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0화. 그분은 그런 걸 싫어하시거든요
붉은빛의 장엄한 도시, 황궁.
관복을 입은 관리가 급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본래 느긋한 걸음으로 뽐내듯 걷는 것이 관리들의 습관이지만, 지금 그에겐 오로지 빨리 도착해야 한다는 일념뿐이었다.
탁탁.
날아오를 듯 화려한 대전 앞에서야 관리의 걸음이 멈췄다.
그는 옷매무새를 바로하고 금의위 앞을 지나 대전 안으로 들어섰다.
“무슨 일입니까?”
동창 소속 태감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물었다.
관리는 깊숙이 고개를 숙이며 얇은 서찰 하나를 꺼냈다.
바스락.
“도찰원 첨도어사입니다. 일전에 공공께서 하명하신 일에 대한 보고를 가져왔습니다.”
서찰을 받아들던 태감에게 첨도어사가 급히 덧붙였다.
“공공께서 최우선 사항으로 보고하라 하신 일입니다.”
태감의 눈빛이 변했다.
그는 서찰을 서반에 담아 즉시 박공공에게 다가갔다.
다른 서류를 살피고 있던 박 공공은 무심히 서찰을 집어 들었고, 도찰원 첨도어사는 긴장된 표정으로 침을 삼켰다.
아무리 동창 병필태감이라 해도 황궁의 전각 하나를 통째로 차지할 정도의 위세는 없다.
그러나 박 공공만은 예외다.
압도적으로 불리했던 차기 황권 승계를 둘러싼 분쟁을 극적인 승리로 장식하고, 다음 하늘[天]의 절대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권력의 토대를 다져가고 있는 박 공공.
동창 병필태감이라는 직책마저 그에게는 그저 형식적인 감투에 불과했으니, 말 그대로 무소불위, 하지 못할 것이 없는 박 공공에게 도찰원의 모든 권한이 주어진 것도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후후.”
작은 웃음소리와 함께 부드러운 미소가 박 공공의 얼굴에 피어올랐다.
도찰원 첨도어사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리로.”
가벼운 손짓과 함께 박 공공의 말이 떨어지자 첨도어사는 고개를 조아리고 앞으로 나갔다.
“이 보고에 대해 어떤 조치를 취했지요?”
부드러운 목소리로 박 공공이 물었다.
첨도어사는 고개가 땅에 닿을 듯 깊이 허리를 굽히며 대답했다.
“보고를 가지고 온 전령이 지금 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박 공공은 만족한 미소를 피워 올렸다.
중요한 보고가 조금도 지체되지 않고 자신에게 올라온 것과, 그 처리에 있어 자신의 뜻을 먼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도찰원이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만족하는 것이다.
“이것을.”
미리 준비하고 있었던 듯, 박 공공은 품에서 밀봉된 서찰을 꺼내 서반에 올려놓았다.
태감이 서반을 가져오자 첨도어사는 공손한 자세로 서찰을 받 아들었다.
“광동성을 순행 중인 감찰어사에게 명하여 귀인께 이 서찰을 전하도록 하세요.”
박 공공이 말한 귀인이 누구인지는 자명했다.
첨도어사 자신이 방금 보고한 그 대상을 말하는 것이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또한.”
박 공공은 첨도어사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분께서 허락하실 경우 이곳으로 모시되 황궁의 예격(例格)에 준하여 결코 예법에 어긋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라 이르세요.”
첨도어사는 깊숙이 고개를 숙여 박 공공의 명을 받들었다.
“아, 그리고.”
박 공공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덧붙였다.
“너무 소란스럽게 하지도 말라고 하세요. 그분은 그런 걸 싫어하시거든요.”
웃으며 말하는 박 공공의 말에 첨도어사는 내심 경악을 감출 수 없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닌 박 공공이 그 정도로 신경을 쓰는 사람이라니, 차질이라도 생겼다간 무슨 일이 일어날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하, 한 치도 어긋남이 없도록 각별히 유념하여 시행하겠나이다, 공공.”
박 공공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첨도어사는 뒷걸음질로 박 공공의 앞에서 물러나왔다.
대전을 나서며 첨도어사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잔잔한 미소를 띄운 채 자신이 올린 서찰을 읽고 있는 박 공공의 모습이었다.
“후우우.”
첨도어사는 대전을 물러나오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는 곧 도찰원을 향해 빠른 걸음을 옮겨야 했다.
박 공공의 명을 광동성 감찰어사에게 전해야 했기 때문이다.
탁탁탁.
첨도어사는 도찰원을 향해 발길을 재촉했다.
어느새 그의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히고 있었지만, 그는 땀을 닦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
따뜻한 햇살이 내리쬐는 오후.
광주 하청상단의 하영령은 창가에 기대앉아 멍한 눈길로 화단을 바라보고 있었다.
“후우.”
가벼운 한숨 소리가 그녀의 입술에서 새어 나왔지만 생각에 빠진 하영령은 그것을 의식하지도 못했다.
뒷전에 앉아 있던 하영령의 하녀는 그 모습을 보고 웃음을 흘렸다.
“후후훗.”
“왜 웃어?”
하영령이 뾰쪽한 음성으로 하녀를 쏘아보며 말했다.
그러나 하녀는 꿈쩍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웃음은 더욱 짙어져 갔다.
“아이, 참. 아가씨도 진짜……. 후후후훗.”
입을 가리며 웃어대는 하녀의 모습에, 그렇지 않아도 불편하던 하영령의 심기가 더욱 꼬였다.
“이게 정말……. 왜 웃냐니까!”
하녀는 움찔했다.
하지만 그녀의 웃음은 여전히 눈가에 남아 있었다.
“……역시, 아가씨도 어쩔 수 없네요.”
다 알고 있다는 듯한 하녀의 태도에 하영령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뭐가? 대체 뭔 소리야?”
“다 그런 거라구요. 아가씨.”
하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제가 한두 번 본 줄 아세요? 내전의 삼순이도 그랬고, 말년이도 그랬지요. 일하다 말고 멍하니 딴생각에 빠져 있다가 난데없이 한숨을 푹푹 쉬고 말예요.”
어쩔 수 없다는 듯 하녀는 고개를 저었다.
“원래 사랑에 빠지면 다 그런 거라니까요? 그래서 병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생각해 보면 상사병이란 게 정말 지독한…….”
“뭐얏!”
하영령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고 그 기세에 의자가 소리를 내며 뒤로 넘어갔다.
콰당.
“누가 사랑이야! 누가 상사병이냐곳!”
넘어진 의자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하영령은 하녀에게 소리쳤다.
하녀는 목이 쑥 들어간 채 우물거리듯 대답했다.
“그, 그야 물론 아가씨죠.”
“내가 무슨 사랑을 한다는 거얏! 그 인간을 내가 왜!”
“하지만…….”
평소 같으면 하영령의 큰 목소리에 이미 찍소리도 못 했을 하녀였다.
하지만 이번엔 조금 달랐다.
“벌써 소문이 자자한데요? 아가씨가 사랑하는 님을 위해 칼 앞에 뛰어들었다고요.”
“뛰, 뛰어든 거 아니야!”
하영령은 얼굴이 붉어졌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칼 앞에 뛰어들었다니, 이건 고리타분한 옛날이야기에나 나오는 바보 같은 여인네의 모습이 아닌가?
그게 자신이라 생각하니 얼굴이 절로 화끈거렸다.
“어, 어쩌다 보니 그런 거야. 말리려고 보니까 카, 칼이 있었던 것뿐이라고!”
그건 사실이었다.
앞뒤 살필 겨를 없이 뛰어들고 보니 칼날이 눈앞에서 번득이고 있었다.
그것뿐이었다.
처음부터 그 사람을 위해 목숨을 건다든지 하는 그런 생각 같은 건, 하늘에 맹세코 털끝만큼도 없었다.
“에이.”
하녀는 은근한 눈빛으로 하영령에게 말했다.
“그럼, 칼이 있는 걸 봤으면 안 뛰어들었겠네요?”
“그…… 그래. 그랬을 거야.”
하영령은 하녀의 물음에 자신 있게 대답하지 못했다.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데 그런 경우까지 어떻게 확신하랴?
때문에 하영령의 목소리는 이미 처음과 같은 독기를 잃어버리고 있었고, 하녀의 은근한 웃음은 더욱 짙어져 갔다.
“아, 그랬군요.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도 모르고 수근거리고 난리라니까요? 가련한 우리 아가씨가 칼날 앞에 몸을 던질 정도로 그분을 사모하고 있다고 말이에요.”
“사, 사모라닛!”
그렇지 않아도 화끈거리고 있던 하영령의 얼굴이 순식간에 빨갛게 달아올랐다.
“말도 안 돼! 그런 헛소문이 어디 있어? 아니, 대체 이제 두 번……. 그래, 딱 두 번 본 사람을 사랑하느니 마느니 하는 게 말이 되는 소리냐곳!”
“어머, 그래요?”
하녀는 손으로 입을 가렸다.
하지만 입가에 피어오르는 웃음을 감추지는 못했다.
“그럼, 그 딱 두 번 본 사람을 아득바득 미워하는 건 말이 되구요?”
“그, 그거야 생판 모르는 사람하고 결혼을 하라니 뭐니 하니까 얄미워서…….”
당연히 좋게 보일리가 없다.
자신에게 호감을 사려는 노력은커녕, 어쩌다 한 실수에 입어례니 뭐니 충고를 해 대니, 집안에서 일방적으로 정한 혼처가 아니었다 해도 좋은 감정이 생길 리가 만무했다.
그래서 그 얄미운 콧대를 한 번 꼭 눌러 주고 싶었다.
다만 그뿐이었다.
그가 특별히 해를 당하거나 나쁜 일이 생기기를 바랐던 것은 아니었다.
“흐음, 아가씨도 처음부터 그분에게 마음이 있었던 건 아니고요?”
“그, 그럴 리가 없잖아!”
하영령이 펄쩍 뛰며 부인해 보지만 하녀의 웃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에이, 일부러 관심을 끌어 보려고 그런 거 같던데……. 제가 보니까 혹여 다칠까 봐 걱정하는 티가 팍팍 나던데요? 왜, 그 있잖아요. 코흘리개 남자애들이 좋아하는 여자애 놀리고 도망가는 것처럼 말예요.”
하영령의 눈매가 치솟았다.
“야! 너 내가 그런 유치한 애들처럼 보여!”
하녀는 움찔했다.
사실 이번엔 말이 심하긴 했다.
다 자란 아가씨를 코흘리개 아이 취급했으니 말이다.
“하, 하지만 원래 사랑이란 건 유치한 거라구요.”
하녀는 기어 들어가는 듯한 목소리로도 끝까지 저항을 늦추지 않았다.
하지만 분위기는 이미 하영령에게로 넘어가 버린 후였다.
“됐어! 헛소리할 시간 있거든 빨리 가서 내 옷이나 준비해 놔!”
하영령은 기세를 몰아 하녀를 다그쳤다.
하녀는 완전히 풀이 죽었다.
“오늘도 나가시게요?”
“그럼 안 나가? 당연히 나가야지!”
하녀는 하영령의 심기를 거스를세라 후다닥 튀어 나갔다.
그녀가 사라지자 하영령은 그제야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악!”
무심코 자리에 앉으려던 그녀는 그만 휘청하고 몸의 중심을 잃을 뻔했다.
그녀를 받쳐 줄 의자가 뒤로 넘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씨, 진짜!”
간신히 창틀을 지탱하고 넘어지는 것을 면한 하영령은 짜증을 냈다.
자칫하면 꼴사나운 모습으로 나뒹굴 뻔하지 않았는가?
덜컹.
넘어진 의자를 거칠게 세워 놓고 하영령은 의자에 털썩 몸을 기댔다.
그리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우.”
바닥이 꺼질 듯 한숨을 쉬어도 가슴 한구석은 계속 답답하기만 하다.
“이제 와서 어쩌라는 거야?”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그녀는 중얼거렸다.
그녀는 창틀에 두 손을 얹고 고개를 묻었다.
“이제 와서…….”
그날 밤, 난화주루에서 자신을 바라보던 그의 시선이 떠올랐다.
마치 날카로운 칼날처럼 그녀의 가슴을 찌르던 그 시선이.
‘……이럴 줄 알았으면.’
담담한 그 시선이 이렇듯 아플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조금, 잘해 주는 건데.’
그러나 잘해 주고 말고 할 겨를이 있었던가?
자신의 말대로 그를 만난 것은 겨우 두 번에 불과하니 말이다.
“에이 씨!”
하영령은 짜증이 났다.
“내가 대체 왜 이러는 거야?”
답은 명확했다.
하영령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의 가슴은 더욱 답답해질 수밖에 없었다.
“후우.”
하영령은 다시 한번 긴 한숨을 내쉬었다.
창밖 화단에는 무심한 붉은 꽃들만이 한가로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날 저녁, 하영령은 저녁 나들이를 취소해 버렸다.
이미 완벽하게 외출을 준비했던 하녀는, 하영령의 변덕에 그저 속으로만 투덜거려야 했다.
***
한적한 오후, 운가상단의 빈터에서 수련하던 운현은 천천히 움직임을 멈췄다.
사락.
꿈결처럼 허공을 흐르던 칼날의 궤적이 천천히 멈췄다.
마음에 가득하던 한 자루 검의 형상이 사라지고, 운현은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후우우.”
호흡이 거칠어진 것은 아니었다.
다만 백호수련검 십이식을 마칠 때면 운현은 습관처럼 숨을 가다듬었다.
“……역시.”
운현은 천천히 검을 들어 올렸다.
“내 몸이 좋아진 건 그 꿈 덕분이었구나.”
운가상단에 돌아온 이후 운현의 몸은 빠르게 좋아졌다.
그것이 단지 청소하고 빗질하고 물동이를 나른 덕분이었을까?
고통스러운 기억을 애써 잊고 새로운 일에 몰두했기 때문일까?
그렇지 않았다.
사실 운현은 날마다 악몽에 시달렸다.
보통이라면 하루가 다르게 안색이 나빠지고, 건강하던 사람조차 병을 얻는 것이 정상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운현의 얼굴이 좋아졌다고 했다.
그것은 바로 운현이 꿈 속에서 날마다 백호수련검식을 펼쳤기 때문이었다.
악몽이라 여겼던 것이, 와불에게 배운 일종의 ‘심상수련’이 되어 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