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3화. 그녀의 거래
운현은 진지한 표정으로 하영령에게 말했다.
“위험한 일입니다.”
“뭐가요?”
칼날에서 손가락을 놓으며 운현은 말을 이었다.
“사람을 너무 믿으면 안 됩니다. 특히 젊은 남자라면 우발적으로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니까요.”
“당신도 남자면서 그렇게 얘기하네요?”
“저도 남자니까요.”
“후훗.”
하영령은 웃었다.
“뒤에 선노가 버티고 선 게 안 보여요? 선노는 어지간한 장정 서넛은 조약돌처럼 던져 버릴 수 있어요. 지금도 이 배를 한 손으로 움직이고 있잖아요.”
그녀의 말대로였다.
선노는 조용히 노를 젓고 있었지만 조금도 피로한 기색이 없었다.
평생을 강에서 지내온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러하리라.
“참 내, 남자들이란.”
하영령은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다른 여자 일에 무슨 참견이 그리 많아요? 자기가 책임질 것도 아니면서.”
운현은 할 말이 없었다.
그녀의 말이 틀린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 그럼 감상은요?”
“네?”
“방금 내 다리를 봤잖아요. 그럼 적어도 감상이라도 말해 줘야죠.”
“아니, 그건…….”
“어서요.”
하영령은 눈을 빛냈다.
그 모습이 여차하면 검을 움직일 기세라 운현은 어쩔 수 없이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예, 예쁩니다.”
“정말로요?”
“네. 아주 예뻤습니다.”
그 대답에 거짓은 없었다.
“아하하하하.”
그러나 하영령은 다시 웃음소리를 높였다.
“당신이 처음이에요. 하하하, 정말이지.”
“뭐, 뭐가 말입니까?”
따지듯 운현이 물었지만 하영령은 아예 한 손으로 배를 잡고 웃고 있었다.
“얘기하란다고 정말로 말한 사람요. 아하하하하.”
운현의 얼굴이 붉어졌다.
하지만 하영령은 아랑곳 없이 웃었다.
“느끼한 말을 하거나 아예 더듬으려는 놈은 봤지만, 정말로 감상을 애기하다니……. 아우, 웃겨. 우후후후후.”
하영령은 눈가를 찍어가며 웃었다.
하도 웃어서 눈물이 날 정도였나 보다.
운현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꿀 먹은 벙어리로 있어야 했다.
그렇게 한참을 웃어 대던 그녀는 여전히 웃음이 가득한 얼굴로 운현을 바라보았다.
“나, 예쁜가요?”
그녀의 눈동자는 물기를 머금은 채 반짝이고 있었다.
운현은 반쯤 체념한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예쁩니다.”
“좋아요.”
하영령은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혼담은 내가 처리하도록 할게요. 운가상단에는 아무런 피해가 없도록요. 대신 대가를 받아야겠어요.”
“대가요?”
“설마 빈손으로 거래를 하려고요? 그건 사기꾼이에요.”
“그럼 무엇을…….”
“글쎄요.”
잠시 생각하던 하영령은 선노를 힐끗 쳐다보고는 운현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운현이 의아해하는데, 하영령은 손으로 입 주위를 가리곤 얼굴을 가까이 했다.
사뭇 비밀 이야기라도 하는 듯해서 운현도 몸을 숙이며 귀를 가까이 가져갔다.
지나치게 다가오는 하영령의 표정이 어딘가 이상하다고 느끼는 순간, 이미 운현의 입술에는 촉촉하도 부드러운 느낌이 맞닿아 오고 있었다.
“헛!”
운현은 문득 정신을 차린 듯 깜짝 놀라며 뒤로 몸을 뺐다.
목에 칼이 놓여 있다는 것 마저 잊을 정도였다.
그러나 반대로 하영령의 입가에는 득의의 미소가 번져 가고 있었다.
“좋아요. 대가는 확실히 받았어요.”
하영령은 혀를 살짝 내밀어 자신의 입술을 핥았다.
그 모습은 더없이 고혹적이었지만 운현의 입장에서는 그보다 더 당황스러울 수가 없었다.
“이, 이게 대체…….”
“어머, 왜요? 설마 처음이었어요?”
운현의 얼굴이 대번에 붉어지고 하영령은 자신의 말이 옳았음을 확신했다.
“아니, 그 나이에 이게 처음이란 말이에요? 호호호.”
그녀의 느긋한 웃음소리에는 승자의 여유가 가득했다.
당황해하고 있는 운현에게 그녀는 결정타를 날리듯 여유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이거 어쩌죠? 난 처음이 아닌데. 남자들에게 첫 입맛춤은 의미가 크다면서요?”
그건 여자도 마찬가지지만 운현은 그런 걸 생각할 수가 없었다.
카랑.
검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하영령에게는 검이 필요 없었다.
당혹함과 부끄러움으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 운현의 표정이, 누가 지금 우위에 있는지 확실히 보여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후훗, 오호호호.”
하영령의 득의한 웃음소리가, 불빛이 빛나는 밤의 주강 위를 여유롭게 흐르고 있었다.
***
방대한 광동성의 감찰 업무를 총괄하는 안찰사는, 행정을 다스리는 포정사, 군정을 책임지는 도지휘사와 함께 최고위직 지방 대관이었다.
제아무리 큰 재력과 영향력을 가졌어도 광동성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대관 앞에서는 허리를 굽히고 고개를 조아려야 했다.
그러나 그런 지방 대관들이라 해도 긴장할 수밖에 없는 일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황실에서 내려오는 명이었다.
최대한의 자치가 보장된 대관들이라 해도 황실의 명에 거역하는 것만은 결코 용서되지 않았다.
더구나 지방 대관들은 항상 중앙으로 진출하는 것을 원하고 있었기에 황실의 움직임과 중앙의 상황에 대해 그 누구보다도 민감했다.
그러므로 오늘, 동창에서 내려온 명령서에 광동성 안찰사가 긴장과 초조를 감추지 못하고 있는 것도 지극히 당연했다.
“이게 대체 무슨 뜻인가?”
광동성 안찰사 장영환은 눈살을 찌푸렸다.
화려한 관복을 차려입은 그의 손에는 방금 도착한 두루마리가 쥐어져 있었다.
황금색 용 문양이 선명한 붉은색 비단 두루마리가 의미하는 것은 바로 지엄한 황실의 뜻을 담은 조정의 명이라는 뜻이었다.
“그, 글쎄요. 일단 적혀 있기로는 순행 중인 감찰어사의 특별 임무에 적극 협조하여 추호도 부족함이 없도록 하라는 것입니다만…….”
안찰사를 보좌하는 하급 관리는 땀을 닦으며 답했다.
하지만 안찰사는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누가 그걸 모르나? 대체 그 특별 임무라는 것이 무엇인가 말이야!”
“일단은 포정사사와 도지휘사사에도 같은 명령이 전달된 것을 확인했습니다. 허나 현재로서는 무어라 말씀드리기가…….”
“그러니 더 문제가 아닌가!”
쾅.
안찰사는 책상을 내리쳤다.
같은 대답을 반복할 수밖에 없는 보좌관의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자신도 그만큼이나 답답하고 초조했기 때문이다.
“포정사와 도지휘사에게도 같은 명령서가 갔네! 그런데 이런 심상치 않은 일에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게 대체 말이나 되는가 말일세!”
안찰사는 굵은 눈썹을 찌푸렸다.
“지금 광동성을 담당하는 감찰어사가 누구라 하던가?”
“그, 그것이 당장 알 수는 없사옵고 북경으로 기별을 보내 은밀히 알아보는 수밖에는…….”
순행 감찰어사의 신분은 기밀에 속한다.
그러나 이리저리 얽힌 관료들의 인맥을 따라가다 보면 알아내는 것도 어렵지는 않은 일이다.
문제는 북경에 기별을 보내 답을 받자면 여러 날이 걸린다는 점이다.
당장 도움이 안 될 것은 뻔했다.
“그걸 언제 기다려? 결국 모른다는 뜻 아닌가!”
안찰사의 호통에 보좌관은 움찔했다.
“에이!”
분를 이기지 못한 안찰사가 투덜거렸다.
“쯧, 그럼 감찰어사가 와서 설명해 줄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는 건가?”
안찰사는 인상을 찌푸린 채 생각에 잠겼다.
‘도찰원, 도찰원이라…….’
황상의 조칙에 의해 도찰원의 전권이 동창 병필태감 박 공공에게 넘어간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즉, 이 붉은 두루마리는 실세 중의 실세인 박 공공의 명이라는 의미다.
“끄응.”
안찰사는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박 공공은 미래의 권력 중추로 다가갈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줄이었다.
관복을 입은 자라면 누구나 꿈꾸는 중앙 권력, 그것도 핵심의 진입을 확실히 보장할 수 있는 사람인 것이다.
‘잡을 수 있다면야 무조건 좋기는 한데…….’
안찰사 역시 그러한 욕심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비록 그가 특별한 비리에 연루된 적도 없고 관리로서 큰 흠이 없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딱히 내세울 만한 공적이나 치적 역시 없는 것도 사실이다.
본래 체제가 안정된 평안한 시절의 관리란 다 그러한 것이 아니던가?
‘함부로 움직였다간 오히려 큰일이 날 거란 말이지.’
권력이란 본디 위험한 외줄타기와 같다.
앞뒤 상황도 모르고 덜컥 발을 디뎠다가는 그 뒷감당이 결코 만만치 않을 터이다.
지금 안찰사가 애꿎은 보좌관을 닦달하는 것도 정확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데서 오는 초조함 때문이었다.
‘으음, 언제 또 이런 기회가 올지 모르거늘…….’
광동성이 비록 풍부한 고장이라지만 중앙 권력과의 거리로 말하자면 변방이나 다름없는 수준이다.
그런 이곳에서 핵심 실세인 박 공공과 끈이 닿을 기회가 생기는 것은 결코 놓칠 수 없는 일이었다.
“이걸 어떻게…….”
안찰사가 그렇게 중얼거리던 때였다.
“바, 밖에 감찰어사라 하는 이가 와 있사옵니다.”
다급한 목소리에 안찰사는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보좌관 역시 얼른 바깥을 향해 말했다.
“어서 안으로…….”
“아니다.”
펄럭.
안찰사는 직접 움직였다.
“내가 나가겠다.”
본래라면 유명무실한 도찰원 감찰어사 따위야 오든 가든 아무 상관 않을 그였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저벅, 저벅.
화려한 관복을 휘날리며 안찰사는 집무실 밖으로 나섰다.
보좌관은 긴장된 표정으로 그 뒤를 따랐다.
***
“귀인을 모셔 간단 말이오?”
은은한 차향이 오르는 방에서 안찰사 장영환이 놀란 눈으로 말했다.
“그것도 황실의 예격에 준하여서?”
“그렇습니다.”
감찰어사 조관은 나지막이 답했다.
“때문에 제 순행도 오늘로서 끝마치게 되었습니다.”
보통 감찰어사가 지방관에게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는 바로 지방관을 탄핵하고자 할 때뿐이다.
조관이 자신의 순행이 끝났음을 밝히는 것은 이 일이 통상 업무에 해당하지 않음을 확인해 주기 위함이기도 했다.
“지엄한 명을 준행하고자 함이니 안찰사사의 흔쾌한 도움을 요청하는 바입니다.”
감찰어사라 해도 품계로는 안찰사의 하위다.
조관은 예의를 잊지 않았고 안찰사 개인 대신 관청인 안찰사사의 협조를 요청하는 형식을 취했다.
어차피 마찬가지이긴 했지만.
“허어, 황실의 예격이라…….”
안찰사는 낭패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황실의 예격이라 함은 황실의 공식 행차에 준한다는 뜻이다.
물론 이 일이 황실 공식 행사일 리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실의 예격 운운한 것은 이 일이 얼마나 중대한 사안이지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었다.
“허나 황실의 예격대로 한다면 동원되는 인원만도 수백, 아니 규모에 따라서는 수천을 헤아려야 할 큰일이 아니오? 안찰사사뿐만 아니라 포정사사와 도지휘사사까지 꼬박 몇 달을 매달려야 할 커다란 일인데 어찌 이렇게 갑자기…….”
문제는 황실의 예격이라는 말은 단순한 의례적 단어 그 이상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안찰사가 당혹한 표정을 지은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러한 것이 아니오라…….”
조관은 안찰사의 오해를 바로잡아 주었다.
“예격에 준하되 결코 소란스럽게 하지는 말라 하셨습니다.”
안찰사는 잠시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황실의 예격에 준하는데 어찌 소란스럽지 않을 수가 있단 말인가?
하지만 조정의 녹을 한두 해 먹어 본 것이 아닌 안찰사는 곧 이 이상한 말의 진의를 깨달았다.
‘아하.’
요는 모셔올 귀인의 심기를 절대 거스르지 말라는 것이다.
“크흠. 그렇군.”
헛기침을 한 안찰사가 넌지시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하는 게 좋겠소?”
“호위를 위한 일백 군사와 기마 서른, 그리고 튼튼한 마차 다섯을 준비해 주십시오. 물론 북경까지 가는 데 소요될 재정도 필요합니다.”
안찰사는 옆에 있는 보좌관을 돌아보았다.
보좌관은 기다렸다는 듯 답했다.
“일백 군사와 기마 서른은 도지휘사사에 요청하면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마차는 저희에게 여유분이 있고, 자금은 포정사사에서 내어줄 것입니다.”
명쾌한 대답에 안찰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감찰어사 조관을 바라보았다.
“그것으로 되겠소?”
만일 더 화려하고 거창한 것을 원한다면 얼마든지 해 줄 의향이 있었다.
중요한 것은 황실의 예격을 들먹일 정도로 최대한 성의를 표시하되, 절대로 귀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것이니까.
“일단은 그 정도로 충분하리라 생각합니다.”
“흐음.”
안찰사는 조금 미심쩍은 표정이었지만 더 이상 무어라 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책임은 이 감찰어사가 질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