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9화. 혼담(婚談)
운현은 침착하게 그리고 최대한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저는 아가씨와 결혼하고 싶은 마음도 없고 그럴 의도도 없습니다. 아니, 그럴 형편도 되지 않습니다.”
단언하듯 운현은 말했다.
“그러니 제가 당신과 결혼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흥.”
하영령은 코웃음을 쳤다.
“아주 유치 찬란하네요.”
비웃음을 흘리며 그녀는 말했다.
“퇴짜맞고 나서 기껏 하는 말이 ‘나도 너 싫어’예요? 좀 더 솔직해지는 게 어때요?”
운현은 순간 속에서 울컥하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강 총관의 말을 떠올리며 애써 내리눌렀다.
“……아가씨.”
“왜요?”
하영령이 턱을 치켜들고 운현을 쳐다본다.
할 말이 있으면 해 보라는 식이다.
“이런 데 올 시간 있으면 책이라도 좀 읽고 예의가 무엇인지 배우십시오.”
운현은 말했다.
“입어례라고 하지 않습니까?”
입어례(立於禮).
예에 선다는 이 말은 곧 예의를 아는 것이 사람의 기본이자 근본이라는 뜻이다.
익히 알려진 이 말로 운현은 상대의 무례를 꼬집은 것이다.
그러나 상대가 하영령이라는 것을 간과한 것이 운현의 실수였다.
“뭐, 뭐라고?”
덜컥.
운현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더 이상은 시간낭비에 불과했다.
“야, 야! 거기 안 서?”
하영령이 발끈하고 일어섰지만 운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 나갔다.
무례한 사람에게는 인사조차 아까웠다.
“야……, 야아!”
하영령이 손가락질까지 하며 불렀지만 이미 운현은 나가 버린 뒤다.
펄럭이는 휘장만이 그녀의 손가락 끝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저게 지금! 내 치맛자락을 붙들고 매달려도 모자랄 판에!”
하영령은 씩씩거리며 말했다.
물론 치맛자락을 붙들어도 결혼해 줄 생각은 절대 없다.
하지만 그래도 모자랄 판에 오히려 자존심에 상처를 내고 훈계까지 하다니, 하영령은 약이 바짝 올랐다.
“아이씨.”
입술을 깨물어 보았지만 이미 상대방은 가고 없다.
하영령은 털썩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술잔에 남은 술을 단번에 들이켰다.
탁.
술잔이 부서져라 탁자에 내려놓았지만 화는 풀리지 않았다.
면전에서 이렇게 무시를 당하는 일은 그녀에게 지극히 낯선 일이었기 때문이다.
“입어……. 뭐라고?”
하영령은 운현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을 곱씹어 보았다.
그리고 눈살을 찌푸리며 자신의 옷을 이리저리 쳐다보았다.
광주의 어느 여자라도 부러워할 만한, 세련되고 좋은 옷이다.
“이 옷이 뭐가 어때서? 뭘 입으라는 거야?”
하영령은 신경질적으로 손을 흔들었다.
화려한 장신구가 그녀의 손목에서 무심히 반짝이고 있었다.
***
항주 영웅맹, 맹주전.
붉은 비단옷을 차려입은 염중부는 눈살을 찌푸렸다.
“창룡지회?”
마치 황제의 보좌처럼 화려하게 장식된 긴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앉은 그는, 바로 영웅맹 맹주인 철혈사왕 염중부였다.
“네. 창룡의 뜻을 따르는 자들이라 합니다.”
“창룡검주가 모습을 드러냈단 말인가?”
그자들이 말하는 ‘창룡’이 누구를 뜻하는지는 묻지 않아도 뻔했다.
염중부의 말에 수하가 대답했다.
“그렇지는 않은 듯합니다.”
수하는 중경 지부의 보고서를 서탁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하지만 중경 지부의 하급 무사 둘과 지역 책임자 한 명이 준의의 문파 분쟁에 개입했다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준의?”
“귀주성의 지방도시입니다.”
귀주성이라면 중경에서 결코 가까운 곳이 아니다.
염중부는 중경 지부가 구태여 그런 지방도시의 분쟁에 개입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아마 돈을 제법 크게 받았으리라.
“습격자들은 창룡검주만이 영웅맹에 맞설 수 있는 자라 하였으며, 자신들은 창룡의 뜻을 따르는 창룡지회라고 칭하였습니다.”
팔락.
염중부는 보고서를 펼쳐 들었다.
귀주성 준의에서 일어난 사건 개요를 살펴보며 염중부는 생각에 잠겼다.
영웅맹을 구성하는 큰 축인 수로채 연합과 녹림은, 본래 그들이 그러하듯 조직적인 체계가 갖추어져 있지 않았다.
그러나 주먹구구식으로 장강의 패권을 차지할 수는 없는 법.
혈공자 문왕은 이미 치밀한 조직 체계를 구상해 놓고 있었다.
물론 조직은 구상만으로 되지 않는다.
수로채 연합과 녹림을 통제하려면 강력한 지도력은 필수였다.
그런 면에서 철혈사왕 염중부는 더없는 적임자였고, 덕분에 영웅맹은 사람들의 예상과 달리 빠르게 그 조직 체계를 갖춰 나가고 있었다.
비록 여기저기서 온갖 문제들이 터져 나오고 있었지만 말이다.
“창룡지회라……. 쯧.”
염중부는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대책을 강구하라 이를까요?”
“필요 없다.”
툭.
철혈사왕 염중부는 가볍게 보고서를 내던졌다.
“네? 그게 무슨…….”
염중부는 귀찮은 듯 말했다.
“지방 소도시에 기껏 서너 명이 나타나 난동을 피운 일 아니냐? 이런 일들까지 일일이 대응할 정도로 맹에 할 일이 없는 줄 알아?”
기껏이라 말하기엔 검기발현의 고수인 데다 노골적으로 영웅맹을 적대한 일이다.
“허나…….”
슥.
무언가 말하려던 수하는 철혈사왕 염중부가 노려보자 아무 말도 못 하고 움츠러들었다.
“맹이 정색을 하고 나서면 그게 바로 놈들이 바라는 것이다. 다음부터 이런 일은 각 지부에서 알아서 처리하라고 하도록.”
노회한 염중부는 이것이 시선을 끌기 위한 수작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창룡지회가 진심이라면 어디든 영웅맹 지부를 쳤을 것이다.
멀리 떨어진 지방 도시에서, 별것 아닌 자들 셋을 죽이는 대신 말이다.
“그리고 앞으론 돈 준다고 아무 데나 사람을 보내는 일은 하지 말라고 엄히 전해라.”
“조, 존명!”
수하는 급히 고개를 숙이며 명을 받들었다.
지부에 할당한 상납금을 줄이지 않는 이상 실효성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말이다.
“지부 확장은 어찌 되었나?”
“유치를 원하는 문파들은 많으나 지역 수채나 산채와 이해관계가 얽혀 협의가 쉽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이무심 총채주의 반발이…….”
장강수로채 연합의 총채주인 철면무심 이무심은 소위 신녹림과 함께 영웅맹의 다른 한 축이었다.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수채 따위는 신경 쓰지 말라고, 내가 이미 말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이무심 정도는 염중부의 안중에도 없었다.
염중부의 목소리에는 은은한 분노마저 실려 있었다.
“사파든 정파든 그 지역을 장악할 만한 역량을 가진 문파를 지부로 선정해라. 알았나?”
“존명!”
“다음번에 또다시 같은 말을 하게 한다면 네놈의 목을 쳐 버리겠다.”
“조, 존명!”
영웅맹 내의 영향력으로 따지자면 수로채와 신녹림을 합쳐도 염중부 한 명에게 미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들의 무공이 염중부 앞에 감히 이름을 내밀 정도도 되지 못했기 때문이고, 영웅맹의 실제적인 힘 역시 그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수로채와 신녹림은, 굳이 말하자면 호랑이의 위세를 등에 업은 탐욕스러운 여우에 지나지 않았다.
“가 보도록.”
염중부의 말이 떨어지자 수하는 깊이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한 후에 서둘러 집무실을 나섰다.
아무도 없는 대전에서 염중부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창룡지회라…….”
창룡검주가 나타나는 것은 오히려 그가 기다리는 바다.
혈공자 문왕이, 그리고 아직까지 모습조차 본 적 없는 일대상인이 그에게 얼마나 집착하는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창룡검주 앞에서는 장강도, 영웅맹조차도 그들의 관심거리가 되지 못했다.
‘재미있군.’
한 손으로 턱을 괴며 염중부는 생각했다.
수채와 신녹림을 호가호위의 여우라지만, 철혈사왕 염중부 역시 호랑이는 되지 못했다.
영웅맹의 맹주는 자신이나 주인은 아니다.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발목에 채워진 족쇄를 끊어야 했다.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창룡검주에 의해 가능한 일일지도 몰랐다.
삼태상에 의해 단전이 부숴진 그가, 만의 하나라도 돌아올 수 있다면 말이다.
“재미있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철혈사왕 염중부는 중얼거렸다.
무림맹이 불타 버린 그 자리에 쌓아 올린 영웅맹의 대전에서, 염중부는 서늘한 눈동자를 빛냈다.
***
광주, 하청상단
“주 총관!”
젊은 여인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주 총관은 움찔했다.
그 목소리의 주인을 익히 잘 알고 있는 때문이고, 충분히 찔릴 만한 일이 있었던 까닭이었다.
“……여, 영령 아가씨.”
하청상단의 주 총관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돌아섰다.
“물어볼 게 있어.”
성큼성큼 다가온 하영령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입어례(立於禮)가 뭐야?”
“네?”
너무나 의외의 질문에 주 총관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하영령의 눈매가 즉시 일그러졌다.
“입어례가 무슨 뜻이냐고!”
그녀는 참을성이 없기로도 유명하다.
주 총관은 얼른 기억을 더듬었다.
“에, 입어례라는 것은, 그러니까 그게 아주 유명한 공자님 말씀인데, 어디였더라? 계씨편이었나 태백편이었나…….”
하영령이 인상 쓰는 걸 발견한 주 총관은 급히 말했다.
“아, 아무튼 입어례란 예(禮)에 선다(立)는 뜻입니다.”
“뭐?”
“그러니까 예의를 아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는 뜻이죠. 예의를 잘 지키고 언제 어디서라도 예의를 잃지 않아야 올바른 사람이다. 뭐, 이런 뜻입니다. 공자님이 워낙에 예를 좋아하셔서리…….”
하영령이 주 총관의 말을 끊었다.
“그러니까 예의를 모르면 사람도 아니라는 뜻이라고?”
“그렇게까지야…….”
주 총관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설마 그 예의바른 공자님께서 그런 뜻으로 말씀하셨을까 싶은 것이다.
그러나 하영령은 가차 없었다.
“그거야, 아니야?”
날카로운 시선으로 째려보는 하영령의 모습에 주 총관은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겁니다. 그거요.”
주 총관은 연신 흐르는 땀을 닦았다.
“그렇다 이거지…….”
하영령은 입술을 깨물며 짜증이 가득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주 총관은 지금 하영령이 생각하는 누군가에게 마음으로 애도를 표했다.
“알았어.”
궁금증이 풀리자 하영령은 즉시 돌아섰다.
“저기, 아가씨!”
“왜?”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하영령이 돌아보았다.
주 총관은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가끔은 아버님께 문안이라도 드리시는게…….”
“주 총관, 나 여기 잔소리 들으러 온 거 아니거든?”
하영령이 인상을 쓰며 말하자 주 총관은 찍소리도 못 하고 어깨를 움츠렸다.
자박.
하영령은 발길을 재촉했다.
붉게 단장한 손톱을 살짝 깨물며 그녀는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나더러 예의도 모르는 무식한 년이라고 말한 거지? 그것도 내 눈을 빤히 보면서 말이야.”
그런 말을 운현이 한 적은 없지만 하영령에겐 마찬가지였다.
하영령은 생각할수록 치솟는 짜증을 가눌 수 없었다.
손톱을 잘근잘근 씹으며 거침없이 발을 옮기던 그녀는 문득 자신의 손을 쳐다보고는 소리 질렀다.
“꺄악! 내 손톱!”
아침에 정성들여 다듬은 손톱이 엉망이 되어 있었다.
물론 그녀 자신의 입으로 씹은 결과다.
그러나 그 원망은 엉뚱하게도 그녀에게 충고를 늘어놓은 한 사내에게 향하고 있었다.
“어디 두고 봐!”
하청상단의 막내딸, 하영령은 표독스러운 표정으로 그렇게 외쳤다.
***
“거기 앉거라.”
운일평은 운현에게 자리를 권했다.
운현은 예를 표하고 맞은편에 앉았다.
“오늘 너를 보자고 한 것은 긴히 할 이야기가 있어서다.”
숙부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운현은 내심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혹시 무언가 일이 잘못되었나 싶어서이다.
“실은 네게 제의를 해 온 상단이 있다.”
운현은 귀를 기울였다.
혹시 자신을 채용해 줄 상단이 나타났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헌데…….”
운일평은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잠시 후, 그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돌려 말한들 무엇이 달라지겠느냐?”
숙부 운일평은 고개를 들어 운현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하청상단에서 너에게 혼담이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