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1화.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으하하하하!”
사방을 쩌렁쩌렁 울리는 웃음소리에 조관은 눈살을 찌푸리며 귀를 막았다.
그 웃음소리는 마치 머릿속을 뒤집어 놓는 것 같았다.
담소하는 물론, 진예림과 항장익마저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파라라락.
화려한 옷자락을 펄럭이며 한 중년인이 천천히 내려왔다.
금빛 문양을 수놓은 붉은 비단옷과 뒷짐을 진 여유로운 태도, 그리고 뱀처럼 섬뜩한 날카로운 눈빛.
탁.
그는 가볍게 바닥에 내려섰다.
“오랜만이로구나.”
눈을 빛내며 그가 운현에게 말했다.
마치 고관대작처럼 중후하고 여유로운 모습이었지만 그 눈동자에서 뻗어 나오는 살기는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오랜만입니다.”
운현 역시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철혈사왕, 아니 이제는 영웅맹 맹주라 불러 드려야겠군요.”
조관을 비롯한 일행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눈 앞에 나타난 이 중년인이 환우오천존의 한 사람이자 영웅맹 맹주, 철혈사왕 염중부라니!
“후후.”
염중부가 웃었다.
그는 운현 뒤에 서 있는 조관 일행을 흘깃 쳐다보았다.
“……관인이로군.”
조관의 표정이 굳었다.
지금 그들은 평복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염중부는 한번 보는 것만으로 그들이 관인임을 알아차린 것이다.
“어찌 아셨습니까?”
운현이 조관 대신 물었다.
만일 기밀이 새어 나간 것이라면 문제는 심각했다.
“관인들은 고약한 냄새가 난다. 자신들은 잘 모를 테지만.”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염중부는 말했다.
그러나 운현은 속지 않았다.
“그것만은 아니겠지요. 본래 신중한 분이시니까요.”
“그래, 아니다.”
의외로 순순히 염중부는 인정했다.
그는 운현을 지긋이 쳐다보았다.
“……잘했다.”
난데없는 말이었다.
그러나 염중부는 다 알고 있다는 듯 웃었다.
“문왕에겐 아주 뼈아픈 실책이었겠지. 그는 네가 도망치는 모습을 보고 마음껏 비웃었는데, 정작 자신의 목에 칼이 들어와 있었으니까.”
운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염중부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흥, 모른 척하는 거냐? 조정에 있던 문왕의 수족을 네가 전부 잘라 낸 건 이미 알고 있다.”
운현은 물론 조관의 눈빛도 변했다.
지금 염중부는 얼마 전 조정에 있었던 커다란 변화를 말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가 조관을 관인이라 단정한 이유도 알 수 있었다.
조정의 변화를 운현의 짓이라 여기고 있으니, 당연히 관인이 운현을 호위하고 있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클클클.”
염중부는 웃었다.
“그래,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운현을 똑바로 쳐다보며 그가 말했다.
“네가 이곳에 반드시 돌아올 것을 말이다.”
염중부의 눈동자는 노골적인 탐욕으로 물들어 있었다.
운현은 담담히 말했다.
“그래서 이곳에 죽은 자들을 묻어 표시를 내고, 사람을 두어 지켜보게 했군요.”
“그래.”
이곳에 도착했을 때, 운현은 자신을 지켜보는 눈이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지켜보던 누군가가 즉시 사라지는 것도 알았다.
그 의미는 분명했다.
누군가 이곳에 감시를 두고 운현이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가능성은 둘이었다. 문왕의 삼태상이거나, 혹은 철혈사왕 염중부거나.
그러나 운현을 격동하게 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왜 저를 기다리셨습니까?”
“너를 중요히 여기니까.”
염중부는 씨익 웃었다.
“그래, 예를 들자면……. 이곳에 피범벅이 되어 누워 있던 놈을, 그저 그놈이 너와 관계있다는 이유만으로 수고로이 챙겨 놓을 정도로 말이다.”
쿵.
운현의 심장에 묵직한 무엇이 떨어져 내렸다.
누구라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운현의 눈빛은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입술을 깨물며 운현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살아…… 있습니까?”
격동이 다시금 운현을 뒤흔들었다.
혹시나 싶은 한 조각 희망이 가슴을 옥죄어 왔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잔인했다.
“아니.”
염중부는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가슴이 으스러지고 심장이 박살났다. 설령 신선이라 해도…….”
그것은 마치 운현의 덧없는 기대를 비웃는 것 같았다.
“그런 놈은 살릴 수 없지.”
끔찍한 공허가 운현을 뒤덮었다.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는데도 발밑이 무너지는 것 같은 상실감은 어쩔 수 없었다.
아득.
운현은 이를 악물고 눈을 감았다.
그 모습을 염중부는 사뭇 흥미롭다는 듯 지켜보았다.
‘놈.’
운현이 감정의 격랑에 매몰되는 모습은 염중부를 즐겁게 했다.
하지만 날카로운 눈동자로 운현을 살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떻게 된거지? 진짜 모든 내력을 잃었나?’
인태상이 운현의 단전을 박살 내는 모습은 염중부도 보았다.
대화는 듣지 못했지만 그 정도의 권격이라면 결과는 명확했다.
실제로 지금 눈앞에 있는 운현에게선 아무 기세도 느껴지지 않았다.
저토록 감정의 격랑에 휩쓸리고 있는데도 말이다.
‘그렇다면.’
염중부는 슬쩍 자신의 입술을 핧았다.
어쩌면 기대 이상의 수확을 거둘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의 시신은.”
운현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놀랄 정도로 차갑게 가라앉았다.
“어디 있습니까?”
염중부를 바라보는 운현의 눈빛은 마치 얼음 같았다.
사뭇 여유로운 표정으로 염중부는 답했다.
“잘 있다. 언뜻 보면 아직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지.”
그건 운현의 마음을 다시 한번 후벼 파는 말이었다.
하지만 운현의 눈빛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것이 염중부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
“그러고 보니 마침 잘됐구나. 그렇지 않아도…….”
후욱.
섬뜩한 살기가 철혈사왕 염중부로부터 쏟아지기 시작했다.
조관 일행은 그 살기를 견디지 못하고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너를 맹으로 끌고 갈 참이었으니까.”
후우우웅.
엄청난 기세가 사방을 난폭하게 휩쓸었다.
그날 그때처럼 나무들이 흔들리고 풀과 나뭇잎이 휘날렸다.
조관 일행은 신음을 흘리며 몸을 웅크렸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운현은 여전히 담담하기만 했다.
폭풍 같은 기세 속에서도 운현은 염중부를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어째서 이런 짓을 하는 겁니까? 왜 죽은 사람을 모독하고, 타인의 소중한 것을 인질로 잡고, 함부로 끌고 가려는 것입니까?”
“내가 할 수 있으니까.”
대답은 간단했다.
염중부는 툭 던지듯 말했다.
“그리고 네가 무력하니까. 그게 전부다. 바로 그것이.”
사뭇 불쾌한 표정으로 염중부는 운현을 노려보았다.
“강호 무림의 법칙이다.”
운현과 염중부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혔다.
서로가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지만 염중부의 속내는 사뭇 복잡했다.
무력해 보이던 운현이 전혀 흐트러지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설마 독선이 치료해 주었나?’
그러나 아무리 독선이라도 박살 난 단전을 되돌릴 방법은 없다.
“과연.”
조용한 목소리로 운현이 말했다.
“유치하기 짝이 없는 이유로군요.”
“놈! 감히 어디서!”
염중부가 외쳤다.
그러나 운현은 천천히 검을 쥐었다.
“아직도 모르고 있었다면 가르쳐 드리지요.”
염중부를 똑바로 쳐다보며 운현은 말했다.
“그렇게 살면 안 된다는 것을요.”
스릉.
운현의 손에서 검이 빛났다.
그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운현의 검에서 한기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후우우욱.
염중부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헉!”
그는 즉시 뒤로 물러서며 자신의 적사편을 휘둘렀다.
자신이 상대보다 먼저 출수했다는 치욕 같은 건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부욱.
비단 찢는 듯한 소리를 내며 적사편이 허공을 갈랐다.
끝이 둘로 갈라진 검붉은 적사편은 날카로운 독니를 드러내고 운현을 향해 짓쳐 들었다.
운현은 가볍게 검을 내리그었다.
쉭.
운현의 검은 적사편을 베지도, 심지어 가 닿지도 않았다.
그러나 운현의 검과 적사편이 스쳐 지나간 순간, 적사편은 순식간에 그 기세를 잃었다.
마치 제어하던 실이 끊어진 것처럼.
그러나 염중부의 공세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이놈!”
투두두두둥.
활줄 튕기는 소리가 연이어 터져 나왔다.
염중부가 손으로 적혈사심을 쏘아 낸 것이다.
콰과과과곽.
흙이 뒤집어지고 파편이 흩날렸다.
사방은 순식간에 흙먼지와 풀잎으로 자욱해졌다.
탓.
그사이, 거리를 벌린 염중부는 적사편을 거둬들이며 눈을 빛냈다.
“……놈.”
염중부는 이를 갈았다.
운현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자신의 검을 비스듬히 아래로 내린 채로.
후웅.
운현의 검 주위로 반짝이는 빙결체가 안개처럼 허공을 떠돌았다.
슥.
운현은 고개를 돌렸다.
“괜찮습니까?”
뒤에는 조관 일행이 서 있었다.
덩치 큰 항장익과 진예림이 검을 들고 앞을 지키고, 감찰어사 조관과 담소하가 두 사람 뒤에 서 있었다.
머리며 옷자락이 상당히 흐트러져 있긴 했지만 다친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우리는 염려 마시지요, 대인.”
항장익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조금 전 운현이 염중부의 공세를 대부분 막아 준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항장익과 진예림만이었다면 염중부의 공세를 막기엔 역부족이었으리라.
“훗.”
염중부가 비웃었다.
“저들을 지키며 내 적사편을 상대할 수 있겠느냐?”
“네.”
운현의 대답은 조금도 주저함이 없었다.
“삼태상이면 모르거니와, 당신이라면 문제 없습니다.”
으득.
염중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리고 저는 구태여 저분들을 지킬 생각은 없습니다. 저분들은 이미 대의를 위해 목숨을 걸었으니까요.”
운현의 눈동자는 빛나고 있었다.
그가 든 검의 칼날보다 더 서슬 푸르게.
“흥!”
염중부가 코웃음을 흘리며 적사편을 허공에 휘둘렀다.
짜악.
붉은 채찍이 허공에서 소리를 냈다.
“내 앞에서 혀를 놀리는 놈들은 많았다. 하지만 결국엔 그 혀가 뽑히고 목이 잘려 나갔지.”
우우우웅.
적사편이 울음을 흘리며 천천히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다.
시뻘건 기운을 머금은 적사편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허공에 몸을 세웠다.
“네가 과연 내 절기인 적사강림마저 버텨 낼지.”
후욱.
염중부는 자신의 적사편을 뒤로 젖혔다.
붉은 채찍이 허공에서 크게 용틀임을 하고, 염중부는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어디 한번 보자!”
콰자자작.
적사편이 허공을 찢으며 운현을 향해 짓쳐 들었다.
채찍을 감싼 붉은 기운은 말 그대로 가로막는 모든 것을 박살 내 버릴 듯했다.
그러나 더욱 무서운 것은 바로 적사편의 갈라진 두 끝이었다.
날카로운 무게추가 달린 끝은 가공할 기운을 머금은 채 뱀의 독니처럼 운현을 향해 내리꽂히고 있었다.
설령 운현이 채찍을 막는다 해도 그 끝은 사정없이 운현의 등을 찌를 것이었다.
슥.
그러나 운현은 짓쳐 드는 적사편에는 아랑곳 없이 천천히 검을 들어 올렸다.
두 손으로 검을 머리까지 들어 올린, 그저 그것뿐인 자세.
그러나 염중부는 물론 항장익도 진예림도, 심지어 조관과 담소하도 알 수 있었다.
높게 솟은 운현의 검에 담긴, 흡사 천 년의 거목과도 같은 그 장엄함을.
후우우웅.
“분명히 말하지만.”
조용히 운현이 말했다.
“당신은 틀렸습니다.”
훅.
운현은 그대로 검을 내리그었다.
위에서 아래로, 하늘에서 땅으로.
마치 온 세상을 가르기라도 할 것처럼.
그리고 철혈사왕 염중부는 보았다.
콰자자작.
자신의 적사강림이 부서지고 있었다.
가공할 기운을 담고 있던 적사편의 두 독니 역시 운현의 검에 휩쓸려 녹아내리듯 사라졌다.
평생의 절기가 속절없이 박살나고 있었지만 그 앞에서 자신은 너무나도 무력했다.
염중부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 무엇도 운현의 검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그 어떤 것도 자신을 향해 떨어져 내리는 검을 멈출 수 없다는 것을.
‘이, 이럴 수가…….’
콰과과과각.
염중부는 경악하며 눈을 치떴다.
그의 눈앞에서, 말 그대로 하늘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백호실전검 제삼식, 중검(重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