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5화. 북경에서 온 초청
운현은 당혹스러웠다.
안찰사는 감찰과 형법을 집행하는 총책임자다.
일단 인사도 제대로 못 한 상태라, 운현은 도지휘사 이엄한과 안찰사 장영환에게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이게 대체…….’
운현은 숙부 운일평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운일평 역시 당혹스러워하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럴 만도 했다.
감찰어사라는 청년의 소개 후에, 마차에서 세 사람의 지방 대관이 모습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광동성의 행정, 군정, 감찰의 총 책임자들이 전부 다 말이다.
“허허허.”
뚱뚱한 포정사 왕시중이 웃으며 말했다.
“다들 인사도 나누었으니 대인께서는 이리로 오시지요.”
그가 권한 자리는 가장 상석이었다.
주인인 숙부 운일평조차 그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아니, 괜찮습니다.”
운현은 정중하게 사양했다.
예가 아닌 데다가, 대체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마음이 묻어난 것일까?
운현의 목소리는 조금 딱딱했다.
“아, 그렇습니까? 하하하. 그럼 대인께서 편하신 대로 하시지요.”
포정사 왕시중은 가볍게 땀을 닦았다.
그 모습을 도지휘사는 내심 씁쓸하게, 안찰사는 고소하게 쳐다보았다.
특히 안찰사 장영환은 운현의 옆자리를 빼앗긴 것을 못내 아쉬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아, 앉도록 해라.”
문득 숙부 운일평이 말했다.
“그래야 저분들도 앉으실 것 같으니 말이다.”
아닌게 아니라 숙부 가족을 제외한 사람들은 모두 일어나 있었다.
“……알겠습니다.”
운현은 숙부에게 양해를 구하듯 예를 표하고 자리에 앉았다.
감찰어사 일행과 대관들도 그제야 편하게 자리를 잡았다.
“……어떠한 일로.”
운현의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저를 찾으셨습니까?”
묻는 운현은 감찰어사 조관을 바라보고 있었다.
운현의 짐작은 틀리지 않아서, 대관들이 나서는 통에 잠시 물러나 있던 조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벅.
조관은 운현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정중하게 말했다.
“공공께서 이것을 전하라 하셨습니다.”
‘공공?’
운현은 의아했다.
자신이 아는 사람 중에 공공이라 불릴 만큼의 세도가는 없었기 때문이다.
조관은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수실이 달린 화려한 비단으로 싸인 그것은 서찰이거나 혹은 그 비슷한 종류의 것이었다.
그나마 황상의 조칙을 의미하는 붉은 두루마리가 아니라서 운현은 내심 안도했다.
형법을 주관하는 제형안찰사에 군정 책임자인 도지휘사까지 있으니 설마 싶었던 것이다.
물론 분위기로 보아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말이다.
운현은 천천히 비단을 펼쳤다.
사락.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집중되었다.
대관들 역시 궁금하긴 마찬가지였기 대문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나온 것은, 예상한 대로 얄팍한 서찰이었다.
바스락.
운현은 서찰을 펴서 천천히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사람들은 사뭇 숨소리마저 낮춘 채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의아해하던 운현의 표정은 점차 부드러워졌다.
그리고 서찰 마지막에 이를 즈음에는 따뜻한 미소가 피어나고 있었다.
“후후.”
운현은 작게 웃었다.
바삭.
서찰을 내린 운현이 고개를 들었다.
그는 감찰어사 조관을 향해 물었다.
“박 환……, 박 공공께서 이 서찰을 전하라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박 공공께서는 지금 조정에서 어떤 직임을 맡고 계시는지요?”
“동창의 병필태감이시며, 도찰원의 모든 엄무를 관장하고 계십니다.”
운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본래 동창에서 도찰원의 업무를 관장하였던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박 공공께서는 황상의 조칙에 따라 임시로 도찰원의 모든 권한을 위임받으셨습니다.”
“그렇군요.”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신을 쳐다보는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포정사에 안찰사 그리고 도지휘사까지, 그 이름도 쟁쟁한 대관들이 하나같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난데없는 일에 당황해하고 있는 기색이 역력한 숙부 운일평과 숙모, 그리고 사촌동생 운희연과 강 총관의 모습도 있었다.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참으로 대단하군.’
권력이란 참으로 대단한 것이다.
지방 대관인 포정사와 안찰사 그리고 도지휘사까지 이런 작은 상단에 직접 왕림했다.
항주에서 찾을 때는 모습조차 보이지 않던 그들이, 한직에서 밀려난 전직 학사인 자신을 보려고 말이다.
이 모든 것이 바로 박 환관이 박 공공이 된 덕분이다.
‘박 환관…….’
운현은 서찰을 내려다 보았다.
어려울 때에 서로 마음을 터놓고 친분을 나눈 인연은 소중한 것이다.
비록 이 서찰에 담긴 것이 인간적인 정리(情理)만은 아니라 해도 말이다.
“공공께서 제게 귀인을 모시라 하셨습니다.”
감찰어사 조관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어쩐지 운현이 가지 않겠다고 할 것 같은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정확한 판단이었다.
서찰에는 가벼운 인사말만 적혀 있었지만, 동창 병필태감이 그저 얼굴이나 보자고 감찰어사를 내려 보내진 않았을 것이다.
이 얇은 서찰이 가진 무게를, 그리고 이 초청에 응하는 것이 가진 책임을 운현은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칼에는 날이 있듯이 말이다.
“……알겠습니다.”
운현이 답했다.
자신의 대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운현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예전이라면 그저 기뻤을지도 모른다.
박 환관이 박 공공이 된 것을 행운이라 생각하며, 그 덕에 자신의 처지도 좋아질 것이라고 마냥 가슴이 두근거렸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알고 있었다.
인생에 이유 없이 주어지는 것은 없다.
“가도록 하지요.”
감찰어사 조관은 즉시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감찰어사 조관! 명을 받들어 귀인을 모시겠습니다!”
그 모습은 사뭇 엄숙했다.
“허허허, 이거 축하드립니다.”
포정사가 크게 웃었다.
“광동성의 행정을 책임지는 관인으로서 대단히 기쁜 일입니다.”
포정사는 커다란 체구를 들썩이며 웃었다.
얼굴을 찡그리고 있는 안찰사나 도지휘사의 표정에는 아랑곳 않고, 포정사는 유쾌한 표정으로 옆에 서 있던 자신의 보좌관에게 말했다.
“이리 가져오게.”
보좌관은 즉시 큼지막한 목함 하나를 운현 앞으로 가져왔다.
좋은 나무에 여러 모양으로 세밀하게 장식을 한 고급스러운 목함이었다.
달칵.
보좌관은 함을 열었다.
차곡차곡 쌓인 은전과 오색찬란한 보옥들이 그 빛나는 자태를 드러냈다.
“귀인의 여정이 부디 평안하시기를 바라는 저의 작은 성의입니다.”
포정사는 빙긋 웃었다.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재물은 그 의도가 무엇이건 사람들을 숨죽이게 만들었다.
운현 역시 잠시 그 오색찬란한 귀금속들을 쳐다보았다.
이 정도면 결코 그 금액이 적지 않을 것이었다.
“이것은……?”
운현의 물음에 포정사는 느긋하게 말했다.
“북경까지의 노정에 필요한 자금입니다. 이미 감찰어사를 통해 포정사사에 요청이 들어온 바이지요. 허허허.”
말하자면 정당한 요청에 의한 공적 자금이라는 뜻이다.
감찰어사 조관 역시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하지만 액수는 분명 포정사가 정한 것일 터이다.
‘아차!’
기회를 놓친 안찰사는 속으로 혀를 찼다.
포정사가 직접 온 것을 보고 진작 예측했어야 했다.
본래 자신이 받아서 건네려던 지금을, 포정사가 직접 운현에게 밀어 넣어 버린 것이다.
부유한 광동 상단과 가장 이해관계가 밀접한 곳이 바로 포정사사다.
언제나 자금이 넘쳐나는 포정사로서는 합법적인 상납의 기회나 다름 없었다.
슥.
운현은 목함 안에서 빛나는 보옥과 은전 들을 바라보았다.
대체 몇 명이나 가는지 몰라도, 이 정도면 북경까지가 아니라 평생 여행만 한다 해도 넉넉할 듯 싶었다.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운현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 반응에 포정사의 입이 귀에 닿을 듯 한데, 운현이 감찰어사 조관에게 말했다.
“어사 대인님, 광동성 포정사님의 배려이시니 철저히 관리해 주시기 바랍니다.”
감찰어사 조관은 멈칫했다.
그러나 곧 운현의 뜻을 깨닫고 고개를 숙였다.
“반드시 그러하겠습니다.”
공식적인 자금이라면 관인이 책임지고 관리하는 것이 당연하다.
운현의 태도에 조관은 내심 호감을 가졌다.
안찰사와 도지휘사 역시 눈빛에 이채가 스치고, 포정사만이 슬쩍 표정이 굳는다.
저벅.
그사이, 조관은 보좌관에게서 목함을 받아 들었다.
보좌관은 당황한 표정이었지만, 포정사가 아무 말도 않자 순순히 목함을 넘겼다.
감찰어사 조관은 포정사에게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포정사사의 흔쾌한 협조에 감사드립니다.”
“……크흠.”
포정사의 반응은 떨떠름했지만 조관은 아랑곳 않았다.
탁.
목함이 닫히고 보옥과 은전의 광채가 사라졌다.
조관은 목함을 항장익에게 넘겼다.
항장익이 그 함을 가지고 물러나는 동안, 사람들의 시선은 목함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방금 전까지 빛나던 오색의 색채를 아쉬워하듯이.
“어흠.”
도지휘사 이엄한이 헛기침을 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그를 향하자 도지휘사는 묵직한 어조로 말했다.
“귀인의 여정을 위해 호위를 준비했소. 또한 광동성 도지휘사의 이름으로 협조 요청 공문을 작성했으니, 호위 병력이 필요하면 언제라도 각 성의 도지휘사사에 요청하시오.”
도지휘사 이엄한이 품에서 서찰을 꺼냈다.
포정사 보좌관은 눈치를 보다가 얼른 서찰을 받아 운현에게 공손히 건넸다.
“감사합니다.”
“크흠, 안찰사사에서도 공문을 작성했소이다.”
안찰사 장영환 역시 품에서 서류를 꺼냈다.
“여정 중에 혹 문제가 생기면 즉시 안찰사사에 보이시오. 어지간한 법적 문제는 모두 해결할 수 있을 것이오.”
각 성의 제형안찰사사는 감찰뿐 아니라 재판과 형법 집행에 관한 전적인 권한을 갖는다.
어지간한 문제 정도가 아니라, 초법적인 일이라도 가능할 것이다.
“뭐, 감찰어사가 계시니 그다지 소용은 없겠지만 말이오.”
안찰사는 쓴웃음을 지었다.
동창 병필태감의 명을 받은 감찰어사가 일행을 이끈다.
그러니 도지휘사나 안찰사의 서찰은 그저 부차적인 도움에 불과했다.
사락.
운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보잘것없는 촌인에게 이토록 과분한 배려를 베풀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낭랑한 목소리로 운현은 말했다.
“왕시중 포정사님, 이엄한 도지휘사님, 그리고 장영환 안찰사님.”
세 대관의 이름을 운현은 정확히 언급했다.
“운가상단까지 찾아와주신 여러분의 마음을, 저는 절대 잊지 못할 것입니다.”
운현은 천천히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어이쿠, 귀인께서 이런 예를…….”
포정사 왕시중이 호들갑을 떨며 일어서고, 도지휘사 이엄한과 안찰사 장영환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방관의 책무일 뿐이오. 마음에 두지 마시오.”
도지휘사가 담담한 표정으로 말하고, 포정사 역시 웃음을 지으며 인사했다.
“평안한 여정이 되시길 바라겠소이다.”
세 대관들이 운현에게 예를 표했다.
아마도 다시 보기 힘들 세 대관의 예와 함께, 운가상단을 뒤집어 놓았던 소란은 정리되고 있었다.
***
포정사사로 돌아가는 마차.
따각 따각.
크고 화려한 마차 안에서 포정사 왕시중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맞은편에 앉은 보좌관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괜찮을까요?”
“응? 뭐가 말이냐?”
포정사는 의아한 표정이었다.
“방금 전의 일 말입니다. 결과가 그다지 좋지 않은 듯하니…….”
사뭇 염려 섞인 말이었지만 포정사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클, 이래서 네가 아직 출세를 못하는 것이다.”
“네?”
뚱뚱한 포정사는 느긋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지 않을 것이 무엇이 있느냐? 언제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의도도 분명히 전달되었고, 내가 어느 정도의 재력을 동원할 수 있는지도 충분히 보여 주었다. 게다가 내 이름까지 확실히 기억하고 있지 않느냐?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는데, 뭐가 좋지 않다는 거냐?”
보좌관은 고개를 갸웃했다.
“허나 함을 받은 사람은…….”
자금이 든 함은 감찰어사에게 넘어갔다. 그것도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건 선을 긋겠다는 운현의 확고한 의지가 아니던가?
“쯧.”
포정사는 혀를 찼다.
“아니, 그럼 다른 사람이 보는 앞에서 그냥 넙죽 받겠냐? 어차피 나중에 돌아서 들어가게 마련이다. 너는 잘 모르겠지만 그 귀인은…….”
방금 전의 일을 다시 떠올리며 포정사는 내심 혀를 내둘렀다.
“정계에 아주 익숙한 사람이다. 그것도 대단한 고단수야. 한두 해 경력 가지고는 그렇게 노련하게 대처할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