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검전 리마스터-279화 (279/530)
  • 279화. 백호수련검 십이식

    소림사 경내는 참배객들이 피워 올린 향내로 가득했다.

    얼마 전 항주에서 끔찍한 일을 겪었음에도, 소림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그중 한 전각 앞,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 도복 차림의 청년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바로 화산의 매화검, 영호준과 그의 사제인 진하성이었다.

    사제인 진하성은 한창 소림 경내의 모습에 정신이 팔려 있었지만, 영호준은 지긋이 눈을 감은 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박.

    “기다리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영호준은 눈을 떴다.

    승복 차림의 준수한 청년이 한 손으로 합장을 했다.

    선승 혜가를 기리는 소림사 특유의 방식이었다.

    “저는 혜천이라 합니다.”

    그가 자신이 기다리던 사람임을 영호준은 알 수 있었다.

    혜천의 눈빛과 전신에서 풍겨나는 기세는 결코 범상한 것이 아니었다.

    “영호준입니다.”

    예를 표하며 영호준이 답했다.

    “그리고 이쪽은 제 사제 진하성입니다.”

    진하성이 예를 표하고, 혜천 역시 그에게 답례했다.

    “우선 자리를 옮기시지요.”

    혜천의 권유에 영호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림사에서 도복을 입고 있는 그들을 향해 쏟아지는 참배객들의 시선이, 이미 충분히 껄끄러웠기 때문이다.

    세 사람이 자리를 옮긴 곳은 사뭇 외진 곳이었다.

    참배객은 물론, 다른 전각들마저 보이지 않는 숲 속 깊은 곳에 작은 정자가 자리하고 있었다.

    “좋은 곳이군요.”

    스치는 바람과 은은한 새 소리를 음미하듯 영호준이 말했다.

    “화산의 귀한 분을 이런 곳으로 모셔서 죄송합니다.”

    혜천이 정중한 어조로 말했다.

    “허나 지금은 때가 좋지 않습니다. 아니, 솔직히 말씀드리면.”

    나지막이 한숨을 내쉰 후 혜천은 눈살을 찌푸렸다.

    “두 분의 방문은 아무도 반기지 않고 있습니다.”

    그 모습은 사뭇 불친절했다.

    하지만 영호준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알고 있습니다.”

    부드러운 표정으로 영호준이 말했다.

    “만일 제가 소림의 높은 분들을 만나려 했다면, 산문을 들어서지도 못했겠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영호준의 눈빛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잠시 침묵하던 혜천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맞습니다.”

    영호준만이 아니다.

    항주 사태 이후, 소림의 모든 제자들은 물론 속가제자들까지 산문 출입이 엄히 금지되어 있었다.

    평소대로 참배객은 허용하고 있었지만, 당장 산문을 폐쇄한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을 정도다.

    하물며 화산의 매화검 영호준이라면 말할 것도 없으리라.

    “태허 선사께서는 어떠십니까?”

    태허 선사는 소림의 장문인이다.

    혜천은 대답하지 않았다.

    “크게 다치신 것으로 압니다만…….”

    “그런 일은 없습니다.”

    혜천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공식적으로는요.”

    옆에서 듣고 있던 화산의 진하성은 눈을 크게 떴다.

    혜천의 대답은 긍정이나 다름없었다.

    소림 장문인인 태허 선사가 크게 다쳤다니? 그야말로 천하가 놀랄 소식이었다.

    하지만 이어진 사형 영호준의 말은 진하성을 더욱 놀라게 했다.

    “그렇군요. 화산도 마찬가지입니다.”

    “네엣?”

    진하성은 경악한 표정으로 사형 영호준에게 물었다.

    “아니, 장문인께서는 폐관 수련에 드셨다고…….”

    “핑계다.”

    영호준은 짧게 답했다.

    “그리고 일일이 설명해 줄 수는 없으니까, 눈치껏 알아듣도록 해라.”

    진하성은 얼른 입을 다물었다.

    영호준은 혜천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무당이나 아미 역시 형편은 마찬가지겠지요. 항주를 탈출하며 정예 제자들 다수가 죽고 장문인마저 큰 부상을 입었습니다. 마음 같아선 당장 영웅맹으로 쳐들어가 복수를 하고 싶지만 문제가 있지요.”

    쓴웃음을 지으며 영호준이 말했다.

    “누가 배신자인지 확신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옆에 있던 진하성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배신자라니, 처음 듣는 말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혜천은 조금도 놀란 얼굴이 아니었다.

    “제일 의심스럽기는 당문이지만 제갈세가는 어떨까요? 본가가 불에 탔다던 공손세가는 정말 피해를 입은 것일까요?”

    영호준의 말은 쉬지 않고 이어졌다.

    “항주를 탈출한 다른 세가들은 어떻지요? 태평맹은요? 과연 궁여지책으로 세운 것일까요, 아니면 처음부터 의도적이었던 걸까요? 과연 태평맹을 믿을 수 있을까요? 혹은, 저들도 적일까요?”

    혜천은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았다.

    영호준은 혜천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러니 몸을 사릴 수밖에요. 누굴 믿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으니까. 피 같은 제자들이 죽고 장문인이 중상을 당했어도, 내부 분열로 문파가 갈라져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지요. 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

    혜천은 눈을 지긋이 감았다.

    영호준의 지적은 하나같이 옳았다.

    소림이 당한 피해는, 비록 충격적이긴 했으나 치명적이진 않았다.

    문제는 태평맹의 이탈로 무림맹 체제가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는 데 있었다.

    남궁세가를 봉문시킨 황천대와 암천무제, 흑도회를 괴멸시킨 흑창기마대와 단궁대, 실혼대 그리고 영웅맹과 철혈사왕 염중부, 거기에다 배후라는 혈공자 문왕까지.

    이 막강한 적들 앞에서 과연 누구를 믿어야 하는가? 누구를 믿을 수 있는가?

    소림을 이끌어야 할 장문인 태허가 중상으로 의식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도 큰 문제였다.

    그러므로 결국 소림이 택할 수 있는 유일한 대처는 바로 몸을 낮추고 상황을 지켜보는 것이었다.

    화산이나 무당, 아미, 그리고 태평맹에 들지 못한 다른 문파들이 그러하듯 말이다.

    “소림의 역사는 깊습니다.”

    혜천이 눈을 뜨며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오랜 세월 쌓아 온 터가 건재하니, 이대로 끝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의 지적 역시 옳았다.

    소림의 자존심이 크게 꺾이고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소림의 뿌리가 뽑혀 나간 것은 아니다.

    비록 시간은 걸리더라도 소림은 다시 무림의 태산 북두로 서게 될 것이다.

    “물론 그렇습니다. 화산도 마찬가지지요.”

    영호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동안 세상이 겪어야 할 고통은요? 무림맹이라며 영화를 누릴 때는 언제고, 이제는 속세의 일이라고 고개를 돌려 외면하면 다입니까?”

    말하는 영호준의 눈동자는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것이 과연 불가의 법도입니까?”

    “본디 산다는 것은 고통과 번뇌입니다. 그러니 세상에 고통이 있음은 당연한 일이지요.”

    혜천은 나지막이 불호를 외웠다.

    영호준이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혜천의 말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허나 고통의 세상에 스스로 몸을 던지신 분이 바로 부처시니, 저 또한 불가의 제자로서 그 뜻을 외면할 수는 없겠지요.”

    영호준의 눈동자가 빛났다.

    혜천은 한숨을 쉬었다.

    “……사실 저는 이 기회를 통해 소림이 온전한 불도의 도량으로 거듭나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대로 소림이 무림에서 발을 빼는 것은, 그동안 무림의 이권에 개입한 것 보다 더 무책임한 행동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잠시 침묵하던 혜천은 고개를 들었다.

    “……알겠습니다.”

    혜천은 깊은 눈동자로 영호준을 바라보며 말했다.

    “시주께서 저를 찾아오신 것 또한 부처님의 뜻이니, 저도 동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앞으로 무엇을 하려는지는 묻지 않으십니까?”

    영호준의 말에 혜천은 빙긋 웃었다.

    “길이 아니면 가지 않을 뿐이며, 길이 갈리면 인연도 그때까지일 뿐이지요.”

    어쩌면 당연한 말이었지만 그것은 혜천의 의지를 분명히 보여 주는 것이기도 했다.

    “그렇군요. 잘 알겠습니다.”

    영호준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바스락.

    혜천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문의 어른들께 말씀드리고 오겠습니다. 이곳에서 잠시만 더 기다려 주시지요.”

    “잠시 정도로 되겠습니까?”

    한창 혼란스러울 때다.

    그것도 혜천 정도 되는 소림의 승려가 강호 무림으로 나서는 것은 하루 이틀에 허락을 받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네, 충분합니다.”

    그러나 혜천의 대답은 단호했다.

    “제가 결정한 이상 따로 허락을 구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반대하는 사람도, 우려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혜천의 결정을 뒤집지는 못한다.

    그저 통보만으로도 충분했다.

    “아, 참.”

    몸을 돌리려던 혜천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오신 김에 전대 대조사께 문안을 드리지 않으시겠습니까?”

    영호준의 표정이 굳었다.

    그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니, 저기 그게…….”

    말을 흐리던 영호준은 변명하듯 말을 이었다.

    “실은 예전에 꽤나 지독한 일을 겪어서 말이지요. 아직은…….”

    “이해합니다.”

    혜천은 충분히 납득한다는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전대 대조사 와불의 ‘자그마한 심득’을 얻느라 온갖 고생을 하고 인내를 시험당해야 했기 때문이다.

    물론 덕분에 와불 외에는 아무도 혜천에게 간섭할 수 없게 되었지만 말이다.

    영호준 역시 비슷한 이유다.

    소림과 같은 처지인 화산에서 영호준이 산문을 나온 것은 절대 평범한 일이 아니었다.

    “그럼, 곧 돌아오겠습니다.”

    혜천은 가볍게 예를 표하고 걸어갔다.

    영호준은 예전의 악몽이 떠오른 듯 인상을 구기고 있었고, 두 사람의 대화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진하성만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오래전 ‘신승’이 안배해 둔 또 하나의 책략이 드디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

    이른 새벽, 운현의 숙소에 강 총관이 찾아왔다.

    “필요하실 것 같아 가지고 왔습니다.”

    슥.

    강 총관은 특유의 담담한 표정으로 긴 목함 하나를 건넸다.

    “이것은…….”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운현을 보며 강 총관은 말했다.

    “그저, 제 방에 장식으로 걸려 있는 것보다는 도련님께 더 필요할 것 같아서요.”

    운현은 목함을 내려다보았다.

    무엇이 들어 있는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어제였다면 절대로 받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사락.

    운현의 두 손은 조금 떨리고 있었지만, 그래도 주저하지 않고 강 총관의 목함을 받아 들었다.

    목함에서 느껴지는 무게감이 새삼 낯설었다.

    “옛 장부들은 가져가겠습니다.”

    강 총관이 운현을 보며 말했다.

    “도련님이 직시해야 할 것은, 적어도 상단의 장부는 아닐 테니까요.”

    낡은 장부책을 든 강 총관은 휘적휘적 새벽 어스름 사이로 사라졌다.

    사락.

    그 뒷모습을 향해, 운현은 깊숙이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강 총관이 떠난 후, 운현은 조심스레 목함을 열었다.

    달칵.

    아니나 다를까, 목함 안에는 고풍스러운 검 한 자루가 놓여 있었다.

    정성을 들여 세공한 칼집과 단아한 느낌으로 장식한 옥은 이것이 흔한 철검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후우.”

    운현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한참 눈싸움을 하듯 검을 내려다보던 운현은 천천히 손을 뻗어 검을 쥐었다.

    스릉.

    가볍게 힘을 주자 부드럽게 검이 미끄러져 나왔다.

    날카롭게 세운 칼날은 이 검이 결코 장식용이 아님을 말해 주고 있었다.

    텅 빈 목함을 내려놓은 운현은 천천히 칼날에 손끝을 가져갔다.

    사락.

    섬뜩한 느낌이 손끝을 타고 흘렀다.

    칼날에 손을 가져다 댄 결과가 붉은 핏방울이 되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래.’

    운현은 자신의 손 끝을 응시하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검에는 날이 있다.”

    어린아이라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 당연한 사실이, 지금 운현에게는 커다란 의미와 무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운현은 칼날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것을 쥐고 있는 사람은 바로 나다.”

    모든 칼이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아니다. 칼은 생명을 지키고 사람들을 구하기도 한다.

    허나 선택의 순간은 반드시 다가온다.

    누구를 죽이고 누구를 살리며, 무엇을 버리고 어떤 것을 취할 것인가?

    그 선택이 바로 운현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어쩌면 그저 외면하고 있었을 뿐인지도 모른다.

    이미 운현의 검은 수많은 것들을 베어 내고, 결정해 왔으니까.

    그러나 그 분명한 사실을 제대로 각오하지 않았기에 운현은 결국 잃고 말았다.

    반드시 지켜야 할 것들을, 너무나도 소중한 사람들을.

    스륵.

    운현은 천천히 움직여 자세를 잡았다.

    웅.

    기다렸다는 듯, 마음속에 한 자루 검의 심상이 떠올랐다.

    가슴속에 솟아오르는 한 가닥 그리움을 가만히 가라앉히며 운현은 천천히 검로를 펼치기 시작했다.

    흐르는 물처럼 부드럽게, 비단결처럼 섬세하고, 그러나 단 한 순간도 주저함 없이.

    그것은 바로 백호수련검 십이식의 시작이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