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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273화 (273/530)

273화. 잔인한 오후

“어이, 형씨.”

쭉 째진 눈을 가진 사내가 운현을 불렀다.

“잠깐 이리 와 보슈.”

느긋하게 월수산을 거닐던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미안하지만.”

운현은 가볍게 손을 벌려 보였다.

“나는 가진 게 없소이다.”

애초에 마음이 어지러워 충동적으로 나온 길이다.

본래 돈이 있었던 것도 아닌지라 현재 운현은 완전 빈털터리였다.

“아이 씨, 그놈 말 많네. 오라면 오는 거지 무슨 잔소리야?”

“쓰파. 배웠다 이거야? 지금 우리 무시하는 거지? 응?”

“퉤, 낯짝부터가 재수 없는 놈일세.”

서 있던 사내들이 각기 한마디씩 내뱉으며 다가왔다.

그저 푼돈이나 뺏으려는 자들로 알았던 운현은 긴장했다.

저들이 하나씩 들고 있는 얄팍한 몽둥이는 그저 위협용이 아니었나 보다.

어느새 불량배들은 운현을 반쯤 둘러싸고 있었다.

“원래 뒤져서 나오면 한 푼에 한 대지만.”

눈이 쭉 찢어진 사내가 비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오늘은 생략이다.”

그의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그가 들고 있던 몽둥이가 바람 소리를 내며 휘둘러졌다.

부웅.

몽둥이는 정확히 운현의 옆구리를 노리고 들어오고 있었다.

그 한 방으로 운현이 옆구리를 움켜쥐고 주저앉을 것을, 사내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휙.

‘어라?’

그의 예상이 빗나간 것은 자신의 몽둥이가 허공만 갈랐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다.

그는 헛손질을 하고 휘청거리는 꼴불견을 연출해야만 했다.

“얼씨구? 뭐해?”

“장난하냐?”

옆에 있던 불량배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정확한 원인을 알고 있던 자도 있었다.

“아니야. 지금 저놈이……, 피했다고!”

그의 한마디에 불량배들의 인상이 더욱 구겨졌다.

헛손질한 사내의 얼굴은 특히 일그러지고 있었지만, 놀라움은 운현 자신이 더했다.

‘어?’

운현은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방금…….’

자신의 허리를 노리는 몽둥이의 궤적이 선명하게 보였다.

게다가 너무나 느렸다.

그 순간 몸이 자신도 모르게 슬쩍 뒤로 물러났다.

딱 몽둥이를 피할 만큼만.

시비를 거는 불량배들의 인상은 험악했지만 그리 무섭지도 않았다.

그보다 더 공포스러운 자들을 운현은 숱하게 보았기 때문이다.

‘내가 피했다고?’

그러나 조금 전 자신의 반응은 정말로 의외였다.

자기 몸이 얼마나 약해져 있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자식이……! 야! 한꺼번에 쳐!”

창피함으로 붉게 달아오른 사내가 외쳤다.

파악.

그가 작정하고 몽둥이를 내려치고, 또 다른 세 개의 몽둥이가 운현을 향해 짓쳐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운현의 눈앞에는 그 공격들을 단번에 무력화시킬 하나의 검로가 뚜렷이 나타나고 있었다.

‘아.’

문득 아침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것은 목검이었을까? 아니었을까?

그때 그것을 집어 들었다면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짓쳐 드는 몽둥이들을 보며 운현은 난데없이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지금 운현의 손에는 아무것도 없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훙.

운현의 마음속에 한 자루의 검이 그 모습을 나타냈다.

아무것도 자르지 못하지만 천하에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는 검.

그것은 꿈속에서 운현이 들고 있던, 한 자루 거친 목검의 심상이었다.

‘큭.’

그러나 운현은 발작적으로 그 검을 거부했다.

마음의 검이 순간 희미해지고, 운현의 어깨와 등으로 불량배들의 몽둥이가 떨어져 내렸다.

파악, 따악, 퍽.

“윽!”

“계속 쳐!”

몽둥이질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흥분한 불량배들은 다시 몽둥이를 들어 올렸다.

“뭐하는 짓이야!”

날카로운 여인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불량배들이 고개를 돌리자 두 명의 사내와 한 여인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이것들이 감히 내 앞에서 선량한 양민을 구타해?”

앙칼진 그녀의 말에 불량배들은 일이 틀어졌음을 깨달았다.

여인은 모르겠지만 뒤에 있는 덩치 큰 사내가 보통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게다가 그는 검을 차고 있지 않은가?

“쯧, 가자!”

판단은 빠르고 결정은 신속했다.

불량배들은 운현을 버려 두고 재빨리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눈이 찢어진 사내는 웅크린 운현에게 한 번 더 발길질을 했다.

팍!

“운 좋은 줄 알아라!”

사내는 바닥에 침을 퉤 뱉고는 뛰어갔다.

물론 훼방꾼들을 한 번 째려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진짜 가지가지 하네.”

진예림은 기분 나쁜 표정을 숨기지 않으며 말했다.

사내들은 그야말로 뒷골목 불량배들의 전형이었다.

그녀는 주저앉아 있는 운현을 향해 걸어갔다.

“이봐요. 괜찮아요?”

다행히 그리 크게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옷에 흙은 좀 묻었지만 피가 나는 곳도 없었다.

아마도 멍은 좀 들었겠지만.

“괜찮습니다.”

고개 숙인 운현의 목소리에는 그다지 진심이 들어 있지 않았다.

진예림은 조금 기분이 나빠졌지만, 딱히 인사를 바라고 한 일도 아니었기에 신경 쓰지 않았다.

슥.

운현은 일어나서 옷에 묻은 흙을 털어 냈다.

어깨와 등이 쑤셔 왔지만 크게 다친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방금 전 있었던 일이 운현의 마음을 더 무겁게 하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마음속에 떠오른 그의 검.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운현은 말했다.

그런데 여인의 얼굴이 어쩐지 눈에 익다.

‘아, 그때…….’

운현은 그녀의 모습을 기억해 냈다.

광주로 오는 마차에 타고 있었던, 그 긴 여행 내내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았던 여인이었다.

하지만 운현은 내색하지 않았다.

“그럼 저는 이만…….”

인사를 한 운현은 조용히 그곳을 떠났다.

“뭐야?”

담소하가 운현의 뒷모습을 보며 말했다.

“도움을 받은 주제에 너무 뻣뻣한데요?”

“그러지 마. 크게 도와준 것도 아닌데.”

진예림이 말했다.

사실 큰 호의를 가지고 도와준 것은 아니었다.

그저 나라의 녹을 먹는 사람으로서 백성의 평안을 위한다고 해 놓고, 불량배에게 구타당하는 사람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을 뿐이다.

물론 얼굴을 아는 사람이었기에 결정이 쉬운 것도 사실이었지만, 같은 마차를 탄 정도로 관계가 있다고 하긴 그렇지 않은가?

“저자는 누구지?”

“왜요? 항 오라버니.”

“진 매가 아는 사람인가?”

묻는 항장익의 표정은 사뭇 심각했다.

“광주에 올 때 같은 마차를 탔던 사람이에요. 아마 그는 기억하지 못하는 듯하지만……. 왜요?”

“혹시…….”

이미 운현의 모습은 사라졌지만 항장익은 운현이 사라진 곳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한순간 스쳐 지나간 오싹한 느낌.

그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아니, 아니다.”

항장익은 생각을 접었다.

불량배들에게 맞고 다니는 사람에게서 그런 기세를 느꼈다는 것이 스스로 생각해도 말이 되지 않았다.

“자, 밥이나 먹으러 가지.”

“네!”

담소하가 기쁜 듯 말했다.

세 사람은 항주 시내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

저녁 어스름이 내려앉을 무렵, 하청상단의 하녀가 헐레벌떡 하영령에게 달려왔다.

세련되게 치장한 하영령은 이제 막 저택을 나가려던 참이었다.

거리에 아름다운 등불이 하나 둘 켜지기 시작할 때 광주는 가장 아름다운 법이니까.

그러나 즐거운 외출을 준비하던 하영령의 기분은 하녀의 말에 구겨져 버리고 말았다.

“뭐? 실패했다고?”

“아니, 그게 갑자기 누가 방해를 하는 바람에요…….”

하녀는 애써 하영령의 기분을 맞추려 노력하며 말했다.

“그래도 몽둥이로 아주 세게 맞았대요. 등이랑, 어깨랑, 옆구리랑……. 아, 옆구리는 피했다고 그랬나?”

“피하다니?”

하영령의 눈살이 찌푸려진다.

“아니, 그게 아니고……. 아무튼 혼쭐이 났대요. 대낮에 몽둥이 찜질을 당했으니 크게 혼쭐난 것 아니겠어요?”

하녀의 말에도 불구하고 하영령은 탐탁지 않은 표정이었다.

일을 시작했는데 끝을 못 본 것 같은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사뭇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하영령이 물었다.

“혹시, 많이 다쳤어?”

하녀는 무엇을 착각했는지 싱긋 웃었다.

“에이, 아가씨도 괜히…….”

얼굴까지 붉히면서 하녀는 말했다.

“아이구, 괜찮대요. 아가씨 낭군님은 아주 멀쩡하시다니까 걱정……. 큽.”

자신을 노려보는 하영령의 눈초리에 하녀는 급히 입을 막았다.

“누가 낭군이얏!”

하영령은 표독스러운 목소리로 외쳤다.

그러나 곧 애써 화를 가라앉히며 손등으로 이마 주위를 톡톡 눌렀다.

“아이 씨, 화장한 거에 주름지면 안 되는데…….”

하녀는 하영령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그럼 다시 손봐 주라고 할까요? 이번에는 좀 센 걸루다가?”

“됐어!”

하영령은 단호하게 말했다.

“질질 끄는 거 싫어. 걔네들한테는 신경 끄라고 하고, 앞으로는 너도 그런 애들하고 만나지 마. 괜히 나쁜 물드니까.”

‘칫. 일을 시킨 게 누군데…….’

하녀는 속으로 구시렁댔지만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괜히 하영령의 분노를 자초할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

“따로 기회는 많을 거야. 흥! 두고 보라지.”

이 혼사 이야기가 계속되는 한 기회는 많았다.

여러 사람 앞에서 톡톡히 망신을 주고 확 떼어내 버릴 그런 기회가 꼭 올 것이다.

하영령은 그렇게 확신했다.

그녀는 문득 자신의 당혜(唐鞋)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신발 문양이 옷이랑 안 어울리잖아! 딴 거 가져와. 너도 옷 좀 더 예쁜 걸로 입고!”

“네, 네. 아가씨.”

신경질적인 하영령의 말에 하녀는 종종걸음으로 뛰어갔다.

‘지금 신고 있는 당혜는 아까 직접 고르신 거잖아요’라는 말이 목까지 올라왔지만 꾹 삼켜야 했다.

오늘 하영령과 함께 화려한 밤나들이를 가려면 그녀의 기분을 절대 거슬러선 안 되기 때문이었다.

***

운현은 허둥지둥 월수산을 내려왔다.

마음이 어지러워 제대로 운가상단으로 가고 있는지도 잘 모를 정도였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탁, 탁, 탁.

걸음을 옮기며 운현은 고개를 강하게 내저었다.

그러나 운현도 이미 알고 있었다.

월수산의 일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했다.

자신에게 쏟아져 내리는 몽둥이를 막을 검로가 떠오르는 순간, 그에 호응하듯 마음속에 검 한 자루의 모습이 나타났다.

자금성에서도, 무림맹에서도, 그리고 와불선사의 초막 앞에서도 그랬다.

검을 수련할 때면 어김없이 마음 속에 떠올랐던 자신의 검.

그것이 다시 나타난 것이다.

만약 그때 목검 한 자루라도 손에 쥐어져 있었다면 어땠을까?

자신은 그 검로대로 검을 펼쳐 낼 수 있었을까?

흐르는 물처럼 자연스러운 그 검로가, 언제나처럼 모습을 드러냈을까?

‘……이제 와서.’

운현은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깨물었다.

정작 필요할 때는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었는데, 모든 것을 포기한 이제 와서라니.

‘아니, 그럴 리가 없어.’

탁, 탁, 탁.

쫓기듯 걸음을 옮기며 운현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럴 리가 없었다.

무공이니 내공이니 하는 것들과는 완전히 인연이 끊어졌다.

자신의 몸이 얼마나 망가졌는지는 운현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운현은 배신감과 혼란으로 도무지 마음을 가눌 수가 없었다.

바로 그때였다.

탁.

문득 운현의 발걸음이 멈췄다.

‘나는…….’

갑자기 머리가 차갑게 식어 버렸다.

혼란스럽던 마음도 거짓말처럼 가라앉았다.

그리고 쓰디쓴 후회가 밀물처럼 몰려왔다.

멍하니 멈춰 선 운현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희미하게 중얼거렸다.

“……자격이 없어.”

텅 비어 버린 마음에 바람이 스쳐 지났다.

자신은 검을 쥘 자격이 없다.

그것은 내력이 돌아오고 돌아오지 않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반드시 지켜야만 했던 것을 지키지 못한, 바로 자기 자신의 문제였다.

또륵.

눈물이 눈에서 흘러내렸다.

그러나 운현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듯 그대로 서 있었다.

오가는 사람들의 시선도, 분주한 거리의 소음도 들리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광주의 대로에서, 운현은 홀로 갈 길을 잃은 사람처럼 그렇게 하염없이 서 있었다.

오후의 햇살이 부드럽게 내리쬐던 그날은, 운현에게 참으로 잔인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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