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2화. 염중부의 의도
츠즈즈즈.
운현의 발밑으로 하얀 서리가 번져 갔다.
숨을 가다듬으며 운현은 천천히 검을 거뒀다.
스릉.
찬란하게 빛을 뿜던 검이 칼집 안으로 모습을 감췄다.
‘……역시.’
중검이 만들어 낸 결과를 바라보며 운현은 가만히 한숨을 쉬었다.
‘변했구나.’
이것은 분명 백호실전검 제삼식이다.
과거 서호에서 북해의 빙설을 상대로 펼쳐 냈던 검.
그러나 위력은 그때와 크게 달랐다.
같은 것은 단 하나, 승패의 결과뿐이다.
저벅.
운현은 천천히 걸어갔다.
그리고 발을 멈췄다.
“으으…….”
염중부는 꼴사납게 흙먼지 속에 처박혀 있었다.
그는 구겨진 얼굴로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그, 그건 대체…….”
검성 이검학에게서도 이런 검의 경지는 보지 못했다.
아니, 설령 검성이라 해도 이 일검을 받아 낼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으득.
염중부는 이를 악물었다.
그는 고개를 들고 운현을 올려다보았다.
“……왜 검을 멈추었느냐?”
운현은 염중부를 내려다보며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은 틀렸습니다.”
내려다보는 운현의 눈빛은 얼음처럼 싸늘했다.
“제가 원한 것은 그뿐이었습니다.”
염중부는 이를 갈았다.
이런 치욕이 있었던가?
평소의 그라면 당장이라도 운현의 목숨을 끊고자 했을 터였다. 설령 자신이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러나 운현의 검을 겪어 본 지금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아니, 세상 모든 것이 그저 허무하기만 했다.
그것은 그저 허탈함을 넘어 당연하다는 느낌마저 드는 생소한 감각이었다.
“허어.”
공허한 웃음이 염중부의 입가로 새어 나왔다.
‘그랬군.’
염중부는 비로소 깨달았다.
무력해 보이는 운현의 말에 자신은 유독 날카롭게 반응했다.
과거라면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갔을 텐데도 말이다.
그것은 운현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는 것을 무의식중에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으로서는 도저히 닿을 수 없는 저 높은 곳에서 말이다.
스륵.
염중부는 일어섰다.
엉망이 된 의복을 추스르고 헝클어진 머리까지 쓸어넘긴 염중부는 운현을 바라보았다.
그 모든 행동을 운현은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내일 맹으로 와서 나를 찾아라.”
염중부는 말했다.
그 목소리에 특유의 조롱이나 비하는 조금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러면 네가 원하는 것을 내어주도록 하지.”
탁.
그 말을 끝으로 염중부는 몸을 날렸다.
그는 즉시 수풀 사이로 모습을 감췄지만, 그가 사라진 방향에서 무엇인가 섬뜩한 소리를 내며 운현을 향해 짓쳐 들었다.
쉬익.
“대인, 위험……!”
퍽.
항장익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길죽한 무엇인가가 운현의 발치에 내리꽂혔다.
“가져가라.”
멀리서 염중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본래 네 것이니.”
목소리는 이내 사라졌다.
운현은 자신의 발 앞에 박힌 그것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슥.
손을 뻗은 운현은 그것을 쥐고 그대로 뽑아 올렸다.
스릉.
날카로운 칼날이 운현의 손에서 반짝였다.
그것은 바로 북해의 검, 미명이었다.
독고랑과 함께 잃어버렸던 검이 마침내 운현의 손에 되돌아온 것이다.
운현은 회한에 잠겨 북해의 검, 미명을 내려다보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감찰어사 조관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대인, 방금 그자는…….”
자박.
“영웅맹에 맞설 자는 창룡검주뿐이다.”
진예림의 낭랑한 목소리가 조관의 말을 끊었다.
“진 매!”
“누님!”
저벅, 저벅.
항장익과 담소하가 만류하려 했지만 진예림은 운현을 향해 걸어갔다.
운현을 똑바로 쳐다보며 진예림은 물었다.
“장강에 가득한 소문이지요. 당신이, 창룡검주인가요?”
그것은 이미 대답이 정해진 물음이었다.
조금 전 그자는 분명 철혈사왕 염중부, 과거 환우오천존의 한 사람이자 영웅맹의 맹주다.
그를 검으로 패퇴시킬 수 있는 자는, 적어도 검성과 신승을 제외하면 단 한 사람뿐이다.
바로 창룡검주, 그 외에 누가 있을까?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진예림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이 말하던 시신은, 독고 대협인가요?”
운현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간신히 대답했다.
“……네.”
진예림의 몸이 휘청 흔들렸다.
“진 매!”
항장익이 급히 그녀를 부축하려 했다.
하지만 진예림은 곧 몸을 바로 세웠다.
“나는.”
운현을 바라보며 그녀가 말했다.
“항주 진가장의 딸 진예림이에요. 그리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그녀는 말을 이었다.
“독고 대협과 함께 전열을 지켰던 서른 정예 중 한 명이었어요.”
또륵.
진예림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독고 대협께서는, 역시 돌아가셨군요.”
고개 숙인 그녀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지, 진 매.”
“누님.”
항장익과 담소하가 그녀를 위로하려 했다.
그러나 진예림은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운현은 차마 그 모습을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지 않으면 자신마저 눈물을 쏟을 것 같았으니까.
‘잘됐군, 독고 제.’
운현은 먼 하늘을 보며 속으로 말했다.
‘자네를 위해 울어 줄 사람이 나 말고도 있었으니 말일세.’
하늘은 매정할 정도로 푸르렀다.
문득 시야가 흐려지는 것을 느끼며 운현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번져 갔던 하얀 서리가 점차 사라지는 것과 함께, 운현의 마음은 조금씩 따뜻해지고 있었다.
***
숙소 객잔으로 돌아온 운현은 곧 조관과 대책을 논의했다.
염중부가 말한, 문왕의 수족을 쳐 낸 사람은 예상대로 박 공공이었다.
운현은 감찰어사 조관을 통해 박 공공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안전에 더욱 신경을 쓰도록 부탁했다.
조정에 문왕의 수족이 있다는 말은, 곧 황권을 둘러싼 분쟁에 저들이 개입해 있다는 뜻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물론 재회를 기대하는 기쁨과 감사의 마음도 적었다.
그러지 않았다간 섬세하고 여린 마음을 가진 박 환관이 토라질지도 모르니까.
박 공공에게 서찰을 보낸 후엔 운가상단에도 서찰을 적었다.
잘 가고 있다는 안부를 숙부와 숙모에게 전하고, 더불어 강 총관에게는 받았던 검을 보내며 찾아갈 때까지 보관해 달라는 글도 적었다.
지금도 입고 있는 옷을 사 준 사촌동생 운희연에 대한 고마움도 빼먹지 않았다.
숙소 객잔의 한 방.
달칵.
찻잔을 내려놓은 운현은 진예림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소저가 어사 대인께 합류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군요.”
“네. 광주의 감찰이 사실상 제 첫 일이었어요.”
“관에 투신한 특별한 이유가 있었습니까?”
진예림은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그날 이후, 항주에 있는 모든 문파는 영웅맹에 협조할 수밖에 없었어요. 저는 그것이 싫어서 뛰쳐나왔지요. 영웅맹이 감히 손을 뻗칠 수 없는 관으로요.”
“그렇군요.”
운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혹시 다른 분들과도 연락이 됩니까?”
그가 말하는 다른 분들이란 독고랑과 함께 했던 서른 명의 정예를 말하는 것이다.
“할 수 있어요. 원하신다면요.”
진예림의 눈이 반짝였다.
“생각하시는 것이 있나요?”
“네.”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분들이 제 뜻을 받아들이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혈전의 그날.”
진예림은 단호한 눈빛으로 말했다.
“우리는 이미 뜻을 세웠어요. 독고 대협께서 부르신다면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을 따르기로요. 대인께서는 대협의 의형이자 스승이셨으니, 명하시면 모두가 기꺼이 응답할 거예요.”
그 말은 운현의 가슴을 사뭇 벅차게 했다.
독고랑은 떠났으나 그가 남긴 자취는 이리도 분명히 남아 있었다.
“……그렇군요.”
잠시 찻잔을 매만지며 마음을 가라앉힌 운현이 말했다.
진예림은 희미하게 웃었다.
“이제 관인의 직무는 내려놓아야겠네요.”
그건 이제부터 운현의 뜻을 따르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운현은 말했다.
“아, 그건 천천히 결정해도 될 것입니다.”
“네?”
진예림의 반문에 운현은 빙긋 웃었다.
“이후의 일에 대해서 조금 짐작 가는 것이 있거든요.”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진예림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만 일어날까요? 어사 대인께 여쭤 볼 것도 있으니…….”
“제가 들라 전하지요.”
덜컹.
진예림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운현은 그녀를 만류했다.
“아니, 그냥 제가 찾아가도 됩니다. 굳이 소저께 폐를 끼칠 이유는…….”
“괜찮아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진예림은 말했다.
“어쩌다 운이 좋아 귀인 대접을 받는 한량이 아니라면, 그 정도 심부름이야 충분히 해 드릴 수 있지요.”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왜 이제껏 그녀가 거리를 두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진예림에겐 운현이 그렇게 보였나 보다.
하긴 광주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해 보면 그렇게 보인 것도 무리는 아니다.
폐인이거나 두들겨 맞거나 아니면 치정관계로 사고치는 것 같은 모습만 보여 줬으니 말이다.
“그럼.”
진예림은 정중하게 예를 표하고 방을 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감찰어사 조관이 들어왔다.
“찾으셨습니까?”
“죄송합니다. 이렇게 오시도록 해서…….”
“괜찮습니다. 대인.”
운현은 조관에게 자리를 권했다.
조관이 자리에 앉자 운현은 그에게 차를 따라 주었다.
또르르륵.
“여쭈실 것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찻잔을 앞에 두고 조관이 물었다.
운현은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이미 알고 계시듯 저는 영웅맹 맹주를 만날 것입니다.”
조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저는 그가 왜 저를 만나려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째서 제 의제의 시신을 돌려주려 하는지도요.”
“대인께 바라는 것이 있어서가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오히려 더더욱 지금이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가 가진 패는 제가 절대로 거부할 수 없는 것이니까요. 차라리 결정적인 때에 드러내는 것이 더 효과적일 것입니다.”
말하던 운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어째서 상황이 전개되기도 전인 지금, 그가 저를 만나려 하는 것일까요? 그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으며, 과연 제게 무엇을 원하는 것일까요?”
운현에게 한 번 꺾였다고 염중부가 모든 것을 포기할 사람일까?
그저 호감을 사겠다고 결정적인 패를 그냥 내놓을 인물일까?
결코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운현은 확신하고 있었다.
염중부는 아주 중요한 무엇인가를 운현에게 바라고 있다고.
“맞는 예인지는 모르겠으나, 감찰 업무의 경우라면 가능한 상황이 하나 있습니다.”
잠시 생각하던 조관이 말했다.
“그것은 감찰 기획 단계에서 아예 제외되고자 할 때입니다.”
운현의 눈동자가 빛났다.
“……무슨 뜻이지요?”
조관은 천천히 설명을 시작했다.
“지방관의 비리 의혹이 감지되면 감찰어사는 감찰에 들어가기 전에 대략적인 조사 범위와 규모를 정합니다. 즉, 누구를 어디까지 감찰할 지, 경우에 따라 파직까지 갈 것인지의 여부를 미리 정해 둔다는 뜻이지요.”
헛기침을 하고 조관은 말을 이었다.
“다소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만, 이런 기획이 없으면 감찰은 자칫 표류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진짜 척결해야 할 부패 대신 엉뚱한 문제만 건드리다가 끝나기도 하지요.”
운현은 조관의 말을 납득했다.
요컨대 길을 잃지 않도록 대강의 얼개를 구상해 둔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