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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278화 (278/530)

278화. 용서

항장익은 미심쩍은 눈으로 대답 없는 운현을 쳐다보았다.

‘설마 그걸 피할 자신이 있었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애초에 이런 사태가, 그것도 호연기 같은 얼치기 삼류를 상대로 벌어질 리가 없다.

만일 항장익 자신이 검을 걷어 내지 못했다면 운현은 어찌할 작정이었던 것일까?

‘아니면…….’

그대로 검을 맞아도 상관없다는 뜻이었을까?

“당신 이름은?”

“운현입니다.”

“나는 항장익이네.”

스릉.

검을 갈무리한 항장익은 그대로 몸을 돌렸다.

고맙다는 인사는 바라지도 않았고, 운현 역시 하지 않았다.

저벅, 저벅.

항장익은 출구로 걸어갔다.

“또 보네요?”

누군가 운현의 곁을 스치며 말했다.

그 여인을 운현은 알고 있었다.

월수산에서, 그리고 광주로 오는 마차에서 보았던 여인 진예림이었다.

진예림은 주저앉은 하영령을 흘깃 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딱 봐도 치정에 얽힌 문제가 분명했다.

“이런 건 빨리 푸는 게 좋아요. 마냥 외면한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니까.”

자박, 자박.

진예림은 가벼운 걸음으로 항장익을 뒤따랐다.

마지막으로 담소하가 연신 운현과 하영령을 흘낏거리며 주루를 나갔다.

“……도련님.”

강 총관의 목소리에 운현은 고개를 돌렸다.

“괜찮으십니까?”

“네, 저는 괜찮습니다만…….”

말과는 달리 강 총관은 괜찮지 않았다.

난폭하게 눌린 데다 갑작스러운 일에 놀란탓인지 움직임이 불편해 보였다.

운현은 강 총관을 부축했다.

그리고 아직도 주저앉아 있는 하영령을 향해 나지막이 말했다.

“……고맙다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일의 전말은 이미 대강 짐작이 갔다.

어째서 그녀가 호연기를 말리려 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운현은 더 이상 그녀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호연기의 칼날에서 그녀를 구해 준 것만으로도 할 일은 다 한 셈이니까.

저벅, 저벅.

운현은 강 총관을 부축한 채 그대로 난화주루를 떠났다.

홀로 남은 하영령은 입술을 깨물었다.

알 수 없는 설움과 후회가 밀물처럼 몰려와 그녀를 삼켜 버렸다.

“아, 아가씨! 괜찮으세요?”

그제야 하녀가 호들갑을 떨며 하영령을 부축했다.

“아이고, 이거 어째? 아주 많이 다치셨나 봐. 아가씨! 괜찮으세요, 아가씨?”

하녀는 뒤늦게 난리를 피웠다.

사람을 불러라, 의원을 불러라 소리치는 하녀의 소란 속에, 말없이 고개 숙인 하영령의 뺨에는 한 줄기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

화려한 광주의 밤거리를 운현은 강 총관을 부축한 채 걷고 있었다.

사람들의 흥겨운 소음과 반짝이는 오색 등불이 마치 먼 배경처럼 그들을 스쳐 지나갔다.

“……강 총관님.”

운현이 나지막이 말했다.

“반드시 지켜야만 했던, 정말로 소중한 것을 지키지 못한 사람도 살아갈 수 있습니까?”

“네, 도련님.”

강 총관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운현에게 부축을 받고 있는 그는 흐린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살아갈 수 있습니다.”

“교만과 어리석음으로 소중한 사람을 잃어버린 저 같은 사람도…….”

운현의 뺨에 눈물이 흘렀다.

자신이 지키지 못한 것이 얼마나 큰 의미였는지, 자신이 잃어버린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지, 운현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용서받을 수 있을까요?”

울음 섞인 그 목소리에 강 총관의 마음 또한 먹먹해졌다.

“네, 도련님.”

떨리는 목소리로 강 총관은 말했다.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강 총관의 눈에도 어느새 눈물이 가득했다.

“하늘이 바라는 것은.”

어두운 밤하늘 사이로 반짝이는 별을 보며, 강 총관은 조용히 말했다.

“……고통이 아니라, 용서니까요.”

운현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하지만 부축한 그의 어깨가 가늘게 들썩이는 것을, 강 총관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강 총관의 뺨에도 뜨거운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고 있었다.

화려한 광주의 불빛 아래, 두 사람은 그렇게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

운가상단에 돌아온 강 총관은 운현의 부축을 뿌리쳤다.

무리를 하는 것이 분명했지만, 강 총관은 ‘자신의 침상 정도는 혼자서 찾을 수 있다’며 운현의 도움을 거절했다.

결국 운현은 강 총관과 작별하고 자신의 숙소로 돌아왔다.

그리고 불도 켜지 않은 채, 그대로 침상에 털썩 주저앉았다.

“후우.”

긴 한숨을 쉰 운현은 그대로 뒤로 드러누었다.

털썩.

피곤했다.

자신 안에 있던 분노와 슬픔을 모두 토해 낸 탓일까?

아니면 한 번 모든 것을 내려놓았던 때문일까?

하루 종일 중노동이라도 한 것처럼 온몸에 힘이 없었다.

‘마주 보라고 하셨던가?’

텅 빈 마음에 문득 강 총관의 말이 떠올랐다.

마주 볼 용기만 있다면 반드시 극복할 수 있다고 그는 말했다.

세상에는 용서와 화해, 회복이라는 것도 있다고, 그리고 기회는 반드시 온다고도 했다.

―하늘이 바라는 것은 용서니까요.

“후후.”

운현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외면한다고 사라지는 건 아니다라…….’

진예림은 그렇게 말했다.

물론 아무것도 모르고 한 말이다.

하지만 그녀의 말은 옳았다.

자신은 외면하고 있었다.

비록 겉으로는 성실하고 멀쩡해진 것처럼 보였지만, 자신은 여전히 그날로부터 도피하고 있었던 것이다.

애써 고개를 돌려 외면하며 말이다.

“인정하고, 마주 본다.”

운현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강 총관이 말했다.

과거를 극복하는 유일한 길은 인정하고 마주 보는 것이라고.

‘하지만 인정하고 마주 본다고 해도, 무엇을 해야 하지?’

운현은 누운 채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눈이 서서히 감기고 있었다.

잘 생각은 전혀 없었고 졸리지도 않았지만, 몸은 어느새 잠에 빠져들고 있었다.

‘아. 그래.’

문득 운현은 떠올렸다.

‘오늘은 제대로…….’

흐릿해 가는 의식 속에 운현은 생각했다.

어느새 자신이 눈을 감고 있다는 것도 몰랐다.

‘용서를 구해야…….’

운현은 항상 도망치듯 악몽에서 깨어났다.

꿈에서조차 피에 젖은 독고랑의 눈을 마주칠 용기가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오늘만은 그렇게 도망치지 말자고 생각했다.

그에게 마땅히 빌었어야 할 용서를, 진작에 구했어야 할 용서를 구하자고 운현은 생각했다.

그리고 천천히 운현은 잠에 빠져들었다.

***

‘아, 이건…….’

아주 익숙한 장소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운현은 이것이 꿈임을 자각했다.

그것은 참으로 이상한 경험이었다.

보통은 꿈을 자각하더라도 단편적인 광경의 연속에 불과한데, 지금은 주변을 분명히 의식할 수 있었다.

게다가 놀랄 만큼 생생한 현실감은 자신이 깨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이것은 꿈이다.

이제는 결코 돌아오지 못할, 지나간 한때의 꿈.

띠링.

지나는 바람에 풍경이 소리를 냈다.

황금빛 이중 지붕과 붉은 담으로 둘러싸인 황궁의 오후 한 가운데 운현은 서 있었다.

지켜보는 금군 교두 일충현의 든든한 시선을 느끼며 운현은 천천히 목검을 들어 올렸다.

‘그래. 어쩌면 이때가 가장 행복했는지도…….’

온전히 검에 집중하던 자신과 부드러운 눈빛으로 지켜봐 주는 사람들.

당시엔 정말이지 답답하고 힘들었는데, 돌이켜보면 이때야말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어쩌면 그저 추억이 아름답게 채색된 것뿐인지도 모르지만.

사락.

꿈속의 자신이 천천히 움직였다.

무엇을 하는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손에 든 목검에서 펼쳐지는 것은 바로 백호수련검 십이식이었다.

후웅.

운현은 어느새 꿈속의 자신과 하나가 되었다.

너무나도 그리운 검로가 물결처럼 손끝에서 흘러나왔다.

답답한 현실도, 볼품없는 창룡전 학사의 모습도 그곳엔 없었다.

다만 있는 것은 유려하게 펼쳐지는 아름다운 검로뿐.

세상도, 나도 잊었다.

‘아아.’

바로 그때였다.

저벅.

일충현이 웃으며 뒤로 물러섰다.

‘형님!’

운현이 외치려 했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목검을 멈추지도 못했다.

도도하게 흘러나오는 백호수련검은 어느새 족쇄가 되어 운현을 강제로 움직여 가고 있었다.

‘안 됩니다! 형님! 형니임!’

금군 교두의 차림은 어느새 형틀을 쓴 죄인으로 변했다.

흐트러진 머리의 일충현은 쓰디쓴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사라져 갔다.

‘형니이이임!’

촤아아아.

물결 소리가 운현의 외침을 삼켰다.

운현은 퍼뜩 눈을 들었다.

황금빛 이중 지붕도, 높다란 붉은 담도 사라졌다.

손안의 목검은 온데간데없고, 운현은 거대한 북해 앞에 서 있었다.

철썩, 철썩.

부서지는 파도 소리와 코끝에 느껴지는 물내음.

한밤의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바다같이 거대한 호수는 밤하늘 아래 고요히 누워 있었다.

운현은 고개를 들었다.

밤하늘엔 쏟아질 듯 별이 가득했다.

티리링.

한 자락의 비파 소리가 운현을 일깨웠다.

고개를 돌린 운현은 그녀의 모습을 발견했다.

살포시 감은 고운 눈, 오똑한 콧날 아래 자리한 붉은 입술.

한 송이 눈꽃처럼 아름다운 미녀가 달빛 아래 비파를 안고 앉아 있었다.

그녀의 길고 하얀 손가락이 움직일 때마다 은빛 가조각(假爪角)이 달빛을 받아 반짝였다.

‘소궁주.’

그녀는 바로 북해의 소궁주였다.

비파의 현이 멈추고, 소궁주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반짝이는 눈동자가 운현을 똑바로 향했다.

“기억하고 있나요?”

붉은 입술이 달싹이며 물었다.

“아직도, 기억하고 있나요?”

운현은 대답하고 싶었다.

그렇다고, 잊을 리가 없지 않느냐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운현의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마치 얼어붙기라도 한 것처럼, 운현은 입조차 열지 못했다.

“나를, 내 이름을…….”

쏴아아아.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지독한 한기가 온몸을 찌르고, 별이 빛나던 밤하늘은 어느새 사라졌다.

그리고 소궁주의 모습은 눈보라 사이로 사라져 가고 있었다.

“……아직도, 기억하고 있나요?”

그녀의 목소리는 점차 희미해졌다.

그러나 운현은 손끝 하나 움직이지 못했다.

마치 온몸이 옭죄인 것처럼 운현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운현은 외치고 싶었다.

기억하고 있다고, 아직도 잊지 않고 있다고.

사락, 사락.

그러나 소궁주의 모습은 어느새 얼음과 눈보라 사이로 사라져 버렸다.

거대한 북해마저 새하얗게 얼어 버린 극한의 세계에서, 운현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끔찍한 무력감이 전신을 뒤덮었다.

그 무력감은 자연스럽게 또 다른 순간을 떠오르게 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절대 떠올리고 싶지 않은 그때의 한가운데로 말이다.

훅.

‘독고랑!’

피로 물든 독고랑이 눈앞에 있었다.

언제나처럼 올곧은 그 눈동자로, 독고랑은 운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운현은 눈을 감고 싶었다.

그러나 그조차 할 수 없었다.

피로 물든 눈동자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독고랑 앞에서, 운현은 그저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다.

사락.

붉은 독고랑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그 피눈물은 무방비 상태의 운현을 향해 똑바로 떨어져 내렸다.

‘헉!’

운현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려 했다.

언제나처럼 그렇게.

그러나 그 순간 하나의 의지가 운현을 붙잡았다.

‘안 돼!’

오늘도 독고랑을 외면할 수는 없다.

오늘만은, 적어도 오늘 하루 만이라도 이대로 고개를 돌려서는 안 된다.

운현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피눈물이 운현의 뺨에 떨어졌다.

틱.

그 섬뜩한 감촉을 느끼면서도 운현은 독고랑을 외면하지 않았다.

눈을 감지도,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다.

그리고 보았다.

‘……아.’

독고랑은 미소 짓고 있었다.

비록 피로 물들어 있었지만, 독고랑은 그 어느 때보다 부드러운 미소로 운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제.”

담담하고도 부드러운 목소리로 독고랑은 말했다.

그의 눈동자에 무력한 자신의 모습이 그대로 비쳐 보였다.

“가셔야 할 시간입니다.”

푸른 달빛 아래, 독고랑은 미소짓는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그것은 마치 찻잔을 앞에 두고 서로 한담을 나누듯, 너무나 부드럽고 따뜻한 표정이었다.

***

운현은 눈을 떴다.

새벽 어스름 사이로 익숙한 숙소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자신이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잠이 들어 버렸다는 건 금방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운현은 일어나지도, 옷을 갈아입지도 않았다.

‘아아!’

운현은 그대로 몸을 웅크렸다.

푸른 달빛이 가득한 밤하늘 아래 독고랑은 미소 짓고 있었다.

이제 다시 볼 수 없다는 것을, 자신이 피 웅덩이 속에 버려질지 모른다는 것을 알면서도 독고랑은 운현을 향한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그랬다.

그는 이미 운현을 용서하고 있었던 것이다.

운현이 용서를 빌기도 전에, 이미 처음부터.

주륵.

눈물이 흘렀다.

그것은 곧 운현의 뺨을 타고 흘러내려 침상을 적셨다.

하지만 운현은 상관하지 않았다.

“……독고 제.”

악다문 잇사이로 떨리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독고 제.”

차마 입에 담지 못한 이름, 떠올리는 것조차 의식적으로 피했던 이름이, 이제야 운현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끅, 흐윽, 흑흑.”

눈물이 터져 나왔다.

침상에 어린아이처럼 웅크린 운현은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꼈다.

두 눈이 마치 샘이라도 된 것처럼, 흐르는 눈물은 멈출 줄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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