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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277화 (277/530)

277화. 이제 그만해요

호연기가 운현에게 시비를 걸기 시작할 때, 하영령은 사뭇 즐거운 마음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주 무례한 자로군.”

운현에게 호연기가 그런 말을 했을 때는 사뭇 과장된 어조로 조그맣게 응원하기도 했다.

“오라버니, 멋져어.”

어떻게 알았을까 싶을 정도로 호연기는 하영령의 마음에 쏙 드는 말만 했다.

어르신인 강 총관의 어깨를 누를 때는 조금 불편하기도 했지만, 운현의 표정이 굳는 것을 보는 것은 정말이지 재미있었다.

“흥. 남의 눈에 눈물 나게 하면, 자기 눈에서 피눈물 나는 법이라고.”

그렇게 말하며 하영령은 시시각각 굳어 가는 운현의 표정을 즐거이 감상했다.

퍽!

호연기가 운현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을 때는 움찔했다.

피가 흐르는 것을 보았을 때는 자신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흥.”

하지만 하영령은 애써 코웃음을 흘렸다.

“뭐, 자업자득이니까.”

혼잣말처럼 하영령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부터, 하영령은 재미가 없어졌다.

“……이제 됐나?”

차갑고 메마른 운현의 목소리.

어쩐지 그 목소리는 호연기가 아닌 하영령 자신을 향한 것처럼 들렸다.

하영령은 갑자기 불쾌해졌다. 그것도 아주 많이.

“쳇.”

와장창.

호연기의 발길질에 운현이 나뒹굴었지만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저대로 끝나리라 생각하며, 하영령은 휘장을 닫으려 했다.

하지만 상황은 이상하게 전개되기 시작했다.

“각오해라, 이노옴!”

살기 가득한 호연기의 목소리에 하영령은 고개를 돌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녀가 보기에도 호연기의 권격은 범상치 않았다.

‘앗!’

하영령은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놀랍게도 호연기가 헛손질을 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운현의 표정이 처참하게 일그러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고작 그것이더냐!”

운현이 외쳤다.

“겨우 그걸로 세상에 무서운 것이 없었더냐?”

마치 호연기를 향해 조롱하는 듯 보였지만, 그 목소리에 분노와 절망이 가득한 것을 하영령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따위 실력으로!”

조롱 당하는 사람은 어쩌면 호연기다.

그러나 울고 있는 사람은 운현이었다.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는 거냐!”

격렬한 그 외침이, 아니 그 절규가 하영령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아!’

하영령은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운현은 그녀를 무시한 것도, 훈계한 것도 아니었다.

잘난 척 내려다보며 깔본 것도 아니었다.

그는 단지 그녀를 배려할 여유가 없었던 것뿐이다.

겉으로는 고고한 학자처럼 보였지만, 운현의 마음은 이미 피를 흘리고 있었으니까.

“……고작 그런 능력으로.”

운현은 주먹을 들어 바닥을 내리찍었다.

쾅.

하영령의 가슴이 울렸다.

“이 바보 같은 놈! 등신! 머저리!”

쾅, 쾅.

운현의 주먹이 바닥을 칠 때마다 하영령의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저 불쌍한 사람에게 자신은 무슨 짓을 한 것일까?

쾅.

“이 쓰레기 같은 자식아아!”

그 절규에 하영령은 더 이상 그곳에 앉아 있을 수 없었다.

덜컹.

하영령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칠게 휘장을 젖힌 하영령은 아래층을 향해 뛰어갔다.

손목과 옷에 매단 장신구들이 흔들리며 요란하게 소리를 냈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탓탓탓.

계단 부근에 있던 하녀가 놀란 눈을 하고 일어섰다.

“아, 아가씨!”

하지만 하영령은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치맛자락을 붙들고 급하게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자, 잠깐만요, 아가씨!”

하녀가 뒤에서 무어라 소리쳤지만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일 층에 몰려 있는 사람들을 헤치고 무작정 뛰어갔다.

그리고 그녀는 보았다.

고개를 떨군 채 미동조차 하지 않는 운현에게, 호연기가 섬뜩한 칼을 들고 다가서고 있는 모습을.

탓.

하영령은 주저하지 않았다.

그녀는 즉시 운현과 호연기 사이로 뛰어들었다.

“이제 됐어요!”

팍.

하영령은 운현을 등지고 한 팔을 벌렸다.

한 손으로 여전히 치맛자락을 붙든 채, 하영령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그러니 이제 그만해요.”

“하, 하 매!”

호연기가 놀란 눈으로 하영령을 보았다.

하영령은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돌렸다.

운현은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아 있었다.

누가 자길 죽여도 상관하지 않겠다는 듯이.

“……제발 그만하세요.”

호연가기 아닌 운현을 쳐다보며 하영령이 말했다.

그 목소리는 완연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덕분에 칼을 든 호연기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을, 하영령은 보지 못했다.

“비켜, 하 매.”

하영령은 호연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지 말아요!”

간곡한 목소리로 하영령이 말했다.

“이제 충분하잖아요!”

“충분?”

호연기의 눈빛이 섬뜩하게 빛났다.

“……뭐가, 충분하다는 거지?”

하영령은 흠칫했다.

호연기의 눈동자가 질투와 패배감, 그리고 분노로 가득했다.

그의 손에 들린 칼이 섬뜩한 빛을 번뜩이는 것이 그제야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네가 원한 거잖아.”

저벅.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호연기가 말했다.

호연기는 바보가 아니다.

충동적으로 시작했지만 하영령이 자신을 부추긴 것임을 이제는 그도 알고 있었다.

“그러니 끝을 내야지. 안 그래?”

하지만 이젠 더 이상 하영령만의 문제가 아니다.

게다가 자신의 앞을 막은 하영령의 모습은, 잠시 가라앉았던 질투와 욕망을 다시금 불붙게 했다.

“아아…….”

공포에 질린 하영령은 자신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상단의 평범한 아가씨인 그녀에게 호연기의 기세와 번뜩이는 칼날은 감히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턱.

그런 그녀의 어깨에 누군가의 손이 얹혔다.

‘아!’

돌아보는 그녀 앞에 운현이 서 있었다.

“비키십시오, 소저.”

그 목소리는 너무나도 차가웠다.

자신을 바라보는, 마치 죽은 듯한 운현의 눈동자가 너무나 가슴 아파서 하영령은 그만 눈물을 쏟을 뻔했다.

그 모습을 호연기는 매서운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놈!’

들끓는 분노에도 불구하고 호연기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운현이 보여 준 기이한 수법도, 그리고 이대로 자신의 치욕스러운 소문이 퍼져 나가는 것도.

그래서 자신의 눈앞에 기회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 호연기는 주저하지 않았다.

“하, 하지만…….”

“비키세요.”

그 순간, 하영령을 바라보는 운현의 시선은 완전히 호연기에게서 벗어나 있었다.

호연기는 눈을 번뜩였다.

탁.

“타아!”

한 발을 크게 내디디며 호연기는 검을 그어 내렸다.

자칫 하영령이 다칠 수도 있었지만 그런 걸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무슨…….”

갑작스러운 기합 소리에 하영령은 고개를 돌렸다.

순간 그녀는 파랗게 질리며 굳어 버렸다.

쉭.

서슬 퍼런 칼날이 그녀를 향해 짓쳐 들고 있었던 것이다.

놀란 것은 호연기도 마찬가지였다.

‘헉!’

호연기는 아차 싶었다.

그의 검은 스스로의 생각만큼 정교하지 못했다.

운현의 빈틈을 노리려던 칼날은 이미 하영령을 향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운현뿐 아니라 하영령까지 베어 버릴 것이 분명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휙.

하영령이 거칠게 옆으로 밀려났다.

넘어지듯 밀려나던 하영령은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자신을 밀어낸 운현과, 짓쳐 드는 칼날을 무심히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였다.

‘아!’

운현은 그저 서 있을 뿐이었다.

피하지도, 막으려 하지도 않았다.

떨어지는 칼날을 바라보는 운현의 눈빛은, 마치 죽은 사람 같았다.

‘안 돼!’

하영령이 다급히 외치려던 바로 그때, 날카로운 쇳소리가 주루에 울려 퍼졌다.

카앙.

짓쳐 들던 호연기의 검이 무언가에 가로막혔다.

그리고 곧 묵직한 기합 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압!”

치이잉, 탁!

호연기의 검이 그의 손을 벗어나 공중을 날았다.

“꺅!”

누군가의 비명과 함께 날아간 호연기의 검은 정확히 주루 기둥에 박혀 버렸다.

텅.

굵은 기둥에 박힌 검이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호연기는 손을 감싸쥐며 신음을 흘렸다.

찢어진 호연기의 손아귀에선 피가 흐르고 있었다.

“이게 무슨 짓인가!”

저벅.

덩치 큰 항장익이 사뭇 커다란 목소리로 말했다.

어느새 운현과 호연기 사이에 선 그의 손에는 검 한 자루가 쥐어져 있었다.

그가 자신의 검으로 호연기의 검을 쳐 낸 것이다.

“무기도 들지 않은 아가씨를 죽일 셈이더냐!”

내력이 담긴 그 목소리는 주루를 쩌렁쩌렁 울렸다.

호연기도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제야 주변이 눈에 들어왔다.

운현의 발 아래 쓰러진 하영령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떨고 있는 모습도, 주루의 손님들이 두려움과 경멸의 눈빛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것도.

“아, 아니야! 나는, 나는…….”

부인해 보았지만 호연기는 말을 잇지 못했다.

누가 봐도 자신이 하영령을 죽이려던 상황이었다.

“무슨 일이냐!”

“물러나시오! 물러나시오!”

요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십수 명의 무사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난화주루의 보호를 책임지고 있던 호위무사들이었다.

사람들을 헤치며 들어온 무사들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흠칫 놀랐다.

“셋째 도련님!”

그들은 호가장에서 이곳 난화주루에 보낸 무사들이었다.

“내, 내가 아니야!”

호연기는 급히 외쳤다.

“이놈들이다! 이놈들을 잡아!”

호가장 무사들은 즉시 흉흉한 눈빛으로 항장익과 운현을 둘러쌌다.

바로 그때였다.

“멈추시게!”

저벅, 저벅.

고급스러운 비단옷을 입은 뚱뚱한 체격의 중년인이 앞으로 나섰다.

호연기의 얼굴이 순간 반색이 되었다.

“지, 지배인!”

“내가 호가장을 후대한 것은.”

중년의 지배인은 싸늘한 눈빛으로 말했다.

“쓸데없는 소란을 막아 달라는 것이지 말썽을 일으켜 달라는 것이 아니었소이다.”

“그, 그게 아니라…….”

“감히 난화주루에서 소란을 피우고 하청상단의 아가씨에게까지 검을 휘둘렀으니 이 일을 어찌 책임질 셈이오!”

지배인의 기세는 사뭇 삼엄했다.

이곳은 다름아닌 난화주루다.

내로라 하는 가문과 권력자들은 모두 이곳과 친분이 있었다.

광주에서 세를 뻗치는 무가들이 난화주루를 집어삼키지 못하고 그저 보호 계약에 만족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인 것이다.

“내 호가장에 반드시 이 책임을 묻겠소!”

호연기의 안색이 삽시간에 굳어 버렸다.

그의 부친, 호가장 장주는 난화주루에 대단히 공을 들였다.

자신이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음을 호연기는 똑똑히 알 수 있었다.

“우리 도련님께서 그러셨을 리가 없소!”

호가장의 무사 중 한 명이 말했다.

하지만 지배인은 코웃음을 쳤다.

“여기에 있는 광주의 귀인들께서 모두 보신 일이네. 그런데도 호가장이 발뺌을 할 셈인가?”

지배인은 사뭇 강하게 말했다.

그로서도 이것은 좋은 기회였다.

고정 지출을 줄이는 것은 물론, 호가장의 콧대도 꺾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썩 나가게! 이 일은 차후에 엄히 묻도록 하겠네!”

지배인의 호통에 호가장 무사들이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당사자인 호연기가 아무런 항변도 못 하고 있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호가장 무사들이 호연기를 부축하고 주루를 떠나고, 구경하던 손님들도 자리로 돌아갔다.

지배인이 연신 사과하며 손님들에게 공짜 술과 요리를 내는 동안, 항장익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운현을 보았다.

“그대로 칼을 맞을 생각이었나?”

운현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의 검이 다가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항장익은 눈살을 찌푸렸다.

자신이 호연기의 검을 걷어 낸 것은 매우 아슬아슬했다.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운현은 그대로 베어졌을 터였다.

“만일 내 검이 늦었다면?”

운현은 쓴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그뿐, 대답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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