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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271화 (271/530)
  • 271화. 자격 없는 자

    당설련은 눈살을 찌푸리며 중년 무인에게 물었다.

    “맹 내 다른 세가들의 반응은 어떻죠?”

    “세가들은 자파의 젊은 제자들에게 미칠 영향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창룡검주가 철혈사왕을 저지하고 여러 문파를 구했다는 소문이 파다한 데다, 맹의 대외 정책에 불만을 품은 자들도 적지 않아서…….”

    태평맹의 대외 정책은 영웅맹과 불필요한 마찰을 피하는 것이다.

    그 정책은 태평맹의 안정에는 큰 도움을 주었지만, 항주 혈사 당시 피해를 입은 문파들의 원한까지 달래 주지는 못했다.

    일부 젊은 제자들 중에는 공공연히 영웅맹과 일전을 주장하는 자들도 있었다.

    “하, 감히…….”

    당설련이 헛웃음을 흘렸다.

    “누구 덕에 문파를 보전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주제에.”

    항주 무림맹을 탈출한 문파들은 현재 극심한 내홍에 시달리고 있었다.

    중상을 입은 가주 대행의 선출부터 책임 소재에 이르기까지, 문파들은 이해 관계와 계파를 따라 분열되고 갈라졌다.

    핵심 전력과 중요 인물들이 죽거나 다친 여파 또한 무시할 수 없었다.

    상황이 그러니 문파의 외부 활동이나 영향력 또한 극도로 위축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태평맹 칠대세가의 상황은 조금 달랐다.

    비슷한 피해를 입은 네 세가들 역시 내부 분열을 겪었지만 그 정도는 확연히 미미했다.

    태평맹의 이름이 방패가 되어 최소한 현상 유지가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니 태평맹 덕에 문파를 보전하고 있다는 당설련의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각 세가에 맹의 이름으로 서첩을 보내세요.”

    싸늘한 목소리로 당설련은 말했다.

    “맹의 정책에 반하는 모든 행동은 그 경중에 상관없이 철저히 문책할 것이며, 불온 세력에 제자들이 가담하거나 그들을 비호하는 것이 발견되면 해당 문파에 반드시 그 책임을 묻겠다고요.”

    창룡지회가 누구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당설련은 확신하고 있었다. 그들은 태평맹 안에 있다.

    ‘……이 상황에서 검기 발현의 고수들이라면, 생각할 것도 없지.’

    내홍을 겪는 문파들이 창룡지회 따위를 만들 여유가 있을까?

    소림이나 화산, 아미, 무당이 복면을 쓰고 영웅맹 무사들을 죽일까?

    결코 아니다.

    그러므로 창룡지회라 자칭하는 자들이 원하는 것은 결국 태평맹을 내부에서 흔들어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하는 것이다.

    현재 태평맹의 두 축을 이루는 당문과 제갈세가 대신에 말이다.

    “네. 알겠습니다.”

    중년 무인은 절도있게 예를 표하고 밖으로 나갔다.

    달칵.

    집무실의 문이 닫히고, 혼자 남은 총괄 군사 당설련은 조소를 머금었다.

    ‘흥, 너희들이 뭘 하건, 태평맹은 당문의 것이야.’

    공식적으로 태평맹은 칠대세가의 연합체다.

    그러나 맹의 핵심 요직은 당문과 제갈세가가 장악하고 있었다.

    기존 거대 문파들의 영향력이 줄어든 공백 지역을 빠르게 삼켜 가고 있는 것도 당문과 제갈세가였다.

    특히 당문은 태평맹의 시작이자 중심이다.

    그것은 제갈세가조차 부인하지 못하는 사실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문득 당설련은 깨달았다.

    닳고 닳은 철혈사왕 염중부가 왜 창룡지회에 미적지근하게 대응하는지 말이다.

    ‘이 약아빠진 노괴 같으니.’

    창룡지회가 진짜로 노리는 대상은 영웅맹이 아니라 바로 태평맹이다.

    그 사실을 철혈사왕 염중부도 알아차린 것이다.

    “하아.”

    문득 당설련은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지 너는.”

    온화하고 부드러운, 순박해 보이기까지 하는 한 문사의 모습을 떠올리며 당설련은 입술을 깨물었다.

    “……단전이 부서졌다더니, 사라지고 나서도 말썽이네.”

    운현이 조부 독선을 상대로 보여 주었던 그 검을, 그 전율스러운 광경을 당설련은 결코 잊을 수 없었다.

    그 한 사람 탓에 독선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고 있으며, 혈공자 문왕은 무림맹을 쓰러뜨리고도 상인에게 문책을 받아 전면에서 물러나야 했다.

    그러므로 창룡검주의 행방에 대해 가장 신경을 쓰는 사람은, 창룡지회 따위가 아니라 바로 당설련 자신이었다.

    삼태상에 의해 단전이 부숴졌다던 그가, 만의 하나라도 돌아올지 모른다는 불안 때문에 말이다.

    “아주 끝까지 말이야.”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당설련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매혹적인 붉은 입술이 무참히 일그러졌지만 당설련은 상관하지 않았다.

    ***

    장사에 위치한 호암상단의 본가.

    집무실에서 정기 보고를 살피던 이서연은 문득 한 장의 서류에서 손을 멈췄다.

    바스락.

    그것은 언뜻 별 가치가 없는 보고서처럼 보였다.

    귀주성은 호암상단의 주요 거래 지역도 아니었고, 준의는 더더욱 관심 밖의 도시였기 때문이다.

    영웅맹 중경 지부와 연관된 일이 아니었다면 이 보고서가 이서연에게 올라올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창룡지회…….”

    이서연은 길고 하얀 손가락으로 보고서를 들고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영웅맹과 맞설 자는 창룡검주뿐이다’라는 말은 이서연도 이미 알고 있었다.

    장강을 따라 교역하는 호암상단이 장강에 떠도는 소문을 듣지 못하랴.

    더구나 호암상단처럼 물밑으로 영웅맹과 은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상단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하지만 영웅맹이 특별히 움직인다는 이야기는 없었지?’

    영웅맹의 움직임은 호암상단이 아주 중요하게 여기는 내용이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놓치지 않았고, 전혀 의미가 없어 보이는 것도 무시하지 않았다.

    어쩌면 영웅맹보다 더 영웅맹에 대해서 잘 아는 곳이 바로 호암상단이었다.

    사락.

    잠시 생각하던 이서연은 보고서를 가만히 내려놓았다.

    ‘……아직 기다려야 되겠네. 가장 중요한 패가 행방을 알 수 없게 된 데다 단전까지 부서졌다니까.’

    그녀의 투자는 언뜻 실패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서연 자신이 그 결론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상 아무것도 확정된 것은 없다.

    비록 그 ‘패’가 단전이 부서지고 행방조차 묘연하게 되었다 해도 말이다.

    그러므로 지금은 오직 인내와 기다림만이 유일한 대책이었다.

    “후훗.”

    자신의 운명마저 바꿀 그 ‘패’를 떠올리며 이서연은 웃음을 지었다.

    “좋은 보고가 있는 모양이지요?”

    젊은 여인의 목소리에 이서연은 고개를 들었다.

    “응.”

    빙긋 웃으며 이서연은 말했다.

    “그보다 아영이는 어때? 혼약자와는 사이 좋아?”

    “……요즘은 그저 그래요. 어쩐지 만나도 예전 같지 않고. 아무래도 혼인을 미룬 것이 잘못이었을까요?”

    단정한 옷차림에 깨끗한 눈빛을 한 아가씨, 일아영이 말했다.

    “괜찮아.”

    이서연은 위로하듯 말했다.

    “혼인은 언제라도 할 수 있잖아. 사실 생각해 보면 혼인이 뭐 그리 중요한 일일까 싶기도 해.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한 노력은 바로 지금밖에는 못 하니까.”

    두 사람의 관계가 서먹서먹해지도록 지시한 사람이 이서연 자신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일아영이 무척 바쁘게 만들고, 혼약자에게 다른 여자들을 소개시켜 주도록 한 것뿐이니까.

    “아, 어머님께선 괜찮으셔?”

    “많이 나아지셨어요.”

    일아영은 애써 밝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고마워요. 여러 가지로 보살펴 주셔서…….”

    “고맙긴.”

    이서연은 빙긋 웃었다.

    “나야말로 고마워. 아영이마저 없었다면 일에 치여서 그만 확 늙어 버렸을지도 몰라.”

    이서연의 말은 어느 정도 진심이었다.

    죽은 금군교두 일충현의 하나뿐인 딸이자, 창룡검주 운현이 친 조카처럼 생각하는 일아영은 이서연의 투자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아주 소중한 패였으니까.

    일아영을 바라보며 이서연은 미소 지었다.

    그것은 더없이 환하고 아름다운 웃음이었다.

    ***

    “커억!”

    운현은 신음을 흘리며 벌떡 일어났다.

    땀에 흥건히 젖은 운현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자신이 또다시 악몽을 꾼 것을 알았다.

    “후우, 후우.”

    숨을 가다듬은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걸쳤다.

    그리고 더럽혀진 자신의 침상을 내려다보았다.

    ‘하녀가 또 투덜대겠군.’

    그래도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운현은 익숙한 솜씨로 더럽혀진 침구를 정리했다.

    그리고 탁자에 있는 물을 들이켰다.

    탁.

    물잔을 내려놓으며 운현은 생각했다.

    ‘……나를, 원망하고 있겠지.’

    악몽은 늘 똑같았다.

    황궁에서 검을 수련하던 그때로 시작해서 결국 피에 젖은 독고랑의 피눈물로 끝나는 꿈.

    아무리 피하려 해도 언제나 자신의 온몸을 뒤덮어 버리고 마는 끔찍한 피의 악몽.

    ‘독고랑…….’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조여 왔다.

    원망하고 있을 것이다.

    선혈이 낭자한 피 웅덩이 속에서, 오지 않는 운현을 기다리며 원망하고 있을 것이다.

    피눈물을 흘리면서.

    우웅.

    ‘윽.’

    귀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더니 갑자기 어지러워졌다.

    운현은 비틀거리며 탁자를 짚었다.

    이미 꿈에서 깨었는데도 온몸이 끝없는 무저갱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후우.”

    어지럼증이 진정되자 운현은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그리고 천천히 문을 열었다.

    달칵.

    어슴푸레한 새벽 공기가 그를 반겨 주었다.

    운현은 바깥으로 나섰다.

    저벅 저벅.

    새벽 바람을 맞으며 운현은 숙소 뒤로 돌아갔다.

    그곳은 잡다한 물건을 놓아두는 곳이었다.

    늘 하던 대로 빗자루에 손을 뻗던 운현은, 문득 눈에 띄는 무언가에 흠칫 놀라고 말았다.

    ‘저건……, 목검?’

    여러 가지 잡동사니 속에 언뜻 목검이 보였다.

    난데없이 목검이 이런 곳에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물건들 사이로 보이는 그것은 분명히 목검의 한 부분 같았다.

    운현은 잠시 주저했다.

    저것이 무엇인지 확인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이 있다.

    가리고 있는 물건들을 치우고 그것을 꺼내 보는 것이다.

    그러나 운현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단지 목검인지 아닌지 알아보는 것뿐인데도 말이다.

    ‘……목검.’

    목검은 자금성에서 운현이 처음으로 만져 본, 제대로 형태를 갖춘 검이었다.

    의형 일충현의 첫 번째 선물도, 힘든 창룡전 학사 생활을 버티게 해 준 것도 목검이었다.

    자신에게 새로운 세계를 보여 준 것도 목검이었고 항상 떠올리던 마음의 검 역시 목검의 형태였다.

    그러므로 목검은 운현에게 그 의미가 결코 작지 않았다.

    그래서였을까?

    운현은 쉽사리 손을 뻗을 수 없었다.

    ‘별것 아니야. 이건 그냥…….’

    궁금하니 그저 확인해 보는 것뿐이다.

    생소한 물건이 눈에 띈다면 당연히 살펴보지 않겠는가?

    운현은 애써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천천히 손을 들었다.

    가늘게 떨리는 운현의 손이 목검처럼 보이는 그 물건에 닿기 직전이었다.

    ‘아!’

    운현은 문득 손을 멈췄다.

    방금 깨어난 꿈에서도 운현은 목검을 들고 있었다.

    복잡한 세상도, 온갖 시름도 잊고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검무를 펼쳐 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 꿈은 변해 갔다.

    피로 물든 자신의 온몸과, 그리고 독고랑의 피눈물로.

    ‘독고랑…….’

    운현은 손을 쥐었다.

    그의 손에는 아무것도 쥐어져 있지 않았다.

    결국 운현은 손을 뻗지 못한 것이다.

    “나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운현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자격이 없어.”

    운현은 가만히 몸을 돌렸다.

    커다란 빗자루를 강하게 움켜쥐고서 운현은 마당으로 걸어나갔다.

    저벅, 저벅.

    걸어가는 운현의 어깨는 유난히 처져 있었고, 고개는 푹 숙여져 있었다.

    마치 죄지은 사람처럼.

    ***

    광주 월수산은 사람들로 늘 북적였다.

    광주팔경 중의 하나로 꼽히는 경치와 산 정상에 세워진 붉은빛의 장엄한 누각은 사람들의 감탄을 절로 자아냈다.

    광주 시내에서 가깝고 그리 높지 않다는 점 역시, 사람들이 모여드는 큰 이유 중 하나였다.

    “아름다운 곳이군.”

    월수산 아래 펼쳐진 광주의 풍경을 보며 청년, 조관이 말했다.

    부유한 가문의 풍류 공자인 듯 차려입었지만 사뭇 비범한 기세를 감추지는 못했다.

    잠시 광주를 바라보던 조관은 고개를 돌렸다.

    “다 모였으니 보고를 들어 볼까?”

    조관 앞에는 세 사람이 서 있었다.

    키 작은 담소하와 덩치 큰 항장익, 그리고 눈매가 살짝 날카로운 여인 진예림이었다.

    “진가상단에는 특별한 것이 없었습니다.”

    항장익이 사람 좋은 표정으로 먼저 입을 열었다.

    “관청과 친분 관계가 좀 있지만, 우려할 정도는 아니더군요.”

    “화남상단 역시 마찬가지예요.”

    키 작은 담소하가 말했다.

    “관할 지역 관청들과 오래전부터 교분을 쌓았어요. 뭐, 비리가 몇 건 있긴 한데 심각한 건 없었어요.”

    “호암상단은 수상해요.”

    진예림이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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