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0화. 한 방에 인생역전
“……혼담요?”
난데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무언가 짚이는 것이 있었다.
“하청상단의 단주가 자신의 딸을 너와 혼인시키고 싶어 한다는구나.”
문득 일전에 만난 하영령의 모습이 머리를 스쳤다.
그리고 왜 그녀가 그런 말을 했는지 그제야 이해했다.
‘허어.’
속으로 한숨을 쉬던 운현은, 문득 강 총관이 그녀를 알아본 것을 떠올렸다.
“하청상단은 큰 상단입니까?”
운일평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상대가 누구냐고 물어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다른 질문이 나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또한 중요한 일임에 틀림없었다.
“광주에서 하청상단을 무시할 수 있는 곳은 손에 꼽을 정도다.”
“이곳 운가상단에 대해서는 어떻습니까?”
“우리 상단에 대해서는 네가 신경 쓸 것이 없다.”
단호하게 답한 운일평은 정색을 하고 말했다.
“혼인은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다. 네 평생이 달린 일인데 어찌 다른 것을 돌아보려고 하느냐?”
그 말에 운현은 가슴이 따뜻해짐을 느꼈다.
운현은 다시 물었다.
“상대는 하영령이라는 아가씨입니까?”
운일평은 또 한 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알고 있었느냐?”
“이름만 아는 정도입니다.”
“그랬구나. 허나 소문은 신경 쓸 것 없다. 사람은 직접 만나 보지 않고선 모르는 법이니까.”
운일평은 말을 이었다.
“하청상단은 너를 전적으로 후원하겠다고 했다. 서원(書院)을 원한다면 번듯한 서원을 지어 줄 것이고, 상계에 입문하기를 원한다면 상단의 일을 맡기겠다고 하더구나.”
“하청상단이 그 정도로 재력이 있는 곳입니까?”
“그들이 원한다면 그렇게 할 거다.”
하청상단은 광주의 삼대상단에는 들지 못한다.
하지만 그 삼대상단조차 하청상단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럼 이 혼담을 거부한다면 여파가 작지 않겠군요.”
운현의 말에 운일평의 안색이 굳어졌다.
“그건…….”
그의 말대로였다.
하청상단은 자존심이 강하다.
이번 혼담을 거부했을 경우 그들이 어떻게 나올지는 뻔한 일이었다.
아마도 운가상단은 광주를 떠야 할지도 모른다.
운일평은 차마 대답을 하지 못했다.
“알겠습니다.”
운현은 조용히 말했다.
“제의를 받았으니 생각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숙부 운일평에게 예를 표하고 운현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방을 나가려던 그는 문득 숙부를 돌아보며 말했다.
“숙부님.”
운일평의 시선이 운현을 향했다.
운현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그것은 진심이었다.
숙부는 이 혼담이 너에게도 좋은 것이라며 운현을 설득하지 않았다.
운가상단에 돌아올 불이익을 말하며 부담을 주지도 않았다.
숙부는 하청상단의 제의를 그대로 전해 주었다. 다른 것을 돌아보지 말라고, 그렇게 말해 주었다.
숙부의 그런 마음씀이 운현은 참으로 고마웠다.
사실 숙부에 대해 운현이 가진 기억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서생 시절 재정 지원을 받긴 했지만 어쩐지 동정을 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사실 그건 운현의 자격지심일 뿐이었는지도 모른다.
운일평은 언제나 운현의 숙부였다.
달칵.
문을 닫고 운현은 방을 나갔다.
남은 운일평은 침통한 표정으로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하나뿐인 조카가 어려운 선택을 하는 것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는 자신이 참으로 원망스러웠다.
“허어.”
운일평의 입에서 긴 탄식이 흘러나왔다.
숙부의 방에서 나온 운현은 어둠이 깔린 마당에 서 있었다.
달빛 아래 고요한 상단 저택의 모습은 어쩐지 을씨년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아마도 기울어 가는 가세가 그런 느낌을 갖게 한 것이리라.
“도련님.”
조용히 부르는 소리에 운현은 고개를 돌렸다.
희미한 등불 아래 서 있는 사람은 바로 강 총관이었다.
“강 총관.”
부드러운 표정이었지만 운현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강 총관은 조용히 다가와 운현의 옆에 섰다.
그리고 말없이 상단 저택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그다지 나쁜 조건도 아닙니다.”
담담한 목소리로 강 총관이 말했다.
“도련님 나이도 있고, 가정을 꾸리면 마음을 잡는 데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운현은 의아한 표정으로 강 총관을 돌아보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강 총관이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할 줄은 생각도 못한 까닭이다.
강 총관은 조용히 운현을 돌아보았다.
“냉정한 마음으로 거래에 임하지 않으면, 항상 손해를 보게 되는 법이라고 말씀드렸죠?”
분명히 그렇게 이야기했다.
강 총관은 고개를 돌려 어둠 속에 잠긴 운가상단의 저택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생각해 보면 상단에서 바닥부터 시작하는 것보다 서원이 도련님께 훨씬 잘 어울리는 일입니다. 상대에게 흠이 있다고 하지만 도련님에게는 흠이 없습니까? 낙척 문사로 거지꼴이 되어 돌아온 사람입니다. 오히려 이런 제안을 받은 것에 자부심을 가지셔도 됩니다. 다른 곳도 아니고 하청상단에서 도련님을 인정한 것이니까요.”
강 총관의 말은 사실이었다.
운현도 그것을 알았다.
“……영령 아가씨의 행실이 좋지 못하다고 사람들이 수군대지만, 사실 아가씨는 아주 착한 사람입니다.”
먼 옛날의 일을 떠올리듯, 강 총관은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저는 영령 아가씨를 아주 어려서부터 보아 왔습니다. 아가씨는 유난히 마음이 약해서 불쌍한 사람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죠. 그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하루 종일 졸라 어떻게든 도와주게 만들었습니다. 아가씨는 어려서부터 고집이 아주 셌거든요.”
강 총관은 가볍게 웃었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혼인을 한다고 해서 갑자기 행실이 단정해질 리는 없겠지만, 영령 아가씨의 착한 본성도 어디로 가지 않습니다.”
슥.
운현을 돌아보며 강 총관은 조용히 말했다.
“도련님이라면 영령 아가씨도 마음을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제가……, 말입니까?”
강 총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마 영령 아가씨는 현모양처가 될 겁니다.”
문득 운현은 하영령을 떠올렸다.
자그마한 정자에 앉아 단아한 모습으로 책을 읽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생각해 보았다.
지금과 다른 수수한 옷과 온화한 웃음을 머금은 그녀를.
‘훗.’
그러나 그 상상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도도하게 술잔을 들어 올리는 그녀의 모습과 인상적인 눈매가 떠오른 탓이다.
“후후후.”
갑자기 웃음을 흘리는 운현의 모습에 강 총관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도련님?”
“감사합니다.”
운현은 웃음을 머금은 채 말했다.
“적어도 제가 일방적으로 강요당하고 있다는 생각은 없어졌습니다. 어쩐지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것 같군요.”
“도련님.”
진지한 눈빛으로 강 총관이 말했다.
“항상 냉정한 마음으로 거래에 임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지만, 때로는 손해를 감수할 때도 있습니다. 그것은 눈앞의 이익보다 더 중요한 것을 지켜야 할 때입니다. 때로는 신용이기도 하고, 혹은 도의이기도 하지요.”
강 총관은 강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거래에도 마음이 있는 법입니다. 설령 손해를 보더라도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만은 절대 잊으시면 안 됩니다.”
“네.”
부드러운 웃음을 지으며 운현이 말했다.
“명심하겠습니다. 강 총관. 그리고, 고맙습니다.”
운현의 표정은 한결 편안해 보였다.
하지만 강 총관은 착잡한 표정을 거두지 못했다.
지금 운현은 비록 웃고 있었지만, 그 웃음은 가볍고 그늘은 깊기만 했다.
강 총관과 헤어진 운현은 어둠이 내려앉은 저택을 잠시 거닐었다.
이리저리 발길을 옮겨 보았지만 마음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그의 발길이 향한 곳은 첫날 왔었던 작은 뒤뜰이었다.
“후우.”
운현은 투박한 나무 의자에 털썩 몸을 기댔다.
자신도 모르게 어깨가 처지는 것을 느끼며 운현은 고개를 숙였다.
깍지 낀 자신의 두 손이 바로 눈앞에 보였다.
피식.
자조적인 웃음이 새어 나왔다.
굳은 살 하나 없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손.
“서원이든, 상단이든이라…….”
운현은 고개를 뒤로 젖히며 자조적으로 중얼거렸다.
“한 방에 인생역전이군.”
“그래서, 좋아요?”
문득 들려오는 여인의 목소리에 운현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숙부의 딸, 사촌동생 운희연이 서 있었다.
“아, 희연 누이…….”
“아주 가관이군요.”
운희연은 매서운 눈초리로 운현을 쏘아보았다.
자박 자박.
운현의 바로 앞에서 그녀는 발길을 멈췄다.
“……정말 실망이에요. 그래도 뭔가 보여 주는 것 같더니, 결국 선택한 게 여자 하나 잘 잡아서 팔자 고치는 거예요?”
운현을 똑바로 바라보며 운희연은 말했다.
“정말로 그런 속물이었어요?”
운현은 씁쓸한 웃음을 머금었다.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며 운현은 말했다.
“……그래도 그게 현실이라는 거겠지.”
의도하지 않은, 그리고 자신의 생각과는 다른 말이 운현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그것은 어쩌면 운현 스스로에게 하는 말 같기도 했다.
“생활은 현실이야. 그것도 아주 냉정한…….”
운희연의 눈매가 꿈틀했다.
설마 운현이 이런 식으로 말할 줄 생각하지 못했던 그녀는 더욱 화가 났다.
“그래서, 한 번뿐인 혼인을 이런 식으로 결정한단 말이에요?”
“혼인도 현실이니까.”
여전히 운희연의 시선을 피한 채 운현은 말했다.
“그리고 꼭 한 번뿐이라는 법도 없고…….”
운희연의 안색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아직 어린 그녀의 감수성으로는, 운현의 말은 뻔뻔한 파렴치한의 말이나 다름없었다.
“무, 무슨 소리예요!”
그녀는 새빨개진 얼굴로 소리쳤다.
“마, 말도 안 돼! 이 악당! 사기꾼! 바퀴벌레!”
운희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정말 실망이야!”
운현을 향해 그렇게 소리치고, 운희연은 도망치듯 뛰어가 버렸다.
탁탁탁.
“후우.”
뛰어가는 희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운현은 조용히 말했다.
“나도 실망이야.”
고개 숙인 운현의 눈에 자신의 고운 손이 보였다.
“……나도.”
운현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
태평맹 대외 총괄 군사의 집무실.
당문의 눈꽃, 당문설화 당설련은 살짝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창룡지회라고요?”
“네. 귀주성 준의에서 영웅맹 중경 지부 소속 무사 셋이 그들에 의해 피살되었다고 합니다.”
중년의 무인은 정중한 어조로 그녀에게 보고했다.
“그들의 정체는요? 어느 문파 소속이지요?”
당설련은 태평맹 대외 총괄 군사였다.
영웅맹과 함께 천하를 양분하고 있다는 태평맹의 핵심 중 핵심 요직이다.
“정체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들은 영웅맹에 맞설 자는 창룡검주뿐이라 하며, 스스로 창룡의 뜻을 따르는 창룡지회라고 칭했다 합니다.”
바스락.
당설련은 중년 무인이 내민 보고서를 급히 살펴보았다.
잠시 후, 당설련의 고운 눈썹이 일그러졌다.
일이 어찌 된 것인지를 직감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 쓸데없는 짓들을…….”
창룡지회라는 자들은 ‘창룡의 뜻’을 따르겠다고 선언했다.
창룡검주가 아니라 그의 뜻을.
그 이유를 당설련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들 중에 창룡검주가 없기 때문이고, 창룡검주가 나타난다 해도 언제든 빠져나갈 여지를 남기기 위해서다.
“영웅맹의 반응은요?”
“구체적인 대응은 없습니다.”
당설련은 눈살을 찌푸렸다.
“중경 지부의 무사 셋이 죽었는데 대응이 없어요?”
“네. 영웅맹에 불만을 품은 자들의 지엽적인 소란으로 여기는 모양입니다. 항주 영웅맹은 중경 지부에 대응을 일임했고, 중경 지부는 이미 손을 뗀 것으로 보입니다.”
“말도 안 되는…….”
당설련은 믿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지엽적인 소란이라 해도 영웅맹의 사람이 죽었다.
무림맹이었다면 상상도 못 할 일이다.
‘무슨 생각이지? 염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