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4화. 하늘이 바라는 것
그날 저녁, 운가상단으로 들어오던 운현을 무심히 맞이하던 강 총관은 깜짝 놀랐다.
운현의 표정에 어두운 그늘이 짙게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도련님!”
강 총관의 말에 운현이 고개를 들었다.
그 눈빛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웠다.
총관은 거두절미하고 말했다.
“……오늘 저하고 술 한잔하시지요.”
운현은 어리둥절했다.
“갑자기 술은 왜…….”
그러나 강 총관은 운현의 말은 듣지도 않고 그의 팔을 잡아끌어 난화주루로 향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운현이 밤 사이에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정말로 심각하게 들었기 때문이었다.
***
따랑.
옥과 금으로 장식한 패찰들이 서로 부딪히며 소리를 냈다.
동창 병필태감 박 공공은 특유의 빠른 걸음으로 대전으로 들어갔다.
좌우편의 금의위들은 석상이라도 된 양, 미동도 없이 박 공공의 좌우를 지켰다.
사락.
박 공공은 다소곳한 자세로 대전 전면에 있는 긴 의자에 앉았다.
사뭇 여자 같은 태도였지만 감히 그의 행동을 흉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도찰원에서 보고가 있었나요?”
자리에 앉은 박 공공이 물었다.
“네, 공공.”
옆에 선 다른 태감이 깊이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그는 두루마리 하나를 공손히 서탁에 올렸다.
하지만 박 공공은 두루마리를 펴지 않았다.
“도찰원의 좌우도어사(左右都御史)는요?”
좌도어사(左都御史)와 우도어사(右都御史)는 도찰원을 책임지는 도찰원의 수장이다.
“오지 않았습니다.”
태감의 답변에 박 공공은 미소를 지었다.
“가서 이렇게 전하세요.”
박 공공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일 아침에 형틀을 쓰고 뇌옥에 앉아 있고 싶지 않다면, 지금 당장 달려오는 게 좋을 거라고요.”
황상의 조칙에 따라, 비록 일시적인 것이라 해도 동창 병필태감 박 공공은 도찰원의 전권을 쥐게 되었다.
게다가 사실상 내일의 하늘을 등에 업은 박 공공이다.
정이품의 도찰원 좌우도어사라도 마음만 먹으면 투옥할 수 있다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네! 공공.”
태감은 즉시 바깥으로 달려 나갔다. 그제야 박 공공은 서탁에 있는 두루마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펄럭.
두루마리를 펼치고 잠시 읽어 내려가던 박 공공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그는 예기치 못한 것을 발견한 듯 놀란 표정을 짓더니 갑자기 환한 미소를 머금었다.
“후후훗.”
박 공공은 두루마리에서 눈을 들었다.
그의 얼굴에는 아직도 미소가 가시지 않고 있었다.
“누가 이 보고서를 가져왔죠?”
잔뜩 긴장한 관리 한 사람이 앞으로 나섰다.
“제, 제가 가져왔습니다. 공공.”
그는 도찰원의 수장 도어사의 업무를 돕는 첨도어사였다.
일종의 보좌관 같은, 실무로 따지자면 가장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조금 전 좌우도어사를 투옥하겠다는 말을 들었던 터라, 그는 보기에도 안쓰러운 정도로 긴장하고 있었다.
사락.
“여기 이 문구…….”
박 공공은 두루마리의 한 부분을 손으로 짚어가며 읽었다.
“장강 유역에 파다한 소문 중의 하나는 이것이다. 영웅맹과 맞설 자는…….”
그의 얼굴에 다시금 미소가 걸렸다.
“창룡검주뿐이다.”
박 공공은 고개를 들었다.
“무슨 뜻이죠?”
정말 말뜻을 몰라 묻는 질문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그 말 그대로라고 대답할 수도 없는 일.
첨도어사는 급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항주 혈사에서 영웅맹과 맞선, 창룡검주라는 기인에 관한 소문입니다.”
“항주 혈사라…….”
박 공공이 중얼거렸다.
모를 리가 없었다.
바로 그 사건 덕분에 가장 위험한 숙적을 제거하고 그 일당을 황실에서 몰아낼 수 있지 않았던가?
첨도어사는 말을 이었다.
“영웅맹은 항주에 있던 무림맹을 패퇴시키며 그 이름을 알렸습니다. 그때, 비록 무림맹 소속은 아니나 창룡검주라 하는 기인이 무림맹과 함께 있었다고 합니다.”
박 공공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그 기인이…….”
잠시 말을 멈추고 미소를 머금은 박 공공은 사뭇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왜 영웅맹과 맞설 유일한 사람이라는 것이지요?”
첨도어사는 잠시 주저했지만 곧 입을 열었다.
“보고서에는 적혀 있지 않지만 그것에는 뒷 얘기가 아주 많습니다.”
각지에서 올라온 소식을 종합하고 정리해서 보고서로 만들어 낸 사람이 바로 첨도어사 자신이었다.
때문에 그는 이 보고서에 적히지 못한 많은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호오, 어떤 이야기지요?”
“예를 들면 창룡검주가 철혈사왕이라는 별호를 가진 자와 싸워 여러 무림 가주들의 목숨을 구했다는 것입니다.”
“호오.”
박 공공이 관심을 보이자 첨도어사는 흥이 나기 시작했다.
오금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던 긴장도 어느새 사라져 버렸다.
“창룡검주에게 목숨을 구한 자들 중에는 모용세가, 단목세가, 혁련세가 그리고 남해검문의 문주도 포함되어 있다고 합니다.”
모용세가라는 이름은 박 공공의 기억에도 있는 이름이었다.
박 공공은 다시 물었다.
“그 철혈사왕이라는 자가, 강한가요?”
“무림인들의 말에는 워낙 과장이 많아 진실을 판별하기 어렵습니다. 허나 철혈사왕은 천하에서 가장 강한 다섯 명 중의 한 명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천하에서 가장 강한…….”
철혈사왕과 싸워 사람들을 구해 냈다면 창룡검주 또한 천하에서 가장 강한 다섯 사람과 동등하다는 뜻이다.
박 공공의 얼굴에 미소가 짙어졌다.
첨도어사는 박 공공의 미소가 무슨 의미인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철혈사왕이 강하다는 것과 박 공공의 미소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하지만 박 공공이 자신의 이야기에 좋은 반응을 보이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또한 창룡검주의 제자는 항주 인근 무관과 문파의 제자들을 숱하게 구해 내었다고 합니다. 영웅맹의 위세 탓에 쉬쉬하고는 있으나, 항주에서 창룡검주의 제자는 전설적인 영웅으로 존경받고 있다 합니다.”
“그렇군요, 그렇군요.”
박 공공은 눈을 빛내며 귀를 기울였다.
첨도어사는 계속 말을 이었다.
“항주 혈사 이후 창룡검주는 종적을 감추었습니다. 그리고 영웅맹에 반기를 든 일단의 무리들이 나타나, 창룡의 뜻을 따르는 자들이라 주장하며 스스로 창룡지회(蒼龍志會)라 하였습니다.”
“창룡지회라……. 아, 여기 있군요.”
보고서의 한 부분을 내려다보며 박 공공이 말했다.
“하지만 그들의 세는 미약합니다. 어쩌면 그저 창룡검주의 명호를 이용하는 것뿐일지도 모르고, 정말 창룡지회라는 단체가 조직적으로 구성되어 존재하는지도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박 공공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래서, 지금 창룡검주는 어디에 있다고 하던가요?”
“그것이…….”
첨도어사가 대답할 수 없는 부분이 나왔다.
그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무도 그의 행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특히 태평맹은 창룡지회에 아주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는데, 그들 역시 창룡검주의 행방을 알지 못하는 듯합니다.”
“아무도 모른다…….”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박 공공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옛 이름은 그리운 이의 얼굴을 떠오르게 했다.
자신이 대신 전해 주었던 서찰들, 문연각에서 함께 나누던 쓸데없는 이야기들, 그리고 그를 떠나보내던 그날의 결심까지.
“공공?”
첨도어사의 목소리에 박 공공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박 공공의 눈치를 살피며 첨도어사가 말했다.
“창룡검주의 행방에 대해 조사를 명할까요?”
“아니, 아직은 필요 없어요.”
예상과 달리 박 공공은 대답은 단호했다.
“즉시 광동성 광주에 사람을 보내세요. 그리고 운현이라는 사람이 있는지 철저하게 조사하도록 하세요. 조사 결과는…….”
운현의 고향 정도는 이미 옛적부터 알고 있었다.
잠시 말을 끊고 박 공공은 미소를 지었다.
팔락.
박 공공은 작은 부채를 들어 눈 아래를 가렸다.
“최우선 사항으로 내게 보고하세요.”
첨도어사는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그가 대답하는 것과 동시에 태감의 목소리가 들렸다.
“도찰원의 좌우도어사가 도착했습니다.”
그 말에 첨도어사는 내심 놀랐다.
엉덩이가 무거운 대관들이 이토록 신속하게 행동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한 까닭이다.
그러나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내일 아침에 형틀을 쓰고 뇌옥에 앉아 있게 된다면 누구라도 서두르지 않으랴?
“들라 이르세요.”
얼굴을 가린 박 공공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들은 운이 좋아요.”
헐레벌떡 들어오는 도찰원 좌우도어사를 응시하며 박 공공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오늘은 아주 기쁜 날이니까요.”
그 말을 들은 사람은 가장 가까이 있던 첨도어사뿐이었다.
그는 왜 오늘이 박 공공에게 기쁜 날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의 상관들이 내일 아침 형틀을 쓰고 뇌옥에 앉아 있게 될 운명은 피했다는 사실뿐이었다.
***
난화주루는 화려한 광주에서도 손꼽히는 주루였다.
퇴폐적인 것들 대신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추구하는 난화주루는, 늘 새로운 것을 찾는 부유한 젊은이들에게 인기 높은 명소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운현에게는 그런 난화주루의 화려함도, 창밖으로 보이는 주강의 밤 풍광도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하고 있었다.
앞에 놓인 술잔에는 호박색의 명주가 찰랑이고 있었지만, 그 향기 역시 운현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도련님.”
강 총관이 운현을 불렀다.
운현은 나지막이 답했다.
“……네.”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운현에게 고민이 많을 것은 강 총관도 안다.
인생의 중대사인 혼인과 현실이 얽혀 버렸으니 그 고민이 얼마나 크랴?
그러나 그렇다고 이렇게 갑자기 운현의 표정이 어두워질 이유는 없다.
어제만 해도 잘 헤쳐 나갈 것처럼 보이던 운현이, 하루 만에 예전보다 더 어두워지지 않았는가?
운현은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손에 쥔 술잔과 눈싸움을 하던 운현은, 한참 만에야 어렵게 입을 열었다.
“강 총관.”
“네. 도련님.”
“그때, 강 총관께서 말씀하신 것이 있지요?”
운현은 술잔을 찰랑이며 조용하게 말했다.
“때로는 눈앞의 이익보다 더 중요한 것을 지켜야 할 때가 있고, 설령 손해를 보더라도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것이 있다고 말입니다.”
“네. 그렇습니다.”
“그러면…….”
운현은 조용히 말했다.
“그 중요한 것을 잃은 사람은,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을 지키지 못한 사람은…….”
말하는 운현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달그락.
강 총관의 손안에서 술잔이 소리를 냈다.
운현도 강 총관도 아무 말이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침묵이 흘렀을까?
강 총관은 천천히 잔을 들었다.
그리고 끝까지 다 마셨다.
탁.
술잔을 내려놓은 강 총관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시간이란 흐르는 물과 같아서, 지나간 과거는 돌이킬 수도 없고 되돌아오지도 않는다고 하지요.”
씁쓸한 미소를 머금으며 강 총관은 말했다.
“하지만 자신이 저지른 일은 결코 흘러가지도 않고 잊히지도 않습니다. 가끔은 시간에 묻혀 무디어졌나 싶지만, 그때마다 다시 깨닫게 되는 것은 자신이 그 순간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뿐이지요. 그토록 발버둥 치고 벗어나려 해도 말입니다.”
어쩌면 그건 자기 스스로에게 말하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강 총관은 술병을 들어 앞에 놓인 잔을 채웠다.
또르륵.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자신이 저지른 잘못의 결과를 자신이 감당해야 한다는 것은, 업보나 죄를 논하기 이전에 너무나 당연한 것이지요. 제 앞에 놓인 이 술잔처럼 말입니다.”
술잔을 들어 올린 강 총관은 다시 잔을 전부 비웠다.
탁.
“하지만 세상이 결코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술잔을 내려놓은 강 총관은 운현을 보며 말했다.
“세상에는 화해와 용서라는 것도 있습니다. 세상에는, 회복이라는 것도 있지요.”
운현은 고개를 들어 강 총관을 쳐다보았다.
강 총관은 운현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아무리 척박한 땅이라도 봄이 되면 다시 생명은 자라납니다. 아무리 깊은 상처라도, 살아만 있다면 반드시 아물게 됩니다. 그런 것을 보면 하늘이 바라는 것은 형벌이 아니라 오히려 용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