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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288화 (288/530)

288화. 축하해요 오라버니

뻔뻔하기까지 한 운현의 대답에 운희연은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운현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더 이상 누이에게 걱정을 시키지 않아도 되니까.”

“거, 걱정 같은 건 하지 않았어요!”

운희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하고 싶은 말은 이게 아니었는데 이상하게 꼬여만 간다.

“나, 나는…….”

어렵사리 말을 꺼내려 했지만 얼굴만 붉어질 뿐이다.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 텐데, 두 손에 움켜진 옷자락만 애매히 구겨지고 있었다.

“……해요.”

“응?”

운현이 반문하자 운희연의 얼굴이 빨갛게 되어 버렸다.

“에잇!”

탁.

운희연의 고운 비단신이 운현의 발끝을 차 버렸다.

“미안하다구요!”

그 말을 끝으로 운희연은 안으로 뛰어 들어가 버렸다.

탁탁탁.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것 참, 과격한 사과네.’

운현으로선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지만, 그것에 담긴 진심만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어쩌면 자신이 좀 더 어른스럽게, 예컨대 하영령에게 그랬듯이 운희연에게 다가갔다면 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땐 그럴 여유가 없었지만.’

어쩐지 그때가 아주 오랜 예전처럼 느껴졌다.

저벅.

그때 감찰어사 조관이 다가왔다.

“준비가 끝났습니다, 대인.”

조관 뒤에는 항장익과 담소하, 그리고 가벼운 무복을 입은 진예림이 서 있었다.

운현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 역시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출발하기 전에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운현은 조관에게 말했다.

“북경에 가는 도중에 항주를 들러야 합니다. 가능하겠습니까?”

항주라면 북경을 가는 중간이다.

본래 생각하던 여정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아서, 조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라면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운현은 몸을 돌려 숙부 운일평과 강 총관에게 다시 예를 표했다.

“소식 전하거라.”

“네, 숙부님.”

정중히 예를 표한 운현은 마차에 올랐다.

다른 사람들도 각자 말에 오르고, 조관이 크게 외쳤다.

“가자!”

행렬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도지휘사사로 돌아갈 병력과 북경으로 가는 일행이 한꺼번에 움직이니 그 모습이 가히 장관이었다.

히히힝.

다각, 다각.

흙먼지를 일으키며 그들은 운가상단을 떠났다.

지켜보던 운일평은 깊은 숨을 내쉬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강 총관은 남아 있었다.

멀어져가는 마차를 바라보던 강 총관이 문득 말했다.

“아쉽습니까? 아가씨.”

“응.”

운희연이 나지막이 말했다.

안으로 뛰어들 어갔던 그녀가 어느새 강 총관 옆에 서 있었던 것이다.

“이제 좀 친해질까 싶었는데, 이렇게 금방 떠날 줄은 몰랐어.”

한숨을 쉬며 그녀가 말했다.

“오라버니라고 부르고 싶었는데…….”

“아주 늦은 건 아닙니다.”

강 총관이 말했다.

“글로는 더 쉽기도 하고요.”

운희연은 피식 웃었다.

“아직도 옛날 그 얘기를 하는 거야?”

운희연이 어렸을 때, 북경에 있는 학사라던 사촌 오라버니를 만나고 싶어서 서찰을 쓰려 한 적이 있었다.

그때 도와준 사람이 바로 강 총관이었다.

결국 서찰은 보내지 못했지만 말이다.

“다시 한번 써 보시지요.”

강 총관은 싱긋이 웃으며 말했다.

“이제 제 도움이 필요 없으실 테니까요.”

운희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강 총관은 확신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가 건네주는 서찰을 표국에 전하게 되리라는 것을.

운현이 소식을 전한다 했으니 그 답장과 함께 보내면 될 것이다.

“이제 문을 닫아야겠습니다.”

아직은 햇살이 따뜻한 오후였지만 강 총관은 문을 닫기로 했다.

오늘만큼은 느긋한 오후를 즐겨도 될 테니까.

끼이익, 쿵.

내일 아침 이 문을 열 때는 오늘보다 더 좋은 소식들이 들어오기를 바라며 강 총관은 운가상단의 문을 닫았다.

하청상단에서 온 심부름꾼이 문을 두드린 것은 그로부터 조금 지난 후의 일이었다.

***

다음 날, 광주는 운가상단에 대한 소문으로 시끌벅적했다.

포정사와 안찰사, 도지휘사가 운가상단에 머물던 ‘귀인’을 직접 찾아갔다는 말이 놀라움과 함께 퍼져 나갔다.

눈치 빠른 상단들은 운가상단에 줄을 대기 시작했고, 경쟁 상단들은 헛소문이라며 애써 의미를 축소했다.

실제로 소문은 며칠 지나지 않아 사그라들었다.

하지만 운가상단이 하청상단과 긴밀한 협력 관계를 맺고 포정사사의 물자 조달까지 맡게 되자 아무도 그 소문을 부인할 수 없게 되었다.

운가상단의 위상은 단숨에 높아졌고 모든 광주 상단들의 관심과 부러움을 받았다.

그중에는 광주에 진출한 호암상단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바스락.

희고 가느다란 여인의 손 끝에서 서찰이 소리를 냈다.

“하아, 정말이지…….”

붉은 입술 사이로 한숨을 흘리며 여인이 말했다.

“언제나 당신은 날 놀라게 하네요.”

나른한 듯 말하는 그녀는 바로 호암상단의 영애, 이서연이었다.

작은 등 하나만이 불을 밝힌 내실에서 이서연은 탁자에 반쯤 엎드린 채 서찰을 손가락으로 들어 올렸다.

사락.

“포정사에 안찰사 그리고 도지휘사라니…….”

이서연의 옷차림은 상당히 흐트러져 있었다.

긴 머리카락이 어깨와 목덜미로 이리저리 흘러내렸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대체 뭘 어떻게 한 거예요? 운 오라버니.”

그녀가 보고 있는 서찰은 광주 지부에서 온 것이었다.

그곳에는 운가상단의 변화와, 소문의 그 ‘귀인’이 낙향한 전직 학사 운현일지도 모른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운현이 광주에 있었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그 후에 일어난 일은 이서연에게도 놀라움이 아닐 수 없었다.

달그락.

이서연은 옥으로 된 작은 술잔을 들어 올렸다.

정교하게 조각된 문양들이 그녀의 손가락 사이에서 빛나고, 찰랑이는 호박색 액체에서는 향기로운 내음이 흘렀다.

그 향을 음미할 사이도 없이 이서연은 옥잔 안에 담긴 것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탁.

잔을 내려놓은 이서연은 나지막한 웃음을 흘렸다.

“후후후.”

은은한 불빛 아래 그녀의 입술이 붉게 반짝였다.

“황궁 학사였다더니, 그저 책만 읽고 있던 것은 아니었나 봐요?”

유혹하는 듯 몽롱한 눈빛으로 그녀가 말했다.

하지만 그녀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저 미주(美酒)가 담긴 술병과 작은 옥잔뿐.

“하긴 당신이 학사였다는 것도 믿을 수 없는 이야기니까요.”

중얼거리던 이서연은 문득, 요염한 한숨을 지었다.

“하아, 정말 어떻게 된 거죠? 진짜로 무공을 다 잃은 건가요? 단전이 부서지고 폐인이 되었다는 건 사실이었어요? 그 엄청난 검이, 영영 사라져 버렸단 말인가요?”

이서연은 그날 밤 자신이 본 광경을 떠올렸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가슴이 뛰고 오한이 등을 내달렸다.

그 충격이, 그 놀라운 광경이 지금도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그런 사람이.”

이서연은 쓴웃음을 지었다.

“갑자기 조정의 귀인이라…….”

정말로 운현은, 창룡검주는 무공을 전부 잃었을까?

그래서 이런 식으로밖에 재기할 수 없었던 것일까?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그 무엇 하나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고 보면 당신에 대한 건 전부 못 믿을 것들투성이네요? 그저 당신이라는 사람이 존재했었다는 것만이……. 아니, 그것도 아니지요.”

자조적인 웃음을 흘리며 이서연은 중얼거렸다.

“어쩌면 당신은 환상일지도 모르겠네요. 어리석은 내 마음이 만들어 낸 허상 말예요. 실제로는 존재하지도 않는……. 후후후.”

웃던 이서연은 자신의 팔을 괴고 눈을 감았다.

어쩌면 잠든 것처럼 보였지만, 그녀는 문득 허공에 손가락질을 했다.

“축하해요, 오라버니. 하지만 너무 크게 되지는 말아요.”

혀가 꼬인 듯한 목소리로 이서연은 말했다.

“그러면 거둬들여야 할 때가 되고 마니까.”

이서연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탁자에 엎드리듯 몸을 기댔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후우.”

사락.

어느 순간, 이서연은 깊게 숨을 들이쉬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손을 뻗어 작은 종을 들어올렸다.

딸랑.

종이 울리자 문이 열리고 하녀가 들어왔다.

이서연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시작해.”

그녀의 눈빛에 취기는 전혀 없었다.

남궁세가에서 수련한 그녀에게 이 정도의 술은 그저 기분을 달래기 위한 정도에 불과했으니까.

사락.

하녀는 즉시 예를 표하고 불을 밝혔다.

내실이 대낮처럼 환해지고, 다른 하녀들이 들어와 이서연의 화장을 시작했다.

화장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하녀들이 이서연에게 새 옷을 입히고 준비가 끝나자, 바깥에서 중년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무총관님, 준비가 끝났습니다.”

스륵.

이서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또렷하게 빛나는 눈동자로 이서연은 말했다.

위엄과 냉정함이 동시에 묻어나는 평소의 그녀다운 목소리였다.

자박, 자박.

천하삼대상단의 하나로 손꼽히는 호암상단의 사무총관, 이서연은 거침없이 걸음을 옮겼다.

***

조가장은 섬서성 상주에 위치한 문파였다.

삼국시대 조자룡의 창법이라는 조가창법을 가전무공으로 내세우고 있었지만 늘 그렇듯 그 진위를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정사대전 이후 조가장은 무림맹, 특히 북쪽의 대도시 서안을 장악한 화산파와 돈독한 친분관계를 유지해 왔다.

덕분에 조가장은 지방도시 중에서도 제법 번화한, 주요 관도의 길목인 데다가 커다란 기루가 세 곳이나 있는 상주의 터줏대감으로 자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항주 혈사로 무림맹이 무너지자 상주 조가장의 상황도 변하기 시작했다.

“그래, 다친 제자들은 용태가 어떠한가?”

조가장 장주 조웅이 물었다.

총관은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목숨에는 지장이 없다고 합니다. 허나 상처가 중하여 여러 달 요양해야 하는 데다, 후유증 또한 만만치 않을 것이라고…….”

“아버지, 이번 일은 결코 일상적인 시비가 아닙니다.”

앞에 앉은 아들, 조홍이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무도관이 아무래도 소검회를 끌어들인 것 같습니다.”

무도관은 늘상 조가장과 경쟁해 오던 무관이다.

늘 크고 작은 시비가 끊이지 않았는데 이번에 주루에서 크게 칼부림이 났다.

문제는 그 싸움에 평이 좋지 않은 사파인 소검회까지 끼어들었다는 것이다.

평범하게 술을 마시던 조가장 제자들은 큰 부상을 입고 도망쳐야 했다.

“그리고 저들이 소검회까지 끌어들였다면 이미 다른 문파나 무관 들과 손을 잡았을 가능성도 높습니다.”

무도관과 소검회 모두 조가장에는 못 미치나 손을 잡았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게다가 다른 문파들까지 연합했다면 심각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아버지.”

아들 조홍은 나지막이 말했다.

“화산에 다시 사람을 보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조가장은 화산파에 특히 많은 공을 들여 왔다.

그러나 총관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답했다.

“도련님, 제가 벌써 세 번이나 찾아가 보았습니다만 대답은 똑같았습니다. 화산파는, 적어도 당분간은 전혀 움직일 생각이 없습니다.”

이런 문제가 일어나는 이유는 간단했다.

화산파가 소리 소문 없이 모든 외부 활동을 중단해 버린 것이다.

전통적인 거대 문파인 화산파가 이럴 줄은 몰랐던 터라 조가장은 말 그대로 궁지에 몰려 있었다.

“소검회는 갑자기 왜 끼어들었다던가?”

장주 조웅이 총관에게 물었다.

총관은 착잡한 표정으로 답했다.

“영웅맹이 설립된 이후 곳곳에서 사파의 세력이 크게 늘어났다고 합니다. 최근 소검회도 사람이 많아졌다는데, 아마도 이 기회에 세력을 넓히려는 것 같습니다.”

무림맹이 무너지고 영웅맹이 들어선 영향은 컸다.

장강 유역에서 수적과 녹림이 위세를 떨치고 다니자 여기저기에서 사파가 덩달아 득세하기 시작한 것이다.

“허어.”

조가장 장주 조웅은 신음처럼 한숨을 흘렸다.

무림맹이 무너지고 화산파가 두문불출하니 대책이 없다.

그 사실을 아들 조홍도 잘 아는 터라, 그저 침묵만이 흐를 뿐이었다.

“저기…….”

총관이 주저하며 말을 꺼냈다.

“태평맹에 말을 넣어 보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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