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8화.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
하용한은 차분히 득실을 따져보았다.
가진 것이 없는 정도라면 그다지 문제 될 것이 없다.
하청상단에는 낙향 문사 한 사람쯤 먹여 살릴 수 있는 여유가 충분하고도 넘쳤으니까.
‘적당한 서원을 하나 열어 주고 밀어준다면…….’
상대가 학사를 지낸 문사라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이 기회에 아예 딸을 상계와 무관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도 괜찮은 일이었다.
게다가 전시의 급제자에다 북경에서 학사를 했다니 서원의 장래성도 꽤 있어 보였다.
예로부터 교육자는 만인의 존경을 받는 직업 아니던가?
‘사위가 서원의 원장이라……. 아니, 학장이라고 하는 게 더 좋겠군.’
학장(學長).
어감도 좋았다.
지역 사회의 번듯한 교육계 관계자와 사돈이라면 하청상단에도 결코 나쁜 일은 아닐 것이다.
‘좋군.’
하용한은 이 혼사가 이익이 남는 거래라는 것을 확신했다.
“지금 어디에 머물고 있다고?”
“운가상단입니다. 운일평의 조카라고 합니다.”
“운가상단이라…….”
일이 되려면 하늘이 돕는다.
“요즘 운가상단이 좀 어렵지?”
“화남상단의 일이 끊겼다 하니 아무래도 타격이 클 것입니다.”
“그러면 그쪽에서도 이번 혼담에 적극적으로 나설 가능성이 있겠군.”
“아주 상당하겠지요.”
“흐음.”
하용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은 길었지만 결단은 빨랐다.
“좋아.”
만족한 미소를 지으며 하용한은 주 총관에게 말했다.
“추진하게!”
“네!”
주 총관은 씩씩하게 대답했다.
***
“정말 화려하군요.”
자리에 앉은 운현은 주루를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맞은편에 앉던 강 총관이 의외라는 표정으로 물었다.
“여기보다는 북경의 주루가 더 화려하지 않습니까?”
“아, 그게……. 이런 곳은 별로 와 본 적이 없어서요.”
별로 없는 것이 아니라 거의 없었다.
서원에서는 동료들의 권유에도 애써 고개를 저었고, 황궁에선 감히 상상도 못 하는 일이었던 데다가, 그나마 항주의 서호변에서 혼자 술을 몇 잔 마셔 본 것이 고작이다.
이곳 광주에서는 더군다나 불가능한 일이었으니, 아무래도 자신은 화류계와는 인연이 먼 듯했다.
“그렇습니까?”
강 총관은 미심쩍은 표정이었다.
대도시 북경에서 십 년을 넘게 지냈는데 주루 한 번 가 보지 않았다는 것을 납득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고지식한 학사여서 그랬나 생각하며 강 총관은 말했다.
“그래도 가끔은 이런 곳도 기분 전환이 되지요.”
두 사람이 이곳 난화주루에 온 것은 강 총관의 권유였다.
운현의 모습은 크게 밝아졌다.
연약한 체력은 여전했지만 몇 달 전 모습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가끔씩 얼굴에 스치는 어두운 그림자를 강 총관은 놓치지 않았다.
술이라도 마시면 터놓고 이야기하지 않을까 싶어, 이렇게 함께 난화주루에 오게 된 것이다.
“그동안 상단 일을 익히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아닙니다. 오히려 강 총관께서…….”
강 총관은 고개를 저었다.
“같은 거래 조건이라 할지라도 상인에 따라 그 결과는 천차만별이지요. 도련님께서는 아주 좋은 결과를 내고 계십니다.”
그 말에도 운현의 표정은 쉽게 펴지지 않았다.
침묵하던 운현은 나지막이 물었다.
“……제가 잘할 수 있을까요?”
강 총관은 빙긋이 웃었다.
“도련님께 부족한 것은 실무 경험뿐입니다. 차근차근 배워 가신다면 더욱 좋은 결과가 있을 것입니다.
‘좋은 결과라…….’
운현은 나지막이 강 총관의 말을 되뇌었다.
무엇이 좋은 결과일까?
원하는 대로 된다고 해서 그것이 정말로 좋은 것일까?
아니, 애초에 자신이 무엇을 원하긴 하는 것일까?
상념에 빠진 운현을 강 총관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허어,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운현의 어두운 그림자가 술이나 향락 때문이 아님을 강 총관도 이제는 안다.
새벽부터 일어나 빗자루를 드는 그가 성실하지 않다면 세상에 누가 성실하다 말할 수 있을까?
몇 가지의 요리와 가벼운 술을 주문한 후, 다시 강 총관이 물었다.
“지내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좋습니다. 숙부님께서도 잘 대해 주시고요.”
“아직도 새벽에 마당을 쓰시더군요.”
“그냥 마음을 가다듬을 겸, 하고 있습니다.”
가다듬는다는 것은 곧 마음이 번잡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강 총관이 내심 염려를 하는데 문득 운현이 물었다.
“아, 그러고 보니 희연 누이가 절 잘 따른다고 숙부께서 말씀 하시던데…….”
강 총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사실 아가씨는 도련님을 항상 만나고 싶어 했습니다. 서찰을 보내려고도 했었지요.”
“제게요?”
강 총관은 술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상단 가문에서 학사인 사촌이 있다고 하니 꽤 동경이 되었던 모양입니다. 그게 벌써……, 오륙 년 전이지요?”
“……옛날 이야기군요.”
오륙 년이나 더 된 예전 이야기다.
운현은 씁쓸한 표정으로 술잔을 들었다.
“하지만 지난번 도련님의 옷은…….”
그때였다.
“실례해요.”
갑작스럽게 끼어든 낭랑한 목소리에 강 총관의 말이 끊어졌다.
고개를 든 강 총관은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여, 영령 아가씨!”
화려한 비단옷을 입은 아리따운 젊은 아가씨는 바로 하영령이었다.
고급스러운 장신구를 멋들어지게 치장한 그녀는 사뭇 불쾌한 표정으로 운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덜컹.
“오랜만에 뵙습니다, 영령 아가씨.”
강 총관이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했다.
“오랜만이예요, 강 총관.”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그녀가 말했다.
강 총관은 운현에게 그녀를 소개했다.
“도련님, 이 분은 하청상단의 하영령 아가씨입니다.”
강 총관이 정식으로 소개를 하니 인사를 안 할 수가 없다.
운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운현이라 합니다.”
운현의 인사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답례를 하지 않았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어딘가 화가 난 듯한 표정이었다.
“잠시 이야기 좀 해요.”
쌀쌀맞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한 하영령은 그대로 몸을 돌렸다.
운현이 따라올 것을 의심치 않는 행동이었다.
“그건 곤란합니다.”
하영령의 발이 멈췄다.
그녀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운현을 바라보았다.
“뭐라고요?”
고운 그녀의 눈꼬리는 살짝 올라가 있었다.
하지만 상대의 무례에 이미 운현의 기분도 상해 있던 터다.
“저는 총관님과 함께 있던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찌 이분을 혼자 두고 아가씨를 따라갈 수 있겠습니까? 이야기를 하고 싶다면 총관님께 먼저 양해를 구하십시오.”
이치에는 지극히 합당한 말이었으나 여심(女心)에는 맞지 않았다.
더구나 하영령처럼 이미 화가 나 있는 상태의 아가씨에게는 말이다.
“지금 당신이…….”
그녀의 앙칼진 목소리가 막 튀어나오려는 순간, 강 총관이 운현에게 말했다.
“도련님. 저는 괜찮습니다.”
“하지만 강 총관.”
강 총관은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아가씨께서 찾아오신 것을 보니 분명 중요한 일일 것입니다. 일단은 아가씨의 뜻대로 하시지요.”
오랫동안 상단의 일을 보아 왔던 강 총관은 분위기를 파악할 줄 알았다.
운현은 불만스러웠지만 그의 조언을 따르는 것이 좋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강 총관.”
강 총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벅.
“도련님.”
지나치는 운현에게 강 총관이 슬며시 속삭였다.
“냉정하게 거래에 임하지 않으면 항상 손해를 보게 되는 법입니다.”
그 말에 운현은 퍼뜩 정신이 들었다.
아직 상대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자신이 지나치게 감정적이 된 것을 깨달은 것이다.
“감사합니다.”
운현은 나지막이 대답했다. 그리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하영령에게 말했다.
“기다리게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가시지요.”
달라진 운현의 태도에 하영령의 눈동자에 이채가 돌았다.
“흥.”
그러나 그뿐, 하영령은 코웃음을 흘리며 발을 옮겼다.
그녀가 향하는 곳은 난화주루의 이 층으로 올라가는 커다란 계단이었다.
난화주루의 이 층은 아무나 들어가는 곳이 아니었다.
돈도 돈이지만, 유명한 가문이나 상단이 아니면 올라가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하영령이 들어선 곳은 그런 난화주루 이 층의 작은 방들 중 하나였다.
“앉아요.”
방에 들어선 하영령은 크고 화려한 붉은색 의자에 털썩 몸을 기대며 말했다.
작고 아담한 방이었지만 벽 대신에 두꺼운 휘장을 드리워서인지 폐쇄적인 느낌은 거의 없었다.
이런 곳은 처음인지라 운현은 신기한 눈빛으로 이리저리 둘러보며 맞은편 의자에 조심스레 앉았다.
사락.
“참, 내.”
그런 운현의 모습을 쳐다보던 하영령이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운현은 기분이 상했지만 강 총관의 말을 떠올리며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혔다.
“무슨 용건이십니까?”
운현이 정중하게 물었다.
방이 작아서 하영령과 거리가 가깝다.
새삼 다시 본 하영령은 꽤나 예뻤다.
세련된 옷과 화려한 장신구는 그녀의 아름다움을 더욱 빛내고, 한창 나이인 그녀의 성숙한 몸매는 무시 못 할 매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주루의 은근한 조명 역시 그녀의 모습을 더욱 매혹적으로 보이게 했다.
달칵.
하영령은 옥빛 술잔에 손을 뻗었다.
“전시의 급제자라면서요? 북경에서 학사도 지내고.”
술잔을 들고 그녀가 물었다.
운현은 내심 불쾌했다.
묻는 말엔 대답도 없이 자기 할 말만 하는 하영령의 태도가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강 총관의 충고를 떠올리며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렇습니다.”
“파직당하고 폐인 꼴로 돌아왔다던데……. 술? 도박? 아니면 여자?”
다 안다는 듯 하영령이 물었다.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어떻게 된 게 이 동네는…….’
묻는 말이 사촌동생 운희연과 한마디도 틀림이 없었다.
아마도 숱한 사람들이 그 문제로 폐인이 되는 모양이리라.
“아주 밑바닥까지 탈탈 털렸나 봐요? 후후.”
하영령은 술잔을 입술에 가져가며 조소하듯 말했다.
그녀의 붉은 입술이 향기로운 술을 머금었다.
탁.
술잔을 내려놓은 하영령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래, 지금 기분이 어때요?”
그녀는 운현을 똑바로 쳐다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하늘에서 금덩이라도 떨어진 것 같죠? 이게 웬 떡인가 싶기도 할 거고.”
운현을 향한 그녀의 시선은 날카로웠다.
분명한 적대감을 그 눈빛에 담고, 하영령은 조롱하듯 말했다.
“하지만 이제 그 꿈을 깨게 되었으니, 어떡하죠?”
운현은 화가 나기보다 오히려 어리둥절했다.
상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감을 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저기, 죄송하지만 지금 무슨 말씀이신지…….”
“아! 모른 척하는 거예요? 이런 거 아주 질색인데.”
그녀는 짐짓 과장된 몸짓으로 고개를 저었다.
하영령의 아름다운 눈동자가 똑바로 운현을 향했다.
“분명히 말하지만.”
붉은 입술을 빛내며 그녀가 말했다.
“내가 당신과 결혼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네에?”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와락 얼굴을 찌푸렸다.
너무나 어이없는 그녀의 말에 강 총관의 충고조차 잊고 속마음을 그대로 드러내 버린 것이다.
“뭐, 뭐예요? 지금 그 표정.”
하영령의 고운 눈썹이 일그러졌다.
하늘이 무너진 것 같은 표정이라면 이해한다.
충격과 낙심에 빠진다 해도 어쩌면 당연하리라.
그러나 저런 말도 안 되는 괴상한 표정이라니.
마치 ‘네 주제에 감히 어떻게 그런 생각을?’이라고 말하는 것 같지 않은가?
하영령은 와락 기분이 상했다.
“후우우.”
운현은 긴 한숨을 쉬며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 모습이 하영령의 자존심을 더욱 건드리고 있다는 것도 운현은 알지 못했다.
‘또 오해인가? 지긋지긋하군.’
아주 질리도록 당해온 일이다.
운현은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며 고개를 들었다.
“아무래도 사람을 잘못 찾으신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