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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282화 (282/530)

282화. 이 정도가 딱 좋아요

하영령이 무엇을 말하는지 운현은 알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 그녀의 무례를 꼬집은 것을 마음에 담아 두고 있는 것이다.

“아, 그건…….”

“됐어요. 이제 와서 따지자는 건 아니니까.”

하영령은 고개를 돌려 흘러가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목소리는 어딘가 쓸쓸한 듯 해서, 운현도 잠시 말을 없었다.

찰싹, 찰싹.

“무슨 일을 했었어요?”

“네?”

운현을 돌아보며 하영령이 말했다.

“광주에 오기 전에 뭐하고 있었냐구요. 북경에서 학사를 지냈다던데, 그것만은 아니죠?”

난화주루에서 일어난 일을 모두 본 하영령이다.

운현이 그저 평범한 학사였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많은 사람을 만났습니다.”

조용히 운현은 대답했다.

“그리고 많은 일들을 겪었지요.”

운현의 시선은 자신의 검을 향해 있었다.

굳이 여기까지 들고 오진 않아도 됐겠지만, 지금은 한시라도 검과 떨어져 있고 싶지 않았다.

“결국 대답하기 싫다는 뜻이에요?”

눈살을 찌푸린 하영령이 물었다.

아무래도 그냥 넘어가주지 않을 듯 해서, 운현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무림맹에서 서기 일을 했었습니다.”

“무림맹?”

하영령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무리 그녀라도 무림맹은 안다. 게다가 얼마 전 항주 혈사라는 큰일이 있지 않았는가?

“그리고 제 탓으로 소중한 사람을 잃었습니다.”

운현의 얼굴이 그늘이 졌다.

하영령은 조금 주저하면서도 조심스럽게 물었다.

“……여자예요?”

“아닙니다. 하지만…….”

석양에 물든 주강의 풍경 때문일까? 아니면 쓸쓸히 지나는 강바람 탓이었을까?

운현은 문득 목이 메어 오는 것을 느꼈다.

“제 의제였습니다. 아주 소중한…….”

그 눈빛에는 차마 말로 할 수 없는 감정들이 섞여 있었다.

하영령의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해요.”

“아닙니다.”

고개를 들던 운현은 깜짝 놀랐다.

자신을 쳐다보는 하영령의 눈가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하영령은 바로 고개를 돌렸지만 슬며시 눈가를 찍어 내는 그녀의 모습은 운현이 잘못 본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아아, 밤이 돼서 그런지 바람이 쌀쌀하네.”

괜한 바람 탓을 하며 하영령은 화사한 겉옷을 어깨에 걸쳤다.

어느새 석양도 저물고, 강가에 하나둘씩 등불이 켜졌다.

화려한 광주의 야경을 밝히듯, 거리가 오색 등불로 반짝이기 시작했다.

끼익, 끼익.

사공이 노를 젓는 소리가 들렸다.

이대로 바다까지 떠내려갈 수는 없는 일이니 배를 움직여야 하리라.

주위가 본격적으로 어두워지자 늙은 사공은 배 앞에 작은 등불을 밝혔다.

배 이곳저곳에 큰 등이 달려 있었지만 불은 밝히지 않았다.

“어두운 게 좋아요.”

하영령은 조용하게 말했다.

“날 감싸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들거든요. 오래된 친구처럼…….”

어둡다고는 해도 서로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정도는 아니었다.

광주의 밤을 밝히는 화려한 등불이 주강에 불빛을 드리우고, 이곳저곳을 떠다니는 크고 작은 유람선들도 불을 밝히고 있었다.

“……나.”

말이 없던 하영령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싫어하죠?”

운현은 대답했다.

“싫어하지 않습니다.”

“난화주루에서 당신을 다치게 한 건 바로 나예요. 모르지는 않겠죠?”

“그자의 칼을 막아선 사람도 당신이었지요.”

그건 추궁할 생각이 없다는 뜻이었다.

자신이 벌인 일을 그녀는 스스로 책임졌으니까.

“버릇없고 제멋대로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생각이 없는 사람은 아니라고 스스로 말하지 않았습니까?”

“맞아요.”

하영령은 말했다.

“당신은 잘 모르겠지만 여자로 산다는 건 정말 짜증 나는 일이에요. 누군가는 여자라는 것을 영리하게 잘 이용하지만, 난 그런 건 싫거든요.”

거침없는 목소리로 하영령은 말을 이었다.

“다행히 내게는 하청상단이라는 환경이 있었으니까, 그냥 남 눈치 보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했어요. 그런데 대뜸 나더러 혼인하라는 거예요. 참, 내.”

하영령은 흥분을 숨기지 않았다.

“대체 말이 돼요? 전혀 모르는 사람하고 결혼하라니요. 본 적도 없는 사람하고 평생을 살라는 거잖아요. 혼인이 장난이에요? 나는 절대 그렇게는 못해요.”

단호하게 말하던 하영령은 문득 인상을 찌푸렸다.

“뭐예요? 그 표정.”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운현은 문득 정신을 차렸다.

“아, 아닙니다. 하지만…….”

운현은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의외로 충분히 합당한 말이군요.”

확실히 논리적이고 수긍할 만한 이유였다.

막연히 짜증 난다거나, 무조건 싫었던 것이리라 예상했던 것과는 아주 달랐다.

“어쩐지 좀 거슬리지만, 칭찬으로 받아들이지요.”

하영령은 한 손으로 머리카락을 넘겼다.

“어쨌든 당신에게는…….”

잠시 하영령은 말을 잇지 못했다.

미안하다고 하려 했지만 어쩐지 그 말을 다시 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영령은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돌렸다.

흘러가는 불빛을 바라보며 한동안 말이 없던 그녀는 결심을 다지고 운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당신은…….”

그러나 그녀의 목소리는 다시 끊어졌다.

자신을 바라보는 운현의 눈빛과, 아까부터 두근거리는 가슴이 그녀의 결심을 약하게 만들고 있었다.

‘하아, 이래서야…….’

사그라들던 그녀의 눈빛은 문득 운현의 검에 시선이 가 닿는 순간 다시 생기를 얻었다.

그녀의 시선을 알아차린 운현이 입을 열었다.

“아, 이것은…….”

그러나 운현이 채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이미 하영령의 손이 검에 가 닿고 있었다.

챙.

하영령은 거침없이 검을 빼 들었다.

주강을 밝히는 불빛이 검날에 반사되어 가늘게 반짝였다.

“호오.”

하영령은 마치 물건을 감정하듯 검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운현은 검을 향해 뻗었던 손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좋은 검이네요.”

하영령은 검을 살펴보며 말했다.

“정확히 얼마라고는 말하지 못해도 제법 괜찮은 값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상인의 딸다운 평가에 운현은 미소를 지었다.

“그 검은…….”

그러나 운현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검을 든 하영령의 손이 가볍게 움직였기 때문이다.

슥.

운현의 표정이 굳었다.

하영령의 손에 들린 검은 운현의 어깨 위에 얹혀 있었다.

날카로운 칼날을 반짝이면서.

“위험합니다.”

“아니, 이 정도가 딱 좋아요.”

하영령이 웃으며 말했다.

그것은 이제껏 보지 못했던 편안한 미소였다.

“아까보다 훨씬 낫네요.”

“무엇이 낫다는…….”

“내가 주도권을 쥐고 있는 거요.”

하영령은 눈을 빛내며 말했다.

“하녀가 그러더라고요. 본래…….”

그러나 하영령의 뒷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지는 거래요’라는 말을 어찌 운현에게 할 수 있을까?

“크흠, 어쨌든 이대로가 이야기하기엔 더 좋아요.”

“검을 치우셔도 마찬가지일 것 같습니다만…….”

“아뇨.”

하영령은 단호하게 말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밤새도록 이야기만 빙빙 돌리다가 끝날 거예요. 저는 보기보다 겁쟁이거든요.”

남의 목에 칼을 겨누고서는 자기가 겁쟁이라니, 어이가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웃는 하영령의 표정이 생기가 넘쳐 보여서 운현은 더 이상 칼을 거두라 하지 못했다.

만약의 경우라도 손짓 한번이면 칼날을 멈출 수 있으니까.

“자, 이제 하나씩 얘기해 볼까요?”

하영령은 웃으며 말했다.

그녀의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 밝게 빛나고 있었다.

“당신, 나에게 너무했죠?”

운현은 잠시 생각했다.

그녀가 무엇을 말하는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네, 그렇습니다.”

“자세히 말해 봐요.”

운현은 차분히 말을 이었다.

“난데없이 혼인을 강요당한 아가씨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초면의 무례 정도는 작은 실수입니다. 제가 오히려 속이 좁았지요.”

그 대답은 하영령을 흡족하게 했다.

“바로 그래요.”

미소를 지은 하영령은 운현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미안해요.”

생기 넘치는 목소리로 그녀는 말했다. 다른 사람이 들으면 하나도 미안하지 않은 것 같은 어조였다.

하지만 운현은 알 수 있었다.

지금 그녀가 한 점 거짓없는 진심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난화주루의 일은 전적으로 내 잘못이었어요. 그래서 꼭 말하고 싶었어요.”

하영령의 커다란 눈동자에는 어느새 눈물이 글썽이고 있었다.

“정말로, 미안하다고.”

“괜찮습니다.”

운현이 나지막이 말했다.

하지만 하영령의 말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하영령은 운현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아직 눈물이 그렁그렁한 그녀의 눈동자가 주강의 불빛을 받아 반짝였다.

“나, 당신이 좋아요.”

밤의 주강 위로 불빛이 흘렀다.

하영령의 아름다운 얼굴과 그녀의 눈동자에, 그리고 그녀가 들고 있는 날카로운 칼날에도 불빛이 흐르고 있었다.

운현은 조용히 그 불빛을 바라보았다.

“……죄송합니다.”

운현의 대답은 조용하지만 확실했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나요?”

하영령의 목소리는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네, 있습니다.”

“……그게 누구죠? 아니, 이건 내가 물어볼 필요가 없는 거겠죠.”

입술을 깨물던 하영령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왜 그 사람을 좋아하는 거예요?”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운현은 대답했다.

“하지만 그 사람을 생각하면…….”

운현은 시선을 돌렸다.

등불이 빛나는 광주의 야경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그날 본 밤하늘처럼.

“제 마음이 아파 옵니다.”

철썩.

뱃전에 물살이 부딪혀 부서졌다.

“……그렇군요.”

하영령은 조용히 되뇌듯 말했다.

“그래요. 그런 거군요.”

그녀도 시선을 돌렸다.

흘러가는 주강의 밤풍경을 시야에 담으며 하영령은 조용히 앉아 있었다.

각각의 감정을 싣고, 배는 주강을 따라 흘렀다.

“하아.”

얼마나 침묵이 흘렀을까?

하영령이 나지막이 한숨을 흘렸다.

“이제 나머지 일을 처리해야 되겠군요.”

운현은 향해 하영령이 말했다.

“우리 상단에 거절의 뜻을 보내지 않은 것은, 운가상단이 처한 상황 때문이지요?”

방금 전의 그 감정이 거짓이었던 것처럼, 하영령은 차분하게 말을 이어 갔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대로 있다가는 나와 혼인해야 할 텐데요?”

“아가씨가 그렇게 놔두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안됐군요. 날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을 위해 수고를 감수할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거든요.”

하영령은 혀를 낼름 내밀었다.

운현은 가볍게 웃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흐음,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영령은 자신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살짝 누르며 짐짓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바로 그때였다.

“조심하십시오오.”

끼이익.

노인의 목소리와 함께 배가 크게 흔들렸다.

운현은 한 손으로 뱃전을 잡고 다른 손을 어깨로 올려 손가락으로 칼날을 가볍게 쥐었다.

덕분에 하영령이 흔들리는 걸 잡아주지 못했다.

“꺅.”

그녀는 검을 놓치진 않았지만 자세는 크게 흐트러졌다.

그 덕분에 그녀의 치마가 올라가며 가느다란 발목과 늘씬하게 뻗은 종아리가 운현의 눈앞에 그대로 드러났다.

어슴푸레한 불빛 아래 그 모습은 더할 나위 없이 고혹적이었다.

“크흠.”

운현은 얼른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그건 헛수고가 되고 말았다.

“봤죠?”

“뭐, 뭘…….”

“내 다리요.”

운현은 놀라 하영령을 돌아보았다.

하영령은 가느다란 미소를 지으며 운현을 지긋이 쳐다보고 있었다.

“예쁘죠?”

예쁘다고 생각은 했지만 감히 긍정할 용기는 없었다.

운현은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하영령은 다시 한번 웃고 난후, 뒤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선노! 오늘은 안 해도 돼요!”

선노(船老)라 불린 노인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다만 규칙적으로 노 젓는 소리만이 대답 대신 들려올 뿐이었다.

“선노가 착각한 것 같네요. 남자를 여기에 데려온 게 하도 오랜만이라 그랬나 봐요.”

운현은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다.

그러니까 조금 전 흔들림은 고의였다는 뜻이 아닌가?

우연을 빙자해서 신체 접촉을 유도하려고 말이다.

“그 표정은 뭐예요?”

하영령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일은 전혀 없으니 오해할 것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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