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검전 리마스터-290화 (290/530)

290화. 실낱같은 가능성

태평맹의 고수, 당일기는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이번 일을 통해 태평맹과 조가장의 관계에 큰 진전이 있을 것을 의심치 않습니다.”

“이, 이럴 수는 없소!”

조웅의 격노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버지! 안 됩니다!’

조홍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부친 조웅의 심정은 넘치도록 이해가 간다.

그러나 그 결과는 너무나 뻔한 것이 아니던가?

“강호 무림의 도의가 살아 있거늘 어찌……!”

당일기는 여유로운 미소를 잃지 않은 채 말했다.

“허허, 태평맹에 먼저 도움을 요청하신 분은 바로 조 장주가 아니시오?”

“하, 하지만!”

“그리고 태평맹이 이곳에 자리잡도록 앞장서서 협력해 주신 분 역시 조 장주시외다.”

“그렇지 않소! 그것은…….”

“그러면.”

당일기의 표정이 한순식간에 바뀌었다.

“조 장주께서 태평맹의 현판을 내리기라도 하겠다는 말씀이시오?”

후욱.

엄청난 살기가 당일기에게서 쏟아져 나왔다.

현판을 내리게 한다는 것은 곧 전면적인 최후통첩이다.

천하에 감히 누가 태평맹의 현판을 내리게 한단 말인가?

당일기의 모습은 마치 분노한 맹수 같았다.

“으윽.”

“큭.”

여기저기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조웅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당일기는 이곳에 있는 장주들과 문주들을 살기만으로 짓눌러 버릴 정도의 고수였던 것이다.

“……물론.”

훅.

한순간에 살기가 사라졌다.

당일기는 미소를 머금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 뜻은 아니리라 생각하오. 그렇지 않소? 조 장주.”

웃고 있지만 섬뜩한 그 눈빛 앞에서 조웅은 제대로 대답조차 하지 못했다.

슥.

당일기는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태평맹은 여러분과 좋은 관계를 맺기 원합니다. 여러분의 적극적인 협조를 기대합니다.”

당일기는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사람들은 감히 숨조차 크게 쉬지 못했다.

“그럼, 편안히 즐겨 주십시오.”

그 말을 끝으로 당일기의 인사는 끝났다.

다시 음악이 흘러나오고, 연회장은 천천히 활기를 되찾아 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하얗게 질린 조웅의 표정은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이런 게, 이런 게 아니었는데……. 이런 게…….”

신음처럼 조웅이 중얼거렸다.

아들 조홍은 입술을 깨물었다.

“아버지…….”

당장이라도 이 자리를 박차고 싶었지만 함부로 일어설 수도 없었다.

여기서 더 태평맹과 척을 졌다가는, 조가장의 이름조차 지킬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조홍은 입술을 깨물었다.

피가 나올 듯했지만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느낄 수 없었다.

그날, 조가장으로 돌아온 장주 조웅은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충격이 너무나 컸던 탓일까? 병석에 누운 조웅은 쉽게 일어나지 못했다.

아들 조홍이 어려운 중에도 백방으로 의원과 영약을 알아보았지만 모두들 고개만 저을 뿐이었다.

***

태평맹 대외 총괄군사 당설련의 집무실.

바스락.

서류를 살펴보던 당설련은 문득 미소를 머금었다.

“조가장에서 의원을 요청했네?”

“네. 결국 당문의 의술에 의지하기로 한 것 같습니다.”

수하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당설련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 조웅의 병은 오직 당문만이 치유할 수 있으니까.

“아들이 그래도 똑똑한 편이군.”

“네. 아비와 달리 아주 협조적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믿을 수는 없지.”

사락.

보고서를 내려놓으며 당설련은 말했다.

“자신들이 피해를 입었다고 생각하는 자들이야. 언제고 원한을 갚으려 들 테니 이 점을 잊지 말라고 당일기에게 전해.”

“네.”

“흠, 이제 섬서성에도 기반을 마련한 셈인가?”

서안은 대도시지만 큰 이득을 보기 힘든 곳이었다.

화산을 자극할까 우려하여 적극적인 활동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상주야말로 태평맹이 노리던 전략적 지역이었다.

이제 그 노력이 결실을 맺었으니, 상주로부터 들어오는 이익이 작지 않을 터였다.

“조가장의 요청은 어떻게 할까요?”

“보내야지. 신의는 지켜야 하니까.”

당설련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녀의 손에 들린 서류에는 당일기가 하독(下毒) 한 상주의 주요 인물들에 대한 상세한 목록이 들려 있었다.

대부분은 자각증상이 없겠지만, 언제라도 그녀가 마음만 먹으면 조가장주처럼 쓰러지게 될 것이다.

“하지만.”

바스락.

목록을 내려다보며 당설련이 말했다.

“조가장주는 나이가 많아. 다행히 병이 완쾌되더라도 노인들은 그 후유증으로 오래 못 버티곤 하더라고. 안타깝게도 말이야.”

그것은 조가장 장주 조웅의 사망선고였다.

당설련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아들이 위독하다는 소식은 내년 이맘때쯤 올라오면 좋겠어. 효심이 깊은 아들이니 부친상을 마치고 시름시름 앓는 것도 어색하지 않을 테고.”

“알겠습니다.”

수하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명을 받들었다.

당설련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 이제 일차 확장 계획이 끝난 셈이니까…….”

바스락.

새로운 서류를 들어올리며 당설련은 사뭇 즐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대회를 열 차례지?”

그녀는 반짝이는 눈빛으로 서류를 내려다보았다.

그곳에는 태평맹 무림용봉지회라는 글자가 날아갈 듯한 필체로 적혀 있었다.

“후후, 그립네.”

태평맹 대외 총괄군사, 당문설화 당설련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녀의 붉은 입술이 불빛아래 고혹적으로 반짝였다.

***

관의 깃발을 올리고 관도를 달리는 운현 일행에게는 거칠 것이 없었다.

십여 기의 기마가 운현이 탄 사두마차를 번갈아 호위하고, 삼십 명의 관군과 짐을 실은 두 대의 커다란 마차가 그 뒤를 따랐다.

운현은 감찰어사 일행에게도 마차에 함께 탈 것을 권했다.

처음엔 사양했지만 그들도 곧 운현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말을 타고 하루종일 달리는 것은 생각보다 힘든 일이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운현은 감찰어사 일행과 나름 친해질 수 있었다.

항장익과 진예림, 담소하가 정식 관원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감찰어사가 현지에서 임시로 관원을 임명하는 경우는 드물지 않았기에 운현도 금방 납득했다.

물론 정식 관료가 되고자 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테지만 말이다.

놀라운 것은 진예림의 출신이었다.

“무가(武家)의 분이시라고요?”

“네, 대인. 어사 대인께 합류한 지도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진예림이 답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어딘가 거리감이 느껴졌다.

“혹시 문파가 어디신지…….”

“대단치 않은 곳입니다. 제 무공 역시 항 오라버니에겐 미치지 못하고요.”

항장익은 고위 무관의 자제로서 무과를 준비하던 중이었다.

진예림이 말하지 않으려는 기색이 역력한지라, 운현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렇군요. 저도 무림과는 조금 인연이 있어서 여쭤 보았습니다.”

진예림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러나 그녀는 묻지 않았다.

자신이 그저 호위일 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는 무림맹에 있었습니다.”

그녀의 속내를 짐작한 운현이 먼저 말했다.

“잠시, 그것도 서기로 있었지만요.”

진예림의 눈동자에 실망의 빛이 떠올랐다.

언제나 쾌활한 담소하가 불쑥 물었다.

“그럼 항주로 가시는 건 그 때문인가요?”

항장익이 담소하에게 눈치를 줬지만 이미 늦었다.

운현은 씁쓸한 웃음을 머금었다.

“……비슷합니다.”

무림맹 때문은 아니다.

그러나 무림맹과 연관된 일이기는 하다.

무림맹이 무너지던 바로 그날 일어났던 일이니까.

두두두두.

네 마리의 말이 끄는 사두마차는 거침없이 관도를 질주했다.

그렇게 길을 재촉한 지 여러 날 만에, 운현 일행은 항주에 들어섰다.

“이후에는 배로 운하를 따라 북상할 예정입니다.”

감찰어사 조관이 운현에게 말했다.

“오래 머무를 수는 없습니다. 대인.”

“알겠습니다.”

운현은 나지막이 말했다.

그 목소리는 유난히 가라앉아 있었다.

밖으로 지나가는 항주의 풍경은 예전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그 모습을 바라보는 운현의 표정은 사뭇 어두웠다.

‘……이제야.’

돌아왔다. 진작에 돌아와야 했던 바로 이곳에.

운현은 입술을 깨물었다.

무심한 말발굽 소리만이 커다란 마차 안을 울리고 있었다.

***

커다란 객잔에 숙소를 정한 후, 운현은 조관 일행과 함께 밖으로 나섰다.

사실은 혼자 나서려 했지만 조관이 물러서지 않은 것이다.

객잔을 나온 운현은 지나는 빈 마차를 잡았다.

운현이 마부와 무언가 이야기 한 후, 일행은 마차에 올랐다.

따각, 따각.

마차는 곧 항주 시내를 벗어났다.

조관은 조금 당황했지만 운현이 누군가 은밀히 만나려는 것으로 여기고 상황을 지켜보았다.

하지만 조관의 당혹감은 운현이 관도 한복판에서 마차를 내리고, 길도 없는 평야로 걸어 들어가자 더욱 커져 갔다.

항장익과 진예림, 담소하 역시 의아한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묵묵히 운현의 뒤를 따랐다.

저벅, 저벅.

운현은 길도 없는 평야를, 그리고 숲을 헤치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정확한 목적지조차 없는 듯 이리저리 방향을 트는 통에 길을 잃은 건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그렇게 숲길을 헤치고 움직이기를 얼마나 했을까?

바스락.

수풀을 헤치자 작은 공터가 나왔다.

그제야 운현은 발걸음을 멈췄다.

이곳에 이르기까지 단 한 번도 쉬지 않았던 발걸음을.

“후우.”

조관은 숨을 가다듬었다.

그는 차분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흐음.’

주위는 평범한 숲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었다.

희미한 악취가 풍겨나고 있는 것이다.

‘이게 뭐지?’

조관은 항장익과 담소하, 진예림에게 눈짓을 했다.

세 사람은 즉시 사방을 살피기 시작했다.

담소하는 지도를 펴 위치를 확인했고, 항장익은 나무들과 주변 지형을 돌아보며 사방을 경계했다.

그러나 진예림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조관이 나지막이 물었다.

“왜 그러나?”

문득 조관은 진예림의 본가가 항주에 있음을 떠올렸다.

혹시 항주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의미가 이 장소에 있는 것일까?

“여기는……. 아니, 아니에요. 하지만…….”

진예림은 입술을 깨물며 무언가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때 항장익과 담소하가 조관에게 다가왔다.

“악취의 정체를 찾았습니다.”

“뭐였나?”

“그것이…….”

주저하는 항장익 대신 담소하가 말했다.

“시체를 묻었어요. 그것도 십여 구쯤 되는 시신들을, 제대로 깊이 파지도 않고요.”

담소하가 손짓하는 장소를 바라보며 조관은 인상을 찌푸렸다.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지형 한 곳이 불룩하게 솟아 있었다.

“누가 그런 짓을…….”

조관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운현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문득 운현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인?”

공터 한가운데 운현이 홀로 서 있었다.

두 손을 움켜쥐고 눈을 감은 운현은 금방 알 수 있을 정도로 세게 이를 악물고 있었다.

“대인, 무슨…….”

조관이 다가가며 그렇게 말할 때였다.

“……죄송합니다.”

완연히 떨리는 목소리로 운현은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어쩌면, 어쩌면 혹시…….”

그 목소리에는 스스로도 어찌할 수 없는 격동이 담겨 있었다.

조관은 의아한 표정으로 운현을 쳐다보았다.

갑자기 운현은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일까?

바로 그때였다.

“아차!”

운현은 갑자기 무엇이 생각난 듯 조관을 돌아보았다.

“빨리 이곳을 피하십시오!”

“네?”

조관은 물론 항장익과 진예림, 담소하도 의아한 눈빛으로 운현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운현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누군가 곧 이곳에 올 것입니다. 여러분이 여기에 있으면 위험합니다!”

예상치 못하게 나타난 실낱같은 가능성, 그것이 준 충격에 그만 운현은 조관 일행에 대한 것을 잊었다.

운현은 초조해했지만 조관은 더 어리둥절해졌다.

“그러면 대인께서도 피하셔야…….”

“안 됩니다. 저는……. 아!”

말하던 운현이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그 순간, 커다란 웃음소리가 사방에서 울려 퍼졌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