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5화. 그대의 불운에, 건배
운현을 바라보는 강 총관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잘못은 누구라도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아무리 쓰라린 과거라 할지라도…….”
운현을 향해 강 총관은 말했다.
“정면으로 마주 볼 용기가 있다면 극복할 수 있습니다.”
“……마주, 본다고요?”
“그렇습니다.”
강 총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실패와 과거를 피하는 사람은 결국 계속 쫓겨 다니게 될 뿐입니다. 상처는 아물지 않고 고통은 깊어만 가지요. 과거를 극복하는 유일한 길은, 그것을 인정하고 마주 보는 것뿐입니다.”
“하지만…….”
운현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고개를 떨구었다.
“이제는 두 번 다시 볼 수 없다면, 용서를 구할 기회조차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운현은 고개를 들었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강 총관은 말했다.
“기회는 반드시 옵니다. 하늘은 형벌이 아니라 용서를 원하니까요.”
운현은 이를 악물었다.
으스러질 듯 잔을 쥔 채, 운현은 신음처럼 말했다.
“하지만……, 나는…….”
“도련님은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강총관은 미소를 지었다.
“흉터는 남겠지만 상처는 아물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도련님이 자신의 잘못으로부터 도망치지도 않고 외면하지도 않는다면요.”
부드러운 목소리로 강 총관은 말했다.
“도련님이라면 반드시 할 수 있습니다.”
그의 눈빛은 더없이 따스했다.
운현은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갑작스러운 훼방꾼만 없었다면 아마도 반드시 그랬으리라.
“이거 운가상단의 강 총관 아닌가?”
난데없이 들려온 젊은 청년의 목소리에 강 총관은 깜짝 놀랐다.
아마도 그만큼 운현과의 대화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고개를 돌린 강 총관은 곧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보았다.
“아, 호가장의 셋째 도련님 아니십니까?”
강 총관은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 청년은 광주에서 제법 큰 문파인 호가장의 셋째 아들, 호연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호연기의 얼굴을 본 순간, 강 총관은 무언가 일이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우연히 만난 듯 말을 걸어온 호연기였지만 그의 두 눈에는 살기가 등등했다.
그리고 호연기의 그 살기는, 다름 아닌 운현을 향하고 있었다.
***
조금 전, 난화주루 이 층의 한 방.
“어머나, 그건 정말이지…….”
꿈에 취한 듯 몽롱한 여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화려한 휘장으로 둘러싸인 아담한 방에서 하영령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대단한 일이네요.”
잘그락.
희고 긴 그녀의 손목에 걸린 작은 옥들이 서로 부딪히며 소리를 냈다.
술잔에 닿는 그녀의 붉은 입술이 등불 아래 요염했다.
“하하하. 어찌 그 정도로 놀랍다 할 수 있겠나? 하 매.”
호가장의 셋째 아들, 호연기는 짐짓 호탕하게 웃었다.
광주는 크게 세 곳의 지역 문파들이 세력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중 한 문파인 호가장은 이곳 난화주루와도 보호 계약을 맺은 무시 못 할 문파였다.
다만 셋째 아들인 호연기 자신의 무공 실력은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웃던 호연기는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 매.”
앞에 있는 하영령은 빼어난 미인이었다.
등불 아래 보이는 그녀의 고혹적인 모습은 호연기의 마음을 들뜨게 했다.
게다가 그녀가 상당히 자유분방하다는 것도 익히 알려진 사실이 아니었던가?
“오늘 하 매는 정말로 아름답군.”
“어머, 고마워요.”
하영령은 눈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호연기의 눈길이 아까부터 자신의 몸 이곳저곳을 훔쳐보고 있다는 것을, 그녀는 이미 알아차리고 있었다.
달그락.
들고 있던 술잔을 내려놓으며 하영령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 하 매. 어딜 가려고……?”
“잠시만요.”
하영령은 매력적인 웃음을 지으면서 휘장을 살짝 걷었다.
그리고 안절부절못하는 호연기를 뒤로하고 미련없이 그곳을 나왔다.
자박, 자박.
방을 나온 하영령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녀는 빠르게 발을 옮겨 난화주루 일 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으로 향했다.
“어머, 아가씨.”
계단 부근에는 몇 개의 의자가 놓인 휴식 공간이 있었다.
하영령의 하녀는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벌써 나오셨어요?”
대꾸도 없이 하영령은 의자에 털썩 앉았다.
탁.
“아, 지루해.”
“왜요? 별로예요? 그래도 호가장의 셋째 도련님이라면 인물도 훤하고 말도 잘한다고 소문이 자자하잖아요.”
하영령은 입술을 삐죽였다.
“뭐? 인물이 훤해? 그 정도면 광주에선 어디 내밀지도 못해. 그리고 말을 잘하긴 무슨. 그런 뻔한 거짓말에 여자들이 홀랑 다 넘어갈 줄 아나 보지?”
“재미없었어요?”
“재미없는 정도가 아냐.”
하영령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무림 문파의 자제라길래 뭔가 색다른 게 있나 했는데……. 오늘은 텄어. 그냥 집에 가는 게 나을 거 같아.”
“그럼 준비할까요?”
하영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마차를 불러와.”
“저기…….”
하녀는 머뭇거리며 하영령에게 물었다.
“호가장의 도련님께는 아무 말 안 하고 가도 될까요?”
“얘는?”
하영령은 눈살을 찌푸리며 하녀를 째려보았다.
“내가 언제 그런 거 챙기는 거 봤어? 그냥 가도 돼. 여기는 원래 그런 거야.”
“그래도 호가장이면…….”
“됐어. 신경 꺼.”
한 손을 휘휘 저으며 하영령이 말했다.
하녀가 밖으로 나가고, 하영령은 짜증 나는 심기를 달래곤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아, 오늘도 지루한 하루였네.’
타박, 타박.
커다란 계단을 내려가며 하영령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다 문득, 눈에 익은 한 사람의 모습을 발견했다.
‘응?’
하영령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그녀가 결코 잊을 수 없는 사람이 난화주루 일 층에 앉아 있었다.
‘오호라. 여기서 이렇게 만났다 이거지.’
하영령은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
자신에게 훈계를 하고 면전에서 무시한 사람.
괜찮은 혼처라며 집안에서 막무가내로 몰아붙이고 있는 혼사의 상대이자, 백 번을 다시 봐도 결코 자신의 취향이 아닌 바로 그 사람, 운현이 난화주루 일 층에 있었다.
바득.
그때의 굴욕이 떠오르자 하영령은 자신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그렇지!’
문득 기가 막힌 생각이 하영령의 머리에 떠올랐다.
눈을 빛내며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던 그녀는 바로 몸을 돌려 이 층으로 올라갔다.
팔락.
하영령은 휘장을 걷으며 방으로 들어섰다.
“아, 하 매!”
호연기는 아직도 그 방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혹시 그녀가 가 버린 것은 아닐까 노심초사하던 호연기는 하영령을 보는 순간 환한 표정이 되었다.
“기다렸어요?”
하영령이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자기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하하, 하 매를 기다리는 시간이 마치 수년 같더군.”
은근한 목소리로 호연기가 말했다.
“아무래도 내가 오늘 하 매에게 단단히 반한 것 같아.”
하지만 호연기의 수작은 하영령에겐 통하지 않았다.
하영령은 술잔을 들어 올리며 짐짓 나른한 어조로 물었다.
“호 오라버니는 그 유명한 호가장의 자제지요?”
호연기는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웃었다.
“뭐, 호가장이 좀 유명하기는 하지.”
‘재수없어.’
잘난 척하는 호연기의 얼굴에 술이라도 확 붓고 싶었지만 하영령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에게서 얻어내야 할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남자들 사이에선 모든 게 힘으로 결정된다는데……. 그럼 호 오라버니가 무조건 최고겠네요?”
은근한 웃음을 지으며 호연기가 물었다.
“왜? 누구 귀찮은 사람이라도 있어?”
그녀가 이런 말을 꺼내는 이유를 호연기는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평소 그녀를 귀찮게하는 남자의 처리라도 부탁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아니, 뭐 그런 건 아니고…….”
하영령은 술잔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며 말을 돌렸다.
“그냥 생각이 나서요. 예를 들어…….”
사락.
하영령은 자신의 옆에 드리워진 휘장을 살짝 걷었다.
휘장 너머로 아래층의 모습이 내려다보이고, 그곳에 앉아 있는 운현의 모습이 드러났다.
하영령은 짐짓 모르는 척 시선을 움직이다가 운현에게서 멈췄다.
“예를 들어 저 남자.”
그녀의 하얀 손가락이 운현을 정확히 가리켰다.
“아주 똑똑해 보이지 않아요? 내가 공부를 잘 못해서 그런지 몰라도, 저런 사람을 보면 정말 대단한 것 같거든요. 뭔가 어려운 말도 술술 잘할 것 같고요.”
정말 운현에게 푹 빠진 사람처럼, 하영령은 은근한 시선으로 운현을 쳐다보았다.
“하아, 진짜 멋있는 것 같아…….”
달착지근한 감탄까지 내뱉으며 하영령이 말했다.
하지만 호연기의 눈빛이 질투로 일그러지고 있다는 것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다.
“흥!”
호연기는 코웃음을 쳤다.
하영령이 다른 남자에게 선망의 눈길을 보내는 것을 본 호연기는 크게 기분이 상했다.
한껏 달아 있던 은밀한 욕망만큼, 그의 분노와 질투는 크고도 강렬했다.
“하 매가 뭘 모르는군. 똑똑한 체하는 놈일수록 사실은 더 비굴한 법이지!”
혈기와 질투심으로 가득한 호연기가 강하게 말했다.
“기다려. 내 저놈의 실상을 하 매에게 똑똑히 보여 줄 테니까.”
말뿐이 아니라는 듯, 호연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하영령이 놀란 얼굴로 급히 손을 뻗었다.
“호 오라버니! 그러지…….”
펄럭.
그러나 이미 호연기는 휘장을 거칠게 걷고 나선 뒤다.
멀어지는 호연기의 걸음소리를 들으며 하영령은 손을 거두었다.
“……마시지 말고 화끈하게 잘 좀 해 보세요.”
사락.
빙긋 웃으며 하영령은 푹신한 의자 몸을 기댔다.
“너무 쉽잖아? 무가(武家)의 자제라 단순해서 그런가?”
하영령은 고개를 돌려 휘장을 슬쩍 젖혔다.
휘장 너머로 운현과 강 총관의 모습이 보였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운현의 모습에 하영령은 웃음을 흘렸다.
“후후.”
하영령은 술잔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운현을 바라보며 감미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대의 불운에, 건배.”
찰랑.
운현을 향해 잔을 들어 보인 그녀는 입술로 잔을 가져갔다.
호박색 명주가 불빛 아래 반짝이며 그녀의 매혹적인 입술을 적셨다.
오늘따라 술이 유난히 부드러웠다.
***
운현은 고개를 들었다.
강 총관이 호 도련님이라 부른 청년, 호연기는 노골적인 적의를 품고 운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난생처음 보는 그가 대체 왜 운현에게 적대감을 표시한단 말인가?
하지만 운현은 상관하고 싶지 않았다.
호연기야 어찌 되든 관심없는 일인 데다가, 그 탓에 끊어진 강 총관과의 대화가 운현에겐 더욱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황은 운현의 바람대로 굴러가지 않았다.
“이자는 누군가? 강 총관.”
호연기가 운현을 노려보며 말했다.
강 총관은 정중하게 운현을 소개했다.
“이분은 저희 운가상단의…….”
“그래? 헌데 아주 무례한 자로군.”
호연기는 대뜸 강 총관의 말을 끊었다.
“날 보면서도 인사조차 하지 않다니 말이야.”
강 총관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건 작정하고 시비를 걸겠다는 것 아닌가?
무언가 일이 단단히 잘못되어 가고 있었다.
“호연기 도련님,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턱.
“무슨 일인지 모르겠으면.”
호연기는 강 총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잠자코 있게.”
호연기가 내력을 일으키며 힘을 주자, 강 총관이 얼굴을 찌푸리며 무너지듯 자리에 주저앉았다.
“큭.”
그 모습에 운현의 표정이 굳었다.
“아무 말도 못 하는 건.”
운현을 쳐다보며 호연기가 말했다.
“겁을 먹어서인가? 아니면 내가 우습게 보여서일까?”
호연기는 비릿하게 웃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강 총관의 어깨를 누르고 있었고, 강 총관은 고통스러운 듯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저는.”
운현이 조용히 말했다.
“당신과 초면인 것 같습니다만.”
“그래. 나도 초면이지.”
호연기의 대답에 운현이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런데 왜 이러는 거지?”
운현의 말투가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