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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276화 (276/530)
  • 276화. 자책과 분노

    호연기는 피식 조소를 흘리며 운현에게 말했다.

    “왜 이러냐고? 이미 말했잖아. 네가 너무 무례해서라고.”

    “무례?”

    운현은 어이가 없었다.

    처음부터 시비를 걸어온 사람은 호연기다.

    하지만 지금은 시시비비를 따지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그분을 놓아 드려.”

    강 총관의 어깨에 놓인 호연기의 손을 보며 운현이 말했다.

    호연기는 빙긋 웃었다.

    “아, 이 손 말이야? 놓는 거야 물론 간단하지만.”

    “크윽.”

    강 총관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지며 신음이 흘러나왔다.

    호연기의 손이 강 총관의 어깨를 더욱 파고든 것이다.

    강 총관의 어깨는 탁자에 닿을 듯 기울고 있었다.

    “부탁은 좀 더 정중해야 하지 않을까?”

    운현을 바라보는 호연기의 눈동자가 번들거렸다.

    달칵.

    운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한 발 앞으로 나서며 강 총관의 어깨를 향해 손을 뻗었다.

    “어허, 어딜.”

    순간 호연기의 손이 기묘하게 움직였다.

    쉭.

    호연기는 금나수의 수법으로 운현의 손을 쳐 내고 다시 총관의 어깨에 얹으려 했다.

    운현의 화를 더욱 돋우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았다.

    탓.

    운현을 향해 뻗던 호연기의 손이 갑자기 튕겨 났다.

    자신의 금나수가 운현의 손을 쳐 내려던 그 순간, 운현이 절묘한 위치에서 호연기의 손을 걷어 냈기 때문이다.

    ‘윽.’

    덕분에 호연기의 손은 허공을 허우적거렸고, 균형을 잡기 위해 옆으로 몇 발자국 물러서야 했다.

    강 총관의 어깨를 놓친 것은 물론이었다.

    탁.

    ‘이, 이게 무슨…….’

    “괜찮습니까? 강 총관.”

    그사이, 운현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강 총관을 부축하고 있었다.

    눌렸던 어깨가 심하게 고통스러운 듯 강 총관은 한쪽 팔을 움직이지 못했다.

    “이놈이!”

    당황한 마음에 호연기는 운현을 향해 반사적으로 주먹을 날렸다.

    퍽!

    그의 주먹은 운현의 얼굴을 쳤다.

    반사적으로 날린 터라 내력은 실리지 않았지만 충분히 강한 주먹이었다.

    운현의 고개가 홱 돌아가고 그의 몸이 휘청 흔들릴 정도로.

    슥.

    그러나 운현은 쓰러지거나 뒤로 물러나지는 않았다.

    운현은 천천히 고개를 바로했다.

    입술이 터져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운현은 상관하지 않았다.

    “……이제 됐나?”

    그 눈동자에 분노는 없었다.

    있는 것은 그저 메마른 감정뿐, 그러나 그것은 호연기의 화를 더욱 부추겼다.

    “이놈이 감히!”

    호연기는 몸을 틀며 강하게 발을 내질렀다.

    퍽.

    “꺄악!”

    콰장창.

    탁자가 뒤집어지고 음식 접시들이 부서져 나갔다.

    다른 손님들의 비명이 터지는 가운데, 가슴을 정통으로 맞아 쓰러졌던 운현이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쏟아진 음식으로 운현의 옷은 엉망이 되어 있었지만, 호연기를 바라보는 그 눈빛은 여전히 냉막하기만 했다.

    으득.

    맞은 사람은 운현이나 이를 간 자는 호연기였다.

    ‘이놈이 아직도!’

    이 정도로 호연기는 절대 만족할 수 없었다.

    저 재수없는 눈빛을 굴복시키고, 자신이 압도적 강자라는 것을 하영령에게 보여 줘야 했다.

    지금도 이곳을 내려다보고 있을 그녀에게 말이다.

    저벅.

    호연기는 운현을 향해 걸어갔다.

    움켜쥔 그의 주먹에는 어느새 내력이 모여들고 있었다.

    ***

    “와! 역시 난화주루!”

    담소하가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신기해했다.

    항장익, 진예림, 담소하 세 사람은 식사 후에 이곳 난화주루까지 왔다.

    광주에서 반드시 가 봐야 하는 곳이라며 담소하가 고집을 부렸기 때문이다.

    어차피 새로운 임무가 시작되기 전이라, 세 사람은 가벼운 마음으로 난화주루에 왔다.

    “뭐, 그저 그렇네.”

    진예림이 별것 아니라는 듯 말했다.

    하지만 그녀 역시 주변을 돌아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자, 조 대인께서 오시기 전에 간단하게 주문을……. 응?”

    웃는 얼굴로 말하던 항장익의 표정이 굳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꺄악!”

    콰장창.

    놀란 비명과 함께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진예림과 담소하는 고개를 돌렸다.

    “……시비가 붙었나 보네요.”

    날카로운 시선으로 상황을 살핀 담소하가 말했다.

    “저런 거야 주루에선 흔한……. 어?”

    담소하가 피식 웃으며 진예림을 돌아 보았다.

    “또 저 사람이네요? 누님이 아는 남자요.”

    진예림의 표정은 이미 일그러져 있었다.

    “……그러네. 대체 저 남자는 왜 내 앞에서만 얻어터지고 있는 거야?”

    그녀가 그렇게 말할 만도 했다.

    가슴에 발차기를 맞고 뒤로 밀려 나간 사람은 바로 운현이었기 때문이다.

    “이것도 무슨 인연 아니에요? 헤헤.”

    담소하가 놀리듯 말하고 진예림이 눈꼬리를 올리던 때였다.

    “……저 사람.”

    커다란 몸으로 항상 웃던 항장익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조금 전 몸을 뒤로 뺐다. 발에 맞는 그 한순간에.”

    “네?”

    담소하와 진예림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부서진 탁자와 쏟아진 음식 사이로 운현이 비척비척 일어서고 있었다.

    “잘못 본 거 아니에요?”

    항장익의 말대로라면 운현이 의도적으로 상대의 힘을 흘려 냈다는 뜻이다.

    비록 완전하진 못해도 말이다.

    “아니.”

    항장익은 눈을 가늘게 떴다.

    “분명하다. 저 사람, 뭔가 있어.”

    평소엔 마냥 사람 좋아 보이는 항장익이지만 그의 무공은 결코 평범한 것이 아니다.

    “정말요?”

    담소하와 진예림은 다시 고개를 돌려 운현을 보았다.

    하지만 그들의 눈엔 그저 방금 봉변을 당한, 연약한 서생의 모습밖에 보이지 않았다.

    ***

    운현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옷은 엉망이 되었지만 충격은 거의 없었다.

    발이 날아오는 것이 뻔히 보였고, 자신도 모르게 몸을 뒤로 빼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소리는 요란했지만 실제로 다친 건 아니었다.

    저벅, 저벅.

    고개를 드니 호연기가 걸어오고 있었다.

    “너, 이놈!”

    이를 가는 호연기의 눈빛은 분노로 이글거렸다.

    움켜 쥔 그의 주먹에 내력이 모여들고 있음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 모습에서 운현이 느낀 감정은, 바로 허탈이었다.

    ‘허.’

    운현은 이해할 수 없었다.

    처음 보는 자신에게, 은원은커녕 아무런 연관조차 없는 자신에게 왜 저런 분노를 쏟아 내는 것일까?

    당장이라도 운현을 죽일 듯한 살기는 대체 무엇에서 연유한 것일까?

    이것이 잘못된 일이라고 설명한다 해도 상대는 과연 납득하고 이해해 줄까? 아니, 들으려고나 할까?

    저벅, 저벅.

    슥.

    호연기는 걸어오며 천천히 내력을 끌어 올렸다.

    그 눈빛에 운현은 그가 살심을 품은 것을 알았다.

    하지만 운현은 오히려 헛웃음이 나왔다.

    ‘대체 왜…….’

    처음 본 사람을 죽이려 든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아니, 애초에 이유 같은 건 의미가 없는지도.’

    싸움은 본래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자신을 향한 호연기의 이유 없는 살의처럼, 항주의 혈전 역시 그런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무런 이유 없이 싸우고, 죽고, 다치고, 헛되이 피와 목숨을 버리며 말이다.

    ‘이런 무의미한 이유들 때문에…….’

    수많은 목숨이 항주에서 다치고 피 흘리며 스러져 갔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을 위해 허다한 사람들이 서로를 죽였다.

    그리고 독고랑이 죽었다.

    아무것도 아닌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아닌 자신 때문에.

    후욱.

    무엇인가 뜨거운 것이 운현의 가슴 깊은 곳에서 치솟아 올랐다.

    그것은 바로 분노였다.

    자기 자신을 향한, 그리고 이 부조리한 세상 모든 것을 향한 분노가 운현을 삽시간에 집어삼켰다.

    “각오해라, 이노옴!”

    문득 호연기의 분노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내력이 실린 일권이 운현을 향해 짓쳐 들었다.

    부우욱.

    그것은 호가장의 절기라는 호가 삼연권이었다.

    평범한 사람이 맞는다면 목숨마저 잃을 수 있는 명백한 살수.

    그러나 그것을 바라보는 운현의 눈빛은 시퍼렇게 일렁이고 있었다.

    “하아아!”

    호연기의 외침과 함께 그의 권격이 운현의 얼굴을 향해 날아들었다.

    하지만 그의 삼연권은, 첫 일격조차 제대로 성공하지 못했다.

    슥.

    운현은 가볍게 머리를 움직였다.

    호연기의 일권은 헛되이 허공을 갈랐다.

    “이익!”

    그는 즉시 두 번째 권격을 날렸다.

    그러나 그 권격은 운현이 휘두른 손에 가볍게 튕겨 나 버렸다.

    “헉!”

    호연기의 손이 허공을 휘젓고, 그는 순식간에 세 걸음이나 뒤로 물러났다.

    탁, 타닥.

    눈앞에서 벌어진 일을 호연기는 믿을 수가 없었다.

    운현이 손등으로 자신의 권격을 슬쩍 들어 올리는 듯 싶더니, 자신의 몸이 크게 균형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것뿐이냐?”

    운현이 싸늘한 눈동자로 말했다.

    “겨우 그걸로, 세상에 무서운 것이 없었더냐?”

    “닥쳐라!”

    후웅.

    호연기는 운현을 향해 짓쳐 들며 권격을 내질렀다.

    본디 호가 삼연권의 묘리는 연이어 펼쳐지는 권격의 매서움과 강력함에 있다.

    하지만 호연기는 묘리를 살릴 실력도, 자제심도 없었다.

    호연기의 동작은 크고 지나치게 힘이 들어가 있었으며 너무나도 알기 쉬웠다.

    휙.

    호연기의 권격이 헛되이 허공을 가르고, 운현이 소리쳤다.

    “고작 그것이더냐!”

    분노로 사로잡힌 운현은 외쳤다.

    “그따위 실력으로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는 거냐?”

    운현의 외침은 격렬했다.

    “그깟 재주로 사람들을 구해 낼 수 있다고 자만했어!”

    “닥치지 못하느냐!”

    호연기가 외치며 미친 듯이 주먹을 내질렀다.

    이제는 삼연권이고 뭐고 없었다.

    그의 얼굴은 수치로 달아올랐고, 운현을 향한 분노는 극에 달해 있었다.

    그러나 운현의 표정은 그보다 더 참담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휙.

    호연기의 권격을 피한 운현이 그대로 몸통 박치기를 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어쩌면 자포자기 같은 선택이었다.

    쿵.

    두 사람의 몸이 격렬하게 충돌했다.

    충격을 받은 호연기는 꼴사나운 모습으로 뒤로 나뒹굴었다.

    운현 역시 마찬가지였다.

    충격을 지지할 별다른 자세조차 취하지 않았던 운현은 휘청이며 뒤로 물러나다가 넘어졌다.

    콰장창, 쿠당탕.

    식기가 부서지고 음식이 튀었다.

    호연기의 모습은 그야말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덜그럭.

    똑같이 뒤로 나뒹굴었던 운현이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나 그는 호연기도, 놀란 주변 사람들도 바라보지 않았다.

    부서진 식기와 음식물로 더러워진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운현은 이를 악물었다.

    “……고작 그런 능력으로.”

    운현은 천천히 주먹을 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바닥을 내리찍었다.

    쾅.

    “이 바보 같은 놈! 등신! 머저리!”

    쾅, 쾅.

    운현은 맨주먹으로 몇 번이고 바닥을 내리쳤다.

    그의 주먹이 금방 피로 물들었다.

    쾅.

    “이 쓰레기 같은 자식아아!”

    그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운현 자신을 향한 절규였다.

    침묵이 흘렀다.

    덜컥.

    호연기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굳은 표정으로 자신의 검을 뽑았다.

    스릉.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다만.”

    운현을 쳐다보며 호연기는 말했다.

    “내게 치욕을 주었으니 그 대가는 치러야겠다.”

    호연기의 표정은 싸늘했고 눈빛은 살벌했다.

    운현에게 무언가 사연이 있는 것은 분명했지만 상관없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그에게 치욕을 당했다는 사실이었다.

    지금 여기서 운현을 죽이지 않으면, 자신은 이제 광주에서 고개를 들고 다닐 수가 없을 것이다.

    호가장의 자제가 한낱 서생에게 당해 바닥을 나뒹굴었으니 말이다.

    저벅, 저벅.

    호연기는 천천히 운현에게 다가갔다.

    그의 손에 들린 칼날이 화려한 등불 아래 섬뜩하게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운현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이미 아무 상관도 없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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