겠지요?”
사뭇 즐겁다는 듯 영호준은 웃었다.
여전히 굳어 있는 혜천을 보는 것은 생각보다 즐거운 일이었다.
***
여러 날의 여정 후, 운현 일행은 북경 외곽에 도착했다.
대륙의 남쪽 끝 광주에서 북경까지의 긴 여정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우와, 대단한데요?”
말을 탄 담소하가 감탄사를 흘렸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족히 삼백여 명은 넘을 듯한 군사와 수십의 기마대, 그리고 다섯 대의 마차가 운현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들 모두가 창칼을 번득이고 있어서 누가 보면 난리라도 난 줄 알 정도였다.
“당연한 일이네.”
감찰어사 조관이 말했다.
“대인의 서찰을 받았을 터이니 마땅히 이리해야지.”
조정에 있던 문왕의 세력을 쳐 낸 사람이 박 환관이라는 것을 안 운현은 그에게 안전에 주의하도록 서찰을 보냈다.
당연히 운현의 신변도 염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따각, 따각.
날카로운 눈빛을 가진 무관이 말을 몰아 다가왔다.
감찰어사 조관 역시 말을 탄 채로 그에게 향했다.
“조관 어사 대인이십니까?”
가볍게 예를 표하며 무관이 물었다.
조관 역시 살짝 고개를 숙이고 답했다.
“그렇네. 도찰원 소속 감찰어사 조관일세.”
조관은 신분패를 꺼냈다.
무관 역시 자신의 신분패를 꺼내 조관에게 건넸다.
두 사람은 신중하게 상대의 신분패를 확인 한 후 돌려주었다
“귀인께서는 어디 계십니까?”
“마차에 계시네.”
탁.
무관은 말에서 내려 마차로 다가갔다.
그리고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귀인, 여기서부터는 제가 호위하겠습니다. 마차를 내리시지요.”
달칵.
운현은 문을 열고 마차에서 내려섰다.
“운현입니다. 수고가 많으시군요.”
무관은 그저 고개만 숙여 보일 뿐, 대답하지 않았다.
운현은 고개를 돌려 감찰어사 조관을 바라보았다.
“수고하셨습니다. 어사 대인.”
조관은 빙긋 웃었다.
“귀인을 모시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운현은 항장익과 담소하, 진예림에게도 감사를 전하고, 무관을 따라 준비된 마차로 향했다.
그리고 똑같이 생긴 다섯 대의 마차 중 한 곳에 올랐다.
“가자!”
무관의 외침과 함께 백여 명이 넘는 행렬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따각, 따각, 저벅, 저벅.
걸음 소리와 말 발굽 소리가 땅을 울리며 흙먼지가 일어났다.
커다란 행렬은 곧 서너 무리로 나뉘더니 이곳과 저곳으로, 혹은 빠르거나 느리게 북경으로 향했다.
똑같이 생긴 다섯 대의 마차도 이리저리 흩어져서, 이제는 어느 마차에 운현이 타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그 모습을 조관 일행은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갔네요.”
담소하가 한숨을 쉬듯 말했다.
광주에서 북경까지의 길었던 임무가 끝난 시원함보다는, 이제 운현을 볼 일이 없으리란 아쉬움이 더 컸다.
황실의 예격으로 초빙된 귀인, 그것도 어마어마한 고수인 운현과 다시 얽힐 일이 어디 흔하랴?
조관은 일행을 돌아보며 말했다.
“다들 수고했네.”
“수고하셨습니다, 어사 대인.”
항장익이 웃는 얼굴로 말했다.
조관은 항장익에게 말했다.
“나는 도찰원에 들어갔다가 올 테니, 자네들은 식사라도 하고 있게.”
도찰원에 보고도 해야 하고 호위 병력도 인수인계를 마쳐야 했다.
식사를 할 여유 정도는 충분할 것이다.
항장익은 담소하와 진예림을 돌아보며 말했다.
“자, 오랜만에 북경에 왔으니, 근사한 곳에 가서 먹어 볼까?”
“좋아요! 역시 항 형님이 최고라니까요?”
담소하는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말에 타고 있던 진예림은 어딘가 아쉬운 듯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 감정은 길지 않았다.
운현은 분명, 그녀의 거취는 천천히 결정해도 된다고 말했으니까.
“가자. 오늘은 일단 잔뜩 먹자고!”
“넵!”
항장익과 담소하의 말을 들으며 진예림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곧 두 사람과 함께 북경 시내로 말을 몰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