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4화. 바람에 실어 보낸 이별
운현이 맹주전을 나오자 조관 일행과 문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조관은 안도의 빛을 보였고, 문사는 그들을 다시 영웅맹 정문으로 안내했다.
그리고 정문에서 운현은 못 보던 작은 마차 한 대를 발견했다.
언뜻 짐마차 같았지만, 휘장을 사방으로 내려 무엇을 싣고 있는지 볼 수가 없었다.
“맹주님께서 하사하셨습니다.”
문사가 말했지만 운현은 듣고 있지 않았다.
저벅, 저벅.
“대인!”
조관이 놀란 목소리로 말했지만 운현은 거침없이 마차로 다가갔다.
그리고 휘장을 걷었다.
팔락.
운현의 모습이 그대로 굳었다.
조관과 일행은 급히 운현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흠칫 멈출 수밖에 없었다.
“대, 대협…….”
진예림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마차에 실려 있던 것은 열린 관이었다.
그리고 그 관 안에, 독고랑이 누워 있었다.
“……독고 제.”
언뜻 보면 그저 잠을 자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숨소리도, 온기도 없었다.
마치 인형처럼 창백한 모습으로 독고랑은 누워 있었다.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은 채로.
그날 밤, 그 피 웅덩이 속에서 홀로 죽어 가고 있었을 그는 미소 짓고 있었던 것이다.
푸른 달 아래 운현이 보았던 그 모습 그대로 말이다.
“……대인.”
조관이 나지막이 말했다.
휘장을 쥔 운현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잠시 후, 운현이 천천히 손을 내렸다.
사락.
독고랑의 모습이 휘장 뒤로 가려졌다.
“가시지요.”
이를 악문 채 간신히 운현이 말했다.
하지만 정작 운현 자신은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움직일 수 없었다.
휘장 역시 여전히 손에 꽉 쥔 채였다.
마치 놓기를 두려워 하는 것처럼.
“……대인.”
한참 만에 조관이 다시 말했다.
사락.
그제야 운현은 손을 놓았다.
조관은 일행을 돌아보며 말했다.
“가자.”
일행은 고개를 숙였다.
담소하가 새로운 마차를 맡고, 항장익과 진예림이 말에 올라 주변을 경계했다.
운현은 조관과 함께 타고 왔던 사두마차에 올랐다.
따각, 따각.
두 대의 마차와 두 기마는 천천히 영웅맹을 떠났다.
문사가 정중히 고개를 숙여 그들에게 예를 표했지만 그 모습을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돌아온 운현은 관을 붙들고 하루를 울었다.
그리고 다음 날, 운현은 자신이 독고랑의 장례를 결정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슴이 아파 왔지만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운현은 또 한번 깨달았다.
독고랑에 대해서 아는 것이 사실상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그의 고향은 물론, 형제나 가족이 있는지조차도 알 수 없었다.
운현은 아무것도 몰랐다.
가슴이 먹먹해 왔다.
쏴아아아.
바람이 운현의 머리카락을 흩날렸다.
결국 독고랑의 장례는 화장으로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배를 타고 대운하를 따라 북상하며 운현은 재를 물결 위로 흩뿌렸다.
부는 바람 사이로 하얀 가루는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운하에 뿌렸다기보다는 마치 바람에 실어 보낸 것만 같았다.
그러나 운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독고랑을 묻은 곳은 바로 그의 가슴 한가운데였다.
***
영웅맹이 항주에 있듯, 태평맹은 사천성 성도에 자리하고 있었다.
태평맹의 현판은 대도시 성도의 화려한 장원에 보란 듯 걸려 있었지만, 바로 그 뒤에는 더 크고 높은 당문의 본가가 버티고 서 있었다.
그것은 마치 태평맹의 주인이 누구인지 보여 주는 상징적인 모습같았다.
또한 태평맹이 성도에 있다는 것은, 칠대세가의 대표자들이 중요한 회합 때마다 먼 사천까지 모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결국 세가들은 대표자들을 아예 성도에 상주시키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역사적으로 늘 변방 취급을 받던 사천성의 성도는, 항주 영웅맹과 함께 강호 무림을 양분하는 동과 서의 두 극단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번 태평맹 무림용봉지회는.”
대외 총괄군사 당설련의 낭랑한 목소리가 회의장을 울렸다.
“태평맹 칠대세가의 후기지수를 선발하여 젊은 제자들의 사기를 진작하고 수준 높은 경쟁을 유도하기 위한 것입니다.”
당설련은 가볍게 웃었다.
“허나 당연히 그것만은 아니에요. 용봉지회 기간에 칠대세가의 가주 회합이 열리는 것은 물론이고, 각 지역의 유력 문파들, 천하삼대상단을 비롯한 상계의 주요 인물들, 그리고 조정의 고관들을 초청합니다.”
세가 대표자들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지역 문파뿐 아니라 상계와 고관 들까지라니, 그 정도면 아예 개파대전이나 다름 없었다.
“그들과 우리 태평맹이 친선 우호 관계를 확립하는 것이 이 대회의 실제적인 목표지요.”
“크흠.”
공손세가의 외당 부당주, 공손추현이 헛기침을 했다.
“천하가 어수선하오. 이런 때에 굳이 대회를 열어야 하오?”
현재 공손세가는 기존의 가세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힘에 버거운 상황이었다.
본가가 불에 탄 데다가 장강 교역의 자금줄이 영웅맹으로 인해 끊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급히 내륙 상단으로 눈을 돌렸지만 그 역시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네, 천하가 어수선하지요.”
당설련이 빙긋 웃었다.
“그러니 더욱 태평맹의 건재함을 보여야 하지 않겠어요?”
공손추현의 표정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태평맹의 건재함이라지만 결국 주목받는 것은 당문이 될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런 대회 따위보다 더 급한 일이 있지 않느냐는 말이오.”
툭.
서류를 거칠게 탁자에 내려 놓으며 공손추현은 말했다.
“당장 어려운 세가에 지원을 해 줘도 모자랄 판에 이런 일에 재원을 내라는 건…….”
“태평맹은.”
당설련이 공손추현의 말을 끊었다.
“세가 연합체예요. 만일 공손세가께서 독자적인 행동을 원하신다면 언제든지 뜻대로 하셔도 좋아요. 태평맹을 나간 후에 말이지요.”
“그, 그게 무슨……!”
공손추현이 화를 내려 했지만 당설련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얼마 전 공손세가의 소공자께서는 태평맹이 당장 영웅맹과 싸워야 한다고 했다지요?”
움찔하는 공손추현을 바라보며 당설련은 말을 이었다.
“공손세가의 소공자께서는 맹의 대외 정책을 공공연히 비난하고, 외당 부당주께서는 맹의 일에 사사건건 트집을 잡으시니…….”
날카로운 눈빛으로 당설련은 말했다.
“그 저의를 과연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대외 총괄군사인 저로서는 난감하기만 하군요.”
난감하다는 말과 달리 당설련의 기세는 단호하기만 했다.
공손추현은 이를 악물고 신음을 흘렸다.
당설련은 공손세가가 절대 태평맹을 떠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무림맹이 무너진 이후, 기존 문파들의 위상은 형편없이 추락했다.
그간 무림맹의 위세에 숨죽이고 있던 문파들이 일어났고, 사파는 물론 도적 떼들까지 급속도로 세력을 늘리기 시작했다.
장강이라는 엄청난 자금원을 잃은 데다 더 이상 무림맹이라는 압도적인 무력도 없던 문파들은 급변하는 상황에 적응하지 못했다.
이곳저곳에서 크고 작은 충돌이 연이어 일어났고 기존 문파들의 세력은 하루가 다르게 줄어들어 갔다.
예외는 오직 태평맹 칠대세가뿐이었다.
영웅맹과 함께 강호 무림을 양분하는 태평맹의 이름은 우산이 되어 주기에 충분했다.
그러므로 공손세가는 태평맹을 떠날 수 없다.
비록 당문과 제갈세가가 태평맹을 주도하며, 뒷걸음질하는 다른 세가들과 달리 공격적으로 세를 확장하고 있다 해도 말이다.
“그, 그건…….”
“하하. 맹의 대외 정책을 비난하는 것은 분명 잘못된 일이지요.”
태평맹 대내 총괄군사, 제갈기호가 웃으며 말했다.
“허나 술자리에서 사적으로 한 말까지 문제삼는다면 과한 것이 아닐까요? 그 정도야 젊은 때의 혈기로 넘어갈 수 있지요. 저도 기녀 앞에서는 온갖 허세를 다 부리거든요.”
커다란 덩치의 제갈기호는 과장된 몸짓으로 당설련을 돌아보았다.
“그렇지 않습니까? 대외 총괄군사님.”
당설련은 피식 웃었다.
“그런가요? 저는 잘 모르겠지만, 대내 총괄군사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알아서 잘 처리하실 줄 믿겠어요.”
“맡겨 주십시오. 하하하.”
제갈기호는 가슴을 두드리며 웃었다.
대단히 가벼운 언행이었지만 당설련은 그를 과소평가하지 않았다.
‘음흉한 너구리 같으니.’
제갈세가의 몫이었던 대내 총괄군사에 제갈기호 같은 인물을 임명한 것은 어울리지 않는 인사였다.
마치 제갈세가는 태평맹의 권력을 바라지 않으니 당문이 알아서 다 하라는 뜻 같았다.
하지만 제갈기호는 결코 만만한 인물이 아니다.
지금도 당설련의 말을 인정하는 듯하면서 공손세가를 두둔하고 있지 않은가?
“이번 무림용봉지회는.”
당설련이 낭랑한 목소리로 대표자들에게 말했다.
“세가의 가주분들은 물론, 수많은 귀빈들 앞에서 열리게 됩니다. 젊은 제자들이 자신과 세가의 이름을 빛내는 데 절호의 기회지요. 또한 우승자에게는 맹의 주요 지부에 파견되어 공적을 쌓을 기회가 주어질 것입니다.”
대표자들의 눈동자가 빛났다.
비록 당문이 독식하다시피 하고 있지만 태평맹의 권력을 얻는다는 건 결코 나쁜 일이 아니었다.
‘쯧.’
제갈기호가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어차피 우승자는 당문이 될 텐데.’
그러나 용봉지회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대표자들은 사뭇 진지하게 대회에 대해 논의하고 협의를 해 나갔다.
그렇게 회의가 거의 마무리되던 때였다.
“그나저나 맹의 총단이 너무 외진 곳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소?”
문득 혁련세가의 대표자 혁련광이 말했다.
그는 태평맹에 대표로 파견되며 처음 모습을 드러낸 인물이었다.
“물론 이곳 성도가 작은 도시는 아니오. 허나 왕래가 불편한 것도 사실이지 않소?”
사천성은 변방에 가깝다.
지세도 험하고 다양한 소수 민족들이 거주해서 오히려 타국 같은 느낌이 들 정도다.
그러므로 혁련광의 지적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물론 태평맹에 대한 당문의 영향력을 조금이라도 약화시키려는 의도가 더욱 컸지만 말이다.
“마침 가주 회합도 있을 예정이라 하니, 총단을 중앙으로 옮기는 것도…….”
“그건…….”
“좋은 생각입니다. 하하하.”
당설련이 무어라 하려는데 얼른 제갈기호가 끼어들었다.
“허나 지금은 시기가 좀 아닌 듯합니다.”
빙긋 웃으며 제갈기호는 말을 이었다.
“총단을 옮긴다는 게 현판만 가져간다고 되는 건 아니지요. 태평맹의 이름에 걸맞은 총단을 새로 지어야 할 테니 재정 또한 막대하게 들 것이고, 맹의 주요 당직자분들도 전부 움직이셔야 할 것 아닙니까?”
제갈기호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대표자들은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그때 낭랑한 여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렇네요.”
모용세가의 대표자, 모용미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게 되면 현재 맹의 주요 직책을 맡고 계시는 당문 분들도 전부 중앙으로 이동하셔야겠지요. 그 정도면 아예 당문도 함께 가야 하는 것 아닐까요?”
빙긋 웃으며 말했지만 다른 대표자들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건 사실상 당문의 중앙 진출을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같은 상황에 절대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그, 그렇군요. 제가 그만 실언을…….”
혁련광은 당혹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어째서 제갈세가가 태평맹의 총단을 성도에 두는 것을 동의했는지도 알 수 있었다.
“그래요? 저는 충분히 논의할 만한 일이라고 보는데요.”
당설련이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혁련광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제안은 철회하겠습니다.”
당설련의 미소가 조소로 변했다.
“그럼, 그렇게 하세요.”
사락.
서류를 정리하고 당설련은 대표자들에게 말했다.
“회의는 이것으로 마치지요. 여러분의 협조에 감사드려요.”
당설련은 그대로 회의실을 나갔다.
각 세가의 대표자들은 합의 사항을 다시 검토하거나, 다른 대표자들과 나지막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특히 공손세가, 단목세가, 혁련세가는 유독 가까운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들의 대화나 표정은 결코 당문에 호의적인 것이 아니었다.
제갈기호는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아직도 멀었군.’
그들은 자신들이 당문을 견제하고 태평맹을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들이 거대 문파이던 그때를 잊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무림맹은 이미 무너졌는데도 말이다.
‘저쪽은 좀, 가능성이 있으려나?’
제갈기호는 남해검문의 대표자 황보선혜와 모용세가의 대표 모용미를 바라보았다.
그녀들은 시종일관 조용히 들으며 당설련의 의중과 그 의미를 파악하려 하고 있었다.
당문의 독주는 제갈세가도 바라지 않는다.
제갈세가는 손을 잡고 연대할 만한 상대가 필요했다.
그런 면에서 모용세가와 남해검문은, 특히 조용히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 모용세가는 주목할 만한 상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