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9화. 태평맹의 시대
“태평맹에 말을 넣는다니?”
장주 조웅이 의아한 표정으로 총관에게 물었다.
총관은 말을 이었다.
“얼마 전 가까운 서안에 태평맹 지부가 들어왔다고 합니다. 정식 지부는 아니고 연락소 같은 것이라고 합니다만…….”
“태평맹이라…….”
장주 조웅은 그리 탐탁지 않았다.
태평맹은 세가연합체다.
과거 무림맹과 달리 이권을 추구하겠다는 것이 뻔히 보이는 데다가, 영웅맹과 적대하지 않겠다는 기회주의적 방침도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현실적인 위협 앞에서 그런 것은 무의미했다.
“……가능할까?”
“적어도 말은 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다들 무림맹에 몸을 담았던 세가들이니까요.”
“저도 찬성입니다.”
아들 조홍이 총관의 말을 거들었다.
“지금 태평맹 말고 누가 힘을 가지고 있단 말입니까? 그렇다고 영웅맹으로 갈 수도 없지 않습니까?”
“허나 태평맹이 움직이려 하겠느냐?”
“그저 이름만 빌려준다 해도 충분히 도움이 될 것입니다.”
조웅은 잠시 고민했다.
상대가 태평맹이라는 것도 탐탁지 않았고, 여기저기 손을 벌려야 한다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어차피 결론은 정해져 있었다.
“총관.”
장주 조웅이 말했다.
“자네가 수고해 줘야겠네. 돈은 얼마가 들어도 좋네.”
부유한 상주를 장악한 조가장은 매우 풍족했다.
그 이권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돈은 얼마든지 쓸 수 있었다.
“알겠습니다.”
총관은 고개를 숙이며 장주의 명을 받들었다.
***
조가장 총관이 서안으로 떠난 지 닷새째 되던 날이었다.
탁탁탁.
“장주님!”
갑자기 들려온 총관의 목소리에 장주 조웅은 고개를 들었다.
덜컹.
집무실 문이 열리며 환한 얼굴의 총관이 들어섰다.
“오, 총관. 갔던 일은…….”
“장주님, 태평맹이 저희의 요청을 흔쾌히 수락했습니다!”
장주 조웅은 물론 아들 조홍도 크게 놀랐다.
“그게 정말인가?”
덜컹.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조웅은 말했다.
총관은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게다가 지금 태평맹의 분들께서 이곳 상주에 와 계십니다!”
장주 조웅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아들 조홍은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정말인가? 진짜로 태평맹에서 사람을 보냈다고?”
태평맹이 사정을 듣자마자 사람을 보냈다는 건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총관은 흥분하며 말을 이었다.
“그렇습니다! 지금 매화루에서 장주님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매화루라니?”
장주 조웅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이곳으로 모시지 않고…….”
“그게, 그러면 다른 문파들이 보기에 좋지 않을 거라고 하시더군요.”
조웅은 즉시 납득했다.
이곳 상주에서 태평맹은 공정한 중재자로 행세하려는 것이다.
그렇다면 형식적이라도 조가장과 거리를 두는 것이 당연했다.
“사실 태평맹은…….”
짐짓 목소리를 낮추며 총관이 말했다.
“영웅맹을 대단히 신경 쓰는 듯했습니다. 저희의 요청을 수락한 것도 실은 영웅맹의 진출을 견제하려는 이유인 듯하고요.”
“영웅맹?”
조웅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남쪽에 있는 장강 유역의 대도시 무한은 영웅맹의 것이 되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무한까지는 제법 거리가 있었기에, 여지껏 조웅은 별걱정을 하지 않았다.
‘흐음, 견제라…….’
그러나 태평맹의 입장에선 사정이 다르다.
비록 태평맹은 영웅맹을 대적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영웅맹의 세가 더 커지는 것은 바라지 않을 것이다.
이곳 상주가 장강과 내륙, 즉 무한과 서안을 잇는 길목에 있다는 것을 고려하면, 특히 사파인 소검회가 기세를 부리기 시작하는 것을 생각하면 태평맹의 판단도 납득이 간다.
“그렇군. 그럼 태평맹이 바라는 건…….”
“네, 우리 조가장과 깊은 우호 관계를 맺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더 이상 좋을 수가 없다.
조가장과 태평맹이 모두 이익을 얻는 것이니 말이다.
“잘해 주었네! 총관!”
장주 조웅은 총관을 향해 진심으로 말했다.
“아주 잘해 주었어! 허허허허!”
“감사합니다, 장주님.”
총관은 웃음을 지으며 예를 표했다.
“아, 그리고.”
문득 생각난 듯 총관이 말했다.
“저기, 태평맹 분들이, 조금 많이 오셨습니다.”
“몇 분이나 오셨나?”
“네. 모두 서른 명이 조금 넘습니다.”
그건 확실히 의외였다.
태평맹이라면 그저 고수 몇 명 보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할텐데 그렇게 많은 인원이 오다니?
“서른 명이라고?”
“네. 그래서 당분간 머물 저택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래? 그럼 아예 저택을 하나 선물하는 건 어떨까?”
아무리 조가장이라도 저택을 선물한다는 건 큰 지출이었다.
그러나 조웅은 아랑곳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걸로 태평맹과 우호관계를 맺을 수 있다면 싼 것이다.
“아버지, 그건 좀 상황을 지켜본 후에 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아들 조홍의 만류에 조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았다. 그보다 태평맹 분들이 기다린다 하지 않았나? 어서 가세.”
“네, 장주님.”
총관과 함께 장주 조웅, 아들 조홍은 매화루로 향했다.
매화루에는 총관의 말처럼 태평맹 사람들이 조웅을 기다리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중에는 당문에서 온 당일기라는 고수도 있었다.
태평맹이 결코 가볍게 사람을 보내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장주 조웅은 대단히 흡족했다.
그는 흔쾌히 태평맹 무사들이 머물 저택을 주선해 주었다.
조가장의 영향력을 과시하기 위해 협력 관계인 문파와 상단들을 당일기에게 보여 주었고, 혹시 모를 말썽을 대비하여 지역 유지와 관리들에게도 당일기를 인사시켰다.
그건 조가장이 새로운 조력자, 태평맹을 얻었음을 그들에게 각인시키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이런 조웅의 대접에 태평맹의 당일기 역시 매우 만족해했다.
그렇게 상주 조가장의 시련은 도리어 전화위복이 되는 것처럼 보였다.
***
조가장 장주 조웅과 아들 조홍, 그리고 총관은 마차를 타고 태평맹 무사들이 머무는 저택으로 향했다.
태평맹이 조가장을 초청하는 정중한 서찰을 보낸 것이다.
무도관은 물론 소검회도 같은 서찰을 받았다.
드디어 오늘, 태평맹 앞에서 세 문파의 분쟁이 마무리되는 것이다.
조가장의 일방적인 승리로 말이다.
“아버지. 무도관이나 소검회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하하, 어떻기는. 그들이 이제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
너털웃음을 흘리며 장주 조웅이 답했다.
“다들 찍소리도 못 하고 올 수밖에 없지. 태평맹 앞에서 무도관이 감히 상대나 되겠느냐?”
조홍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곧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태평맹이 무도관이나 소검회를 따로 만나지는 않았습니까?”
장주 조웅은 아들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아차렸다.
“염려 마라.”
조웅은 웃으며 말했다.
“내 그렇지 않아도 총관에게 면밀히 살펴보게 했다. 무도관도, 소검회도 태평맹 사람들을 만나지 못했다더구나.”
“그렇습니다, 도련님.”
총관 역시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사람들이 찾아오긴 했으나 문턱도 넘지 못하고 쫓겨났습니다. 저들에게는 태평맹의 초청이 아마 저승사자의 부름 같았을 겁니다. 하하하.”
그 말에 조홍도 비로소 웃음을 머금었다.
“참, 태평맹에 보낼 예물은 잘 준비했는가?”
장주 조웅의 물음에 총관은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네, 특별히 힘을 써서 최대한 성의를 보였습니다.”
“좋아.”
조웅은 흡족해했다.
“저기, 그런데……. 화산에 늘 보내던 예물은 어떻게 할까요?”
조웅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화산은 무슨. 이젠 태평맹의 시대네, 태평맹의 시대! 허허허허.”
호쾌하게 웃으며 조웅은 수염을 쓰다듬었다.
따각, 따각.
그사이, 마차는 태평맹 무사들이 머무는 저택 앞에 도착했다.
장주 조웅이 직접 보증을 서며 소개해 준 곳이다.
달칵.
마차에서 내리며 장주 조웅이 총관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이 저택의 매매 대금은 어찌 처리했나?”
총관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그것이, 태평맹 분들이 내겠다고 하셔서…….”
“어허. 귀한 손님들께 그러면 안 되지. 오늘 만나면 우리가 알아서 하겠다고 꼭 말씀드리게.”
분쟁 해결의 선물로 저택을 선물하는 건 더없이 좋은 명분이었다.
“네, 그리하겠…….”
“아, 아버지!”
먼저 내린 아들 조홍의 외침에 조웅은 고개를 돌렸다.
“왜 그러느냐? 어째서 큰 소리를…….”
그러나 조웅 역시 말을 끝맺지 못했다.
태평맹 사람들이 머무는 저택 정문에 ‘태평맹’이라는 현판이 드높이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이, 이게 대체 무슨.”
이 저택에 태평맹 사람들이 머물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현판은 그 의미가 아주 다르다.
현판을 올린다는 것은 곧 태평맹이 정식으로 이곳 상주에 진출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저벅.
“어서 오십시오.”
잘 차려입은 중년의 사내가 저택 안에서 나타났다.
그는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조가장 분들이시지요? 다른 분들께서는 이미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장주 조웅은 당혹스럽기 그지 없었다.
그때 아들 조홍이 중년의 사내에게 물었다.
“다른 분들이라니? 그리고 당신은 누구시오?”
“저는 이곳의 부총관입니다.”
중년 사내는 여유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러 문파의 어르신들은 물론, 상단의 분들과 고위 관료들께서도 이미 자리하고 계십니다. 여러분도 어서 드시지요.”
그건 조홍의 예상을 뛰어넘는 대답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조홍을 절망케 하는 말이기도 했다.
‘아아! 이럴 수가…….’
중년 사내의 대답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했다.
태평맹의 현판은 착각도, 실수도 아니다.
오늘, 태평맹은 상주에서 정식으로 현판을 내건 것이다.
동시에 상주의 모든 이권을 하루아침에 집어삼킨 셈이 되었다.
마차 안에서 장주 조웅이 했던 말처럼 감히 태평맹과 맞설 세력은, 상주에는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일단 들어가자.”
장주 조웅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저벅, 저벅.
부총관의 안내에 따라 조웅과 조홍, 총관은 안으로 들어섰다.
이미 알고 있던 저택이지만 그 내부는 며칠 만에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악사들의 음악이 흐르고, 넓게 차려진 자리마다 호화로운 음식이 가득했다.
“허허, 어서 오시오.”
가장 상석에 앉아 있던 당일기가 일어났다.
화려한 옷을 입은 당일기는 미소를 지으며 예를 표했다.
“조가장 여러분을 태평맹의 이름으로 환영하오.”
그의 말과 동시에 몇몇 사람들의 날카로운 시선이 장주 조웅을 향했다.
“흥!”
그는 무도관 관주였다.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은 주제에 뻔뻔하게도 얼굴을 들이밀었군!”
관주의 목소리엔 가시가 가득했다.
그로서도 한순간에 상주의 이권을 날린 셈이니 어찌 그렇지 않으랴?
“무, 무슨 소리인가! 나는…….”
장주 조웅은 말을 잇지 못했다.
다른 문파들의 시선 역시 날카롭게 날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부총관이라는 중년 사내의 안내에 따라 조웅과 그 일행이 자리에 앉자, 당일기가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이렇게 왕림해 주신 상주의 여러 귀빈께 태평맹의 이름으로 감사를 표하는 바입니다.”
당일기는 손님들을 향해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상주는 예로부터 산세가 빼어나고 인걸이 모여드는 곳이라 하였으니, 오늘 이곳에 태평맹의 현판을 걸게 된 것을 저 당일기는 참으로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사실 산세도, 인걸도 그리 빼어난 편은 아니다. 다만 관도의 요충지로서 재물은 많이 모여들지만 말이다.
이제 그 모든 재물은 태평맹으로 흘러 들어가게 될 것이다.
“앞으로 태평맹은 상주의 안녕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특히 여러모로 도와주신 조가장 분들께…….”
당일기는 조웅을 향해 두 손을 모아 예를 표하며 웃었다.
“깊은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