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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287화 (287/530)

287화. 유학이야, 유학

광주, 하청상단.

“아유, 아가씨. 짐을 좀 줄이세요.”

하녀의 투정에도 하영령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하영령은 걸어 놓은 옷들 사이를 천천히 돌아다니며 몸에 대 보기도 하고 상태를 살피기도 했다.

마치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와 시간을 보내는 것처럼.

“이 옷도 아직 괜찮네. 이것도 싸도록 해.”

“아이 차암. 이것도 싸요?”

하녀는 하영령이 건네주는 옷을 받아들며 투덜거렸다.

그녀 앞에는 차곡차곡 정리된 옷이 벌써 한가득이었기 때문이다.

“대체 아가씨는 어딜 가시기에 이렇게 갑자기 옷을 챙기고 그러세요?”

“유학이야, 유학.”

“유학? 어디로 놀러가신다구요?”

하영령은 어이가 없다는 듯 하녀를 쳐다보았다.

“놀러가는 게 아니고 고모님 댁에 간단 말이야. 조신한 아가씨가 되는 공부를 하러 말이야.”

하녀는 놀란 눈으로 하영령을 쳐다보았다.

“아니, 고모님 댁요? 거긴 남경(南京)이잖아요?”

“그래.”

하영령은 옷을 고르는 손길을 늦추지 않으며 말했다.

“그러기로 했어. 이번 혼담을 없던 일로 하는 대신……. 아, 이 옷이 아직도 있었네?”

알록달록한 문양이 새겨진 옷을 꺼내들며 하영령은 반색을 했다.

“이런 웃긴 옷을 좋아라 하고 입고 다녔으니, 그때는 나도 참 어렸지.”

하녀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하긴 재작년이라 해도 지금보다 어린 건 맞다.

“그나저나 아가씨도 대단하세요. 혼담을 없었던 일로 하시다니. 대체 어떻게 어르신의 마음을 돌리셨어요?”

“그야 간단하지.”

하영령은 옷을 살펴보며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딸이 눈물을 뚝뚝 흘리는데 마음 안 돌릴 아빠가 어디 있겠어?”

“우셨어요?”

하녀는 놀란 얼굴로 물었다.

평소 하영령의 모습을 보자면 도저히 상상이 안 가는 이야기였다.

“응.”

하영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아빠가 화내더라. 그렇게 싫은데 왜 진작 얘기 안 했냐고. 그럼 좋아할 리가 있겠어? 참나, 그런 당연한 일을…….”

헛웃음을 흘리던 하영령은 말을 이었다.

“어쨌든 그 자리에서 바로 총관을 운가상단으로 보냈어. 혼담 거두라고 말이야. 하아, 이건 비장의 수단이라 자주 써먹을 수도 없는 건데.”

하영령은 어깨를 으쓱했다.

“어쩔 수 없지, 뭐. 다음번에 또 쓰려면 한 삼사 년 지나야 될려나…….”

하녀는 혀를 내둘렀다.

하영령이 울다니, 그것도 눈물을 뚝뚝 흘리며.

도저히 상상도 가지 않는 일이었다. 평소의 하영령이라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하지 않을 행동이 아닌가?

‘그렇게 그 남자가 싫었나?’

하녀가 고개를 갸웃하는 동안, 하영령은 다른 옷을 몸에 대 보았다.

“음. 나도 많이 컸네. 허리는……, 그대론가?”

“안 맞거든요?”

하녀의 한마디에 하영령의 눈초리가 사나워졌다.

하녀는 짐짓 딴청을 피웠다.

“여하튼 그렇게 돼서.”

하영령은 그렇게 말하며 들고 있던 옷을 구석으로 휙 던졌다.

그곳엔 벌써 한 무더기의 옷이 아무렇게나 쌓여 있었다.

“당분간 남경 고모님 댁에 가 있기로 한 거야. 사랑에 상처받은 여린 마음을 달래려면 여행이 최고 아니겠어?”

“그러니까 결국 근신이네요?”

“근신이 아니라 유학이라고.”

전혀 맞장구쳐 주지 않는 하녀를 한 번 흘겨보고 나서, 하영령은 말을 이었다.

“요즘 광주에서 내 소문이 너무 안 좋은 것 같기도 하고, 당분간 남경에 가 있는 것도 괜찮겠지. 이 기회에 고모님께 신부 수업도 받고 말이야.”

그게 핑계란 건 하녀도 잘 알고 있었다.

본래 하영령은 소문 따위 신경도 쓰지 않으니까.

“어휴, 고모님 성격이 보통 깐깐하신 게 아니라던데…….”

“설마 조카를 잡아먹기야 하겠어? 그리고 너도 있잖아.”

“네에?”

하녀는 옷을 챙기다 말고 깜짝 놀란 눈으로 하영령을 바라보았다.

“저, 저도 가요?”

“그럼 내가 가는데 네가 안 가려고?”

“우왓! 정말요?”

“응.”

하영령이 고개를 끄덕이자 하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녀의 얼굴은 놀라운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가씨! 고마워요!”

하녀는 한달음에 하영령에게 달려오더니 목을 꽉 끌어안았다.

이곳 광주가 번화한 도시라지만 예로부터 문화 도시로 알려진 남경에 비하지는 못한다.

게다가 남경은 절경으로 이름난 항주, 소주와도 가까운 지역이 아니었던가?

젊은 하녀에게는 꿈만 같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얘는, 뭘 그걸 가지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지만, 하녀의 기뻐하는 모습에 하영령의 입가에도 저절로 미소가 걸렸다.

“아이고, 내 정신 좀 봐.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얼른 짐을 챙겨야죠. 얼른, 얼른.”

하녀는 부산을 떨며 옷을 챙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하영령은 오히려 마음 한구석이 허전해지는 것을 느꼈다.

‘……정말 떠나는구나.’

태어나서 한 번도 광주를 떠나 본 적이 없었다.

당분간이라고는 하지만 진짜로 광주를 떠난다 생각하니 여러 가지 상념이 마음속을 오갔다.

아련한 마음 한편으로 떠오르는 것은, 그날 밤 주강에서 보았던 그의 어수룩한 모습과 당황한 표정들이다.

“훗.”

하영령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머금었다.

지금도 생생하게 스쳐 가는 그날 밤의 추억들.

슥.

하얀 손가락으로 하영령은 자신의 붉은 입술을 살짝 매만졌다.

스쳐 지나간 한순간이었지만 아직도 그 감촉이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

문득 하영령은 자신의 얼굴이 붉어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혹시라도 하녀에게 들킬까, 하영령은 얼른 고개를 돌렸다.

“아, 이것도 가지고 가야겠다.”

짐짓 쾌활한 목소리로 하영령은 말했다.

하지만 감상적이 되는 마음을 어쩔 수는 없었다.

‘아마 다시는 만날 수 없겠지?’

침울해지던 하영령은 곧 고개를 붕붕 저었다.

이런 생각은 자신에 어울리지 않는다.

그녀는 언제나 당차고 진취적인, 그래서 매력적인 하영령이 아닌가?

“힘내자, 하영령! 아자, 아자!”

“네?”

갑작스러운 하영령의 말에 하녀가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하지만 하영령은 아랑곳 않고 말했다.

“아참, 너 말이야. 검 하나만 구해 놔. 멋지고 늘씬한 걸로.”

“검요?”

하녀는 눈살을 찌푸렸다.

“갑자기 검은 왜……. 무술 하시게요?”

“아니.”

하영령은 싱긋 웃으며 답했다.

“남자 고르는 데 쓸 거야. 알고 보니 그게 효과가 좋더라고.”

“네에?”

하녀는 어이가 없었다.

남자 고르는 데 무슨 검을 쓴단 말인가?

하지만 하영령은 콧노래까지 부르며 다시 옷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동자는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

광주, 운가상단.

대관들이 돌아가고 운현은 비로소 숙부 운일평과 이야기를 나눌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강 총관과 숙모는 물론, 사촌동생 운희연도 자리했다.

설명은 별로 필요하지 않았다.

일이 대강 어찌 된 것인지는 모두가 보았던 데다가, 내막에 대해서는 운현도 말할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 다시 조정의 일을 하려는 것이냐?”

숙부 운일평이 물었다.

관직이 아니라 조정의 일이라 표현한 것은 그도 일의 성격을 대충 짐작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저도 자세히는 모르오나, 아마도 그렇습니다.”

박 환관의 초청에 응한 것은 그의 뜻을 따르겠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정확한 내용은 만나 봐야 알겠지만 말이다.

“그래, 그렇구나.”

숙부 운일평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관의 생리를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하룻밤 사이에 하늘로 오르기도 하고,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지기도 하는 것이 바로 권력 아니던가?

“그동안 보살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다. 우리가 무슨…….”

운현의 말에 운일평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

진심으로 운현은 말했다.

넓은 천하에 갈 곳이라고는 오직 이곳밖에 없었다.

폐인 같던 자신을 받아 준 곳도, 그리고 다시 일어날 수 있도록 기다려 준 사람들도 오직 이들밖에는 없었다.

어쩌면 비록 작은 선의라고도, 혈육이니 당연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으나 당사자인 운현에게는 너무나 소중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운현은 정중하게 숙부와 숙모, 그리고 강 총관에게 예를 표했다.

운일평은 대견한 듯 고개를 끄덕였고, 숙모는 작은 헛기침으로 미안한 마음을 대신했다.

강 총관 역시 정중한 답례로 그의 마음을 전했다.

“바로 떠나려느냐?”

숙부 운일평이 물었다.

“네. 그래야 할 듯합니다.”

일정에 대해서는 감찰어사 조관이 이미 말해 주었다.

“아참.”

운일평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하청상단에서 사람이 왔었다. 혼담은 없었던 일로 하자더구나.”

운현은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하영령이 그렇게 만들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놀란 사람들은 숙모와 강 총관, 사촌동생 운희연이었다.

“자신들의 잘못이라며 하청상단의 단주가 정식으로 사과의 뜻을 보냈다. 그쪽과의 거래 관계도 개선될 것 같더구나.”

운일평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하청상단은 광주 상단의 방식대로 사과와 보상을 하는 것이다.

운가상단에는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니 우리 걱정은 할 필요 없다. 너는 앞으로 네 일에만 신경 쓰도록 해라.”

숙부의 마음씀은 언제나 한결같았다.

운현이 폐인과 다름없을 때이건, 갑작스레 귀인 대접을 받을 때건 말이다.

아마도 그것이 피를 나눈 가족이라는 것일 터이다.

“소식 전하겠습니다.”

운현의 말에 운일평이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라.”

그것으로 대화는 끝났다.

운현은 짐을 챙기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

간단하게 짐을 챙긴 운현은 정문으로 나갔다.

짐이래 봤자 여벌 옷을 제외하면 총관이 준 검뿐이라, 사실상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정문을 나선 운현은, 생각외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음을 보았다.

히히힝.

말 울음소리를 들으며 운현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정문 앞에는 백여 명에 이르는 관군과 기마대, 그리고 마차가 도열해 있었다.

날카롭게 빛나는 창날들은 흡사 군대의 출정을 방불케 했다.

“도지휘사사에서 보낸 호위입니다.”

감찰어사 조관이 정중한 태도로 답했다.

운현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필요하다는 건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너무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줄일 수 있습니까? 가능한 최소한으로요.”

감찰어사 조관은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군사 삼십과 기마 열, 마차 세 대까지로는 줄일 수 있습니다.”

그것도 운현이 보기엔 많았다.

조관은 정중하게 말했다.

“대인의 뜻은 알겠으나, 저로서는 만의 하나를 대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명을 받은 관인의 처지를 이해하는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지요.”

이로써 북경까지 함께 할 일행의 규모가 정해졌다.

감찰어사 조관이 다시 준비를 하는 동안, 숙부 운일평과 강 총관 그리고 운희연이 배웅을 나왔다.

“먼길 조심하거라.”

“네, 숙부님.”

운일평은 운현에게 무언가를 전해 주었다.

그것은 작은 전낭이었다.

“숙부님, 이런 건…….”

“네 숙모가 주는 것이다.”

운일평의 말에 운현은 더 이상 사양할 수 없었다.

아마도 그것은 그녀 나름의 사과 표시였을 것이다.

운현은 강 총관에게도 인사를 했다.

“고맙습니다. 강 총관.”

“조심하십시오, 도련님.”

강 총관은 평소의 근엄한 표정 그대로였다.

하지만 눈가가 촉촉한 것은 감출 수 없었다.

“상단에 들어가셨어도, 도련님은 잘 해내셨을 겁니다.”

운현은 애써 눈물을 감췄다.

강 총관이 아니었더라면 자신은 아직도 폐인처럼 지내고 있었을 테니까.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운현은 사촌동생 운희연에게도 작별 인사를 했다.

“그간 고마웠어, 희연 누이.”

운희연은 뭔가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녀는 운현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갑자기 출세해서 좋겠네요?”

뾰족한 어투였지만 운현은 미소를 머금었다.

“응,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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