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1화. 주강(珠江)의 밤
“음, 어떻게 보면 더 좋아진 것도 같고…….”
운현은 검을 쥔 손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예전보다 강해진 것은 아니다.
의형 일충현이 전해 준 내력은 그때의 충격으로 사실상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텅 비어 버린 운현의 내력은 천천히, 그러나 새롭게 채워지고 있었다.
어쩌면 그것은 본디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아니면.”
운현은 마음의 검을 떠올렸다.
‘네가 해 준 것인지도.’
의식하지 않은 심상수련은 운현의 무의식, 곧 마음의 검 덕분인지도 몰랐다.
자신이 고개를 돌리고 검을 외면하던 그때에도, 마음의 검은 운현을 감싸 안고 치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웃으며 자신을 보내 주었던 독고랑처럼.
“음.”
운현은 나지막이 신음을 흘렸다.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 감상적인 이야기였다.
검이 살아 있는 인격이 아닌데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하지만 전혀 아니라고 부정할 수도 없었다.
적어도 운현 자신으로서는 말이다.
쉭.
가볍게 손을 저어 검을 휘두른 운현은 칼집 안에 검을 갈무리했다.
스릉.
검은 낮은 소리를 내며 모습을 감추었다.
그리고 운현은 팔을 들어 슬쩍 자신의 체취를 맡았다.
“휴, 확실히 냄새는 예전보다 덜해졌네.”
본격적으로 수련을 시작하며 나타난 또 다른 현상은 바로 땀이었다.
악몽을 꿀 때마다 흘리던 진득한 땀이 아예 지독한 악취를 풍기기 시작한 것이다.
강 총관은 운현의 말을 듣자마자 강제로 의원에게로 끌고갔다.
그리고 의원은 이것이 일종의 ‘명현현상’이라고 진단해 주었다.
큰 충격에서 몸이 회복되며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증상이라는 것이다.
강 총관은 보약이라도 지으려고 했지만 운현은 극구 사양했다.
서로 형편이 넉넉하지 않음을 알고 있는 데다, 자신의 몸이 회복되는 근본적인 이유는 수련 덕분이기 때문이다.
보름쯤 지난 이제는 악취도 한결 줄어들고 몸도 예전보다 더 좋아진 것 같았다.
“좋아.”
운현은 혼잣말로 그렇게 말하곤 의복을 단정히 했다.
그리고 그대로 공터를 떠나려는데, 문득 저 앞에서 다가오는 한 사람을 발견했다.
자박, 자박.
“어……, 희연 누이?”
새침한 표정으로 걸어오는 그 아가씨는 바로 운현의 사촌 동생 운희연이었다.
자박.
“무슨 일이야?”
운현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이토록 그녀의 심사가 틀어져 있는지 종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강 총관님께 뭘 어떻게 한 거예요?”
운희연이 뾰족한 목소리로 물었다.
“강 총관?”
운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뭐, 별로 어떻게 한 건 없는 것 같은데…….”
“강 총관님께 어디 있냐고 물었더니 방해하면 안 된다면서 아예 알려 주지도 않더라고요. 결국 다른 하인들에게 물어봐서 간신히 찾았잖아요.”
“아…….”
그제야 운현은 왜 그녀가 화가 났는지 알았다.
강 총관이 알려주지 않은 것도 그렇지만, 운현을 더 챙기는 그 모습에 그만 기분이 틀어진 것이다.
운희연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 무뚝뚝한 분이 어째서 이렇게까지 신경 써 주는 거죠?”
운현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새삼 강 총관의 배려를 느끼며 운현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원래 자상하신 분이니까. 보기엔 좀 차가워 보이셔도 말이야.”
“그건 그렇지만…….”
운희연은 여전히 납득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살짝 입술을 깨물며 대답했다.
하지만 딱히 틀린 말은 아니어서 더 이상 무어라 반박하지는 못했다.
“그런데 왜? 무슨 일이지?”
“아.”
운현이 묻자 희연은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다시 토라진 표정이 되었다.
“손님이에요.”
찬바람이 쌩하니 부는 듯한 어조로 운희연이 말했다.
“아까 연락이 왔으니까 이제 곧 왕림하시겠지요. 빨리 몸단장 하고 준비하는 게 좋을걸요?”
영문을 알 수 없는 운현은 의아한 표정으로 운희연을 바라보았다.
운희연은 툭 던지듯 말했다.
“온다고요. 그 인생역전 아가씨가 말이에요.”
“아!”
그제야 운현은 상황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운희연이 왜 이토록 쌀쌀맞은 표정인지도.
지금 혼담이 오가고 있는 하청상단의 아가씨가 운현을 찾아온 것이다.
“흥, 좋겠네요?”
운현을 향해 한마디 쏘아 준 후, 운희연은 휙 몸을 돌렸다.
바로 그때였다.
“아, 희연 누이.”
“왜요?”
퉁명스레 답하는 운희연에게 운현은 말했다.
“새 옷, 고마워.”
운희연은 깜짝 놀랐다.
예전에 강 총관이 건네준 새 옷은 바로 운희연이 사 준 것이었다.
“그, 그걸 어떻게…….”
당황한 운희연이 말을 더듬거렸다.
하지만 운현은 가볍게 손을 들어 인사를 하고는 그대로 멀어져 갔다.
‘아이, 참. 말하지 말라고 했더니…….’
강 총관이 아니면 말해 줄 사람이 없다.
부끄럽기도 하고 강 총관이 원망스럽기도 한 운희연은 입술을 깨물며 떠나가는 운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덕분에 왜 운현이 검을 들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미처 물어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
“어서 오십시오. 영령 아가씨.”
강 총관은 정중한 인사로 손님을 맞이했다.
하영령은 고개를 숙여 그 예에 답했다.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강 총관님.”
융통성 없어 보이는 강 총관의 표정은 언제나와 다름없었지만, 하영령은 그의 눈매가 부드러워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몸은, 괜찮으세요?”
하영령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네. 괜찮습니다.”
강 총관은 엉뚱한 피해자였다.
물론 하영령이 직접 한 짓은 아니지만, 원인을 제공했다는 것은 분명했다.
“죄송해요. 제가 어리석었어요.”
사락.
하영령은 정중히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강 총관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렸다.
그 자그마하던 꼬마가 어느새 이렇게 큰 숙녀가 되어 있으니,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는 것이다.
“괜찮습니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강 총관은 대답했다.
“이리로 오시지요. 기다리고 계십니다.”
누가 그녀를 기다리는지는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하영령은 굳은 표정으로 강 총관의 안내를 따라 발을 옮겼다.
어쩐지 가슴이 세차게 뛰고 있었다.
***
강 총관이 조용히 방문을 열었다.
방 안에 운현이 앉아 있었다.
하영령은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어서 오십시오.”
운현은 일어나서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잘생긴 외모도 아니고 멋지게 차려입은 것도 아닌데, 그저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하영령은 가슴이 뛰었다.
‘대체 내가 왜 이런담? 짜증 나, 진짜.’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하영령은 사뭇 예의 바른 목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갑자기 찾아뵈어 죄송합니다.”
단아한 그 모습은 마치 엄한 가문에서 예의 바르게 자란 아가씨 같았다.
운현은 잠시 놀랐지만 곧 자리를 권했다.
“앉으시지요.”
하영령은 가볍게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강 총관에게 말했다.
“안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강 총관님.”
강 총관은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달칵.
문이 닫히고, 하영령은 다소곳이 자리에 앉았다.
그 모습을 운현은 사뭇 놀라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이 아가씨가 자신이 아는 그 사람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사락.
자리에 앉은 하영령이 고개를 들었다.
“왜요?”
운현을 똑바로 바라보며 하영령은 말했다.
“뭘 그렇게 쳐다봐요? 구경 났어요?”
톡 쏘는 그 말투에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제야 자신이 아는 하영령 같다.
“아닙니다. 그저, 조금 의외라서요.”
하영령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어른한테까지 막 대할 정도로 생각이 없지는 않아요.”
“그러셨군요.”
운현은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가 어쩐지 기분이 나빠서, 하영령은 코웃음을 쳤다.
“흥.”
“크흠.”
운현은 머쓱한 듯 헛기침을 했다.
어차피 해야 할 말이라면 길게 끌 필요는 없을 것이다.
“……아가씨께서 왜 오셨는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차분한 표정으로 운현은 말했다.
더없이 진지한 눈빛이었지만 하영령은 오히려 그것이 싫었다.
‘기껏 여기까지 왔는데…….’
너무 무겁고 딱딱하다.
하영령이 원한 건 결코 이런 만남이 아니었다.
“저는…….”
“아, 정말.”
달칵.
하영령은 운현의 말을 끊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아한 표정의 운현을 내려다보며 하영령은 말했다.
“잠깐 나갈까요? 우리.”
아무렇지 않은 듯 하영령은 말했다.
운현은 놀란 표정이었지만 하영령은 이미 몸을 돌리고 있었다.
“아, 네.”
어차피 대화는 해야 하니 운현 역시 그녀를 따라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
탁.
탁자 옆에 세워 두었던 검을 챙기고 운현은 급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
차를 가져오던 강 총관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운현은 잠깐 나갔다 오겠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
따각, 따각.
두 사람은 하영령이 타고 온 마차에 탔다.
마차는 말도 없이 어디론가 움직여 갔지만, 하영령은 창밖만 쳐다보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마차 안에서 할 말도 아닌 것 같아서 운현은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따각.
마차가 멈춰 섰을 때, 두 사람은 석양이 아름답게 깔리는 주강의 선착장에 도착해 있었다.
선착장에 내린 하영령은 기다리고 있던 배에 올랐다.
‘배?’
그것은 주강 유람에 흔히 쓰이는 열 명 남짓 탈 만한 낮은 배였다.
낮에는 지붕처럼 차양을 쳐 햇볕을 가리고, 밤에는 등불을 달고 광주의 야경을 감상하며 간단한 연회도 즐기는 전형적인 소형 유람선이었다.
“타요.”
운현이 배를 바라보고 있자 하영령이 말했다.
“아, 네.”
운현은 배에 올랐다.
늙은 사공은 즉시 익숙한 솜씨로 주강의 물결 위에 배를 실었다.
철썩, 철썩.
주강의 강물이 배에 부딪히며 물소리를 냈다.
광주를 감싸안고 흐르는 주강을 따라, 배는 석양 속을 천천히 나아가고 있었다.
“후우.”
하영령이 깊은 숨을 내쉬었다.
바람에 날리는 긴 머리를 한 손으로 넘기며, 하영령은 한결 홀가분한 표정으로 지나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운현은 그녀를 마주 보고 같은 뱃전에 앉았다.
역방향이라 좀 어색했지만, 천천히 멀어져 가는 풍경을 보는 것도 색다른 풍취가 있었다.
“바람이 기분 좋네요.”
운가상단을 나선 후 처음으로 하영령이 입을 열었다.
“자주 오는 편입니까?”
“기분이 답답할 때면 와요.”
하영령은 고개를 돌려 운현을 보았다.
“이렇게 강에 배를 띄우고 있으면, 모든 게 천천히 흘러가는 것 같아서 기분이 편해지잖아요?”
“그렇군요.”
운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기분은 한결 나아졌다.
“물론 괜찮은 남자를 만났을 때도 오고요. 밤이 되면 분위기가 끝내주거든요.”
그 말에 운현은 피식 쓴웃음을 지었다.
하영령이 즉시 운현을 째려보았다.
“지금 비웃은 거예요?”
“아, 이건…….”
운현은 반사적으로 변명을 하려다 멈췄다.
하영령에게 서툰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
“……죄송합니다.”
운현은 고개를 숙였다.
뒤이어 쏟아질 그녀의 눈총과 비난을 각오했지만, 하영령의 반응은 운현의 예상과는 아주 달랐다.
“뭐, 어쩔 수 없죠.”
운현은 고개를 들었다.
뱃전에 기대 강가를 바라보며 하영령은 나지막이 말했다.
“그렇게 살아온 걸요.”
어쩐지 허탈한 그녀의 목소리에 운현의 가책이 오히려 심해졌다.
“죄송합니다.”
운현은 다시 한번 정중하게 사과했다.
생각해 보면 그저 말 몇 마디에,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남을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오늘은 꽤나 관대하네요?”
하영령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틀림없이 어려운 문자라도 쓰면서 한마디 할 줄 알았는데. 뭐, 그런 식으로 살지 말라, 그런 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