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7화. 젊은 재인(才人)
박 공공의 명을 받은 금의위는 비단 두루마리를 들고 지체 없이 대전을 나갔다.
대전 바깥에는 어두운 밤임에도 불구하고 일천 금의위가 창검을 뽑아 든 채 질서 정연하게 도열해 있었다.
저벅, 저벅.
중무장한 금의위는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동창 병필태감 박 공공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서.
“후후훗.”
박 공공은 느긋한 걸음으로 대전을 나왔다.
금위위들이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며, 그는 만족한 미소를 떠올렸다.
지난 수개월간 물밑으로 팽팽하게 벌어졌던 황실의 권력 투쟁은 오늘로써 그 막을 내렸다.
내일의 하늘이, 바로 이 순간 그의 손에 의하여 결정된 것이다.
자박 자박.
그가 대전을 벗어나자 금의위 무사들이 그를 호위했다.
가볍게 옮기는 그의 걸음을 따라 붉은색 태감의 자락이 자금성의 불빛 아래 물결치듯 흔들렸다.
자박.
이윽고 한 전각 앞에 도착한 그는 수행하던 금의위들을 물렸다.
그리고 홀로 조심스럽게 전각 안으로 들어갔다.
“전하.”
깊숙이 고개를 숙인 박 공공의 목소리에서는 끝없이 자신을 낮추는 그의 조심스러움이 묻어나고 있었다.
“신, 전하의 명을 받들어 방금 역적의 수괴를 잡아들였나이다.”
“오오. 그러한가?”
불도 밝히지 않은 대전, 어둠 속에서 부드러운 음성이 박 공공에게 답했다.
사뭇 밝은 목소리였지만 그 목소리에 묻어나는 떨림은 그가 이 소식을 얼마나 초조하게 기다렸는지를 말해 주고 있었다.
“그의 조력자들 또한 오늘 밤이 가기 전에 남김없이 잡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박 공공은 머리가 땅에 닿을 듯 조아리며 더욱 깊이 허리를 숙여 말했다.
“이로써 황실을 어지럽히던 역적의 무리들을 모두 쓸어 내게 되었으니, 모두 전하의 하해와 같은 은덕이옵니다.”
“……수고했네. 박 공공.”
짧은 말이었지만 그 목소리에는 말할 수 없는 감회가 서려 있었다.
격동을 이기지 못하고 꽉 쥔 손은 그동안 그가 겪어 온 고초를 말해 주고 있었다.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던 그는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것을 보게.”
용포를 입은 그가 내민 것은 또 하나의 붉은 비단 두루마리였다.
박 공공은 공손한 자세로 두 손을 내밀어 두루마리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그것을 펴보았다.
“영웅맹…….”
붉은 두루마리를 살피던 박 공공이 나지막이 중얼거린다.
“내일, 그대에게 황상의 조칙이 내려질 것일세.”
팍, 팍.
박 공공은 즉시 소매를 털고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쿵.
“그대에게 도찰원(都察院)의 모든 권한을 부여하니, 감찰어사대를 지휘하여 역적의 무리를 남김없이 색출하고 그 죄상을 낱낱이 파헤치게. 감히 황실을 능욕하려 한 죄를, 반드시 징치해야 할 것이네.”
쿵.
박 공공의 이마가 바닥을 울렸다.
“소신, 목숨을 다해 전하의 성지를 받들겠나이다.”
쿵, 쿵.
묵직한 소리는 두 번 더 이어졌다.
붉은 담으로 둘러싸인 황금색의 지붕 아래에서, 강호 무림의 또 다른 풍운이 시작되고 있었다.
***
운현이 운가상단에 머무른 지도 어느새 석달이 지났다.
멋진 새 옷을 입고 한 손에 서책을 들고 있는 운현의 모습은 누가 봐도 멋들어진 학자의 풍모 그대로였다.
비록 그가 들고 있는 서책은 고금의 경전이 아니라 상단의 실무를 기록한 서책과 장부였지만, 모습만 보아서는 마치 심오한 학문이라도 닦는 듯 보였다.
덕분에 폐인 취급을 받던 예전과는 달리, 운가상단 내에서 운현의 평가는 높이 올라가고 있었다.
운현이 여전히 이른 새벽의 빗자루질로 하루를 시작한다는 것도, 이제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당연한 사실이 되어 가고 있었다.
“부르셨습니까? 숙부님.”
운현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두 달 전의 궁색한 듯한 인사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숙부 운일평의 표정 또한 나쁘지 않았다.
점잖은 자세로 운현이 자리에 앉자 운일평이 말했다.
“요즘 상단에 대해 공부하고 있다고?”
“네. 그렇습니다.”
운현은 대답했다.
“강 총관의 도움으로 상단 업무에 대해 배우고 있습니다.”
“좋은 생각이다.”
운일평은 말했다.
“강 총관에게 도움을 청한 것은 아주 잘한 일이야.”
강 총관의 도움을 받는 것은 운가상단에서 가장 확실한 조력자를 얻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운일평은 조카가 현명한 선택을 한 것이 기뻤다.
“내가 강 총관에게 말해 둘 터이니 가끔 상단의 일도 보아 두거라. 공부에 도움이 될 것이다.”
“감사합니다. 숙부님.”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는 운현의 모습을 바라보던 운일평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상단이 이런 형편만 아니었더라도 운현이 일할 곳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운가상단은 벼랑 끝에 몰린 형국이다.
“미안하구나.”
밑도 끝도 없는 말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진심을 운현은 알 수 있었다.
“아닙니다. 숙부님. 이곳에 있게 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리 생각해 주니 고맙다.”
운일평은 착잡한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네 일은 내가 따로 알아볼 터이니 너무 염려하지 말거라. 열심히 하면 좋은 결과가 올 것이다.”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러고 보니 희연이는 종종 보느냐?”
희연이라면 숙부의 딸이자 사촌동생인 운희연을 말한다.
“가끔 보고 있습니다만…….”
그 가끔은 대부분 새벽 빗자루 질을 할 때다.
운희연은 물끄러미 운현을 쳐다보다가 빗자루질이 끝나면 보란 듯 마당을 가로질러 사라지곤 했다.
“그래. 그 아이가 너를 잘 따르는 듯하니 좋은 얘기라도 해 주려무나. 딸자식이라고 하나 있는 것이 아비에겐 아무 말도 하질 않으니……. 쯧.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잘 따른다고?’
운일평의 말은 의외였다.
잘 따르기는커녕 운희연은 운현을 볼 때마다 톡톡 쏘아 대지 않았는가?
그러나 부녀간의 일을 더 물어볼 수는 없었다.
“너도 바쁠 터인데 그만 물러가 보도록 해라.”
운현은 숙부 운일평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날부터 운현은 강 총관과 함께 광주 상단들을 돌아다녔다.
조용하고 부드러운 운현의 모습은 곧 다른 상단 관계자들의 이목을 끌었다.
더구나 전시(殿試)에 합격하고 북경에서 학사까지 지냈다는 그의 이력은, 강 총관의 말대로 충분히 상단 관계자들의 관심을 끌 만한 것이었다.
학자의 풍모를 지닌 젊은 재인(才人)에 대한 소문이 광주 상계에 퍼지는 것은 금방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운현이나, 심지어 강 총관마저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엉뚱한 결과를 가져왔다.
***
하청상단은 꽤 규모가 큰 중견 상단이었다.
광주의 거대 상단들과 든든한 거래를 유지하고 있었고, 일 년에 몇 차례는 자체적인 상행을 통해 큰 이윤을 남기기도 했다.
하청상단에서 먹여 살리는 중소 상단만 해도 한둘이 아니었으니, 광주 상계에서 그 영향력을 짐작할 만했다.
“후우.”
바로 그 하청상단의 단주, 하용한은 땅이 꺼져라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은 요 몇 년간 그의 속을 푹푹 썩이고 있는 아주 고질적인 문제 때문이었다.
“주위 사람들에게는 단단히 입막음을 시켜 놓았습니다.”
주 총관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정 대감 댁 자제가 다시 아가씨를 만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용한은 다시 한번 긴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우.”
속이 썩어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하나 있다는 딸자식이 이렇게 말썽을 부릴 줄은 생각도 못 한 일이다.
“이번엔 정 대감 댁 셋째 자제라 했던가?”
눈살을 찌푸리며 하용한이 묻자 주 총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정 대감 댁 셋째 자제라 하면 광주에서도 행실이 좋지 못하기로 소문난 자였다.
이 여자 저 여자 집적대는 것은 물론이고 유부녀까지 손을 뻗친다 하니 더 말해 무엇하랴.
물론 정 대감 댁 셋째 자제야 무엇을 하건 하용한이 알 바 아니다.
문제는 자신의 딸이 그자와 어울린다는 사실이었다.
“정 대감 측에서도 이 일을 쉬쉬하려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러니…….”
쾅.
“행실을 단정히 하라고 내 그렇게 말했는데도!”
하용한이 탁자를 내리치며 소리쳤다.
하지만 정작 그 말을 들어야 할 그의 딸은 자리에 없었다.
그저 주 총관만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을 뿐이다.
“한두 번이 아니지 않는가? 한두 번이! 대체 그 아이는 무슨 생각으로……!”
본인이 없으니 생각을 들을 수가 없다.
하용한은 한동안 분을 삭이지 못했다.
그의 딸, 하영령이 문제를 일으킨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유복한 가정에서 막내로 태어나 귀여움을 받고 자란 그녀는 새로운 것을 좋아하고 매사에 쉽게 싫증을 냈다.
본래 자존심이 유난하고 고집이 세더니 요즘엔 누구의 말도 듣지 않았다.
처음에는 어려서 그러려니 했다.
꽃다운 젊은 시절에 누군들 한 번쯤 그러지 않겠는가 여기며 넘어가기도 했다.
그런데 나이를 먹을수록 철이 들기는커녕 더 심해졌다.
이제는 딸이 정 대감 댁 자제와 어울려 다닌다고 하면 오히려 정 대감 쪽에서 염려할 정도가 된 것이다.
“저…….”
주 총관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주인의 심기가 대단히 불편하다는 것을 그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령 아가씨도 이제 혼기가 꽉 찼으니…….”
“그러니 더 문제 아닌가! 혼기도 꽉 찬 것이 대체 어쩌자고!”
하용한의 분노가 다시 일어났다.
주 총관은 급히 뒷말을 이었다.
“적당한 혼처를 골라 혼인을 시키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용한의 얼굴이 있는 대로 일그러졌다.
“누가 그걸 모르나? 혼처가 있어야지! 혼처가!”
문제는 바로 그것이었다.
혼기가 꽉 찬 처자가 행실이 좋지 않다고 동네방네 소문이 났으니 대체 어떻게 한단 말인가?
아무리 하용한의 눈에는 딸이 예뻐 보인다 해도, 광주 시내에 그녀의 품행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니 말이다.
괜찮다 싶은 혼처에 말을 넣어 보았지만 전부 다 완곡히 거절당한 지 오래였다.
“한 사람 있습니다.”
“하청상단의 딸을 아무 곳에나 시집보낼 수는 없네.”
하용한은 으름장을 놓듯이 말했다.
사랑하는 딸을 아무 곳에나 시집보내는 것은 죽어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전시의 급제자라 합니다.”
“……전시의 급제자?”
하용한의 눈빛이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전시는 과거 시험의 꽃이다. 세도를 떨치는 가문들이라 해도 쉽게 배출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전시의 급제자다.
“황궁에서 학사를 지낸 이력도 있다더군요.”
“학사? 황궁에서 말인가?”
하용한은 눈이 번쩍 뜨였다.
이 정도면 그냥 괜찮은 정도가 아니다.
“그런데? 뭔가 흠이 있을 것 아닌가? 나이가 너무 많은가? 그럼 안 되는데…….”
천성적으로 타고난 장사꾼인 하용한은 이런 괜찮은 조건의 혼처가 그냥 굴러오지 않았으리란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혼기가 꽉 찬 젊은 청년입니다. 얼마 전에 조정에서 파직을 당하고 운가상단에 식객으로 머물고 있다 합니다.”
“파직을 당해?”
즉 잘렸다는 이야기다. 하용한은 눈살을 찌푸렸다.
“혹시 문제가 있는 건 아닌가?”
그가 말하는 문제란 심각한 일에 연루된 경우다.
조정의 일이라면 가족은 물론 삼사대까지 불이익을 당하는 것도 흔한 일이니까.
“없습니다.”
주 총관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이미 뒤를 좀 알아보았습니다만, 적어도 문제가 될 만한 요소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조정의 일들은 절대로 외부에 알려지지 않는다.
그러나 위험인물로 낙인찍혔는지 여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그 정도로 심각한 일들은 지방 관청까지 공문이 하달되기 때문이다.
하청상단이 각별한 친분을 유지하는 관리들도 한두 명이 아니었고 말이다.
“조정에 최근 큰 일이 있었다고는 하는데, 그의 이름이 없는 것을 보니 아마 스스로 사직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운현에 대한 조사는 대부분 정황에 의거한 추측에 불과했다.
하지만 심각하게 문제 될 점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흠, 그럼 흠이라면 가진 것이 없다는 것 정도인가?”
“땡전 한 푼 없다고 합니다.”
주 총관은 유난히 땡전이라는 말을 강조했다.
“생긴 건? 멀쩡하고?”
“잘생긴 건 아닙니다만 아주 고고한 학자풍입니다. 얼굴에 학사라고 써 있는 것 같을 정도입니다.”
주 총관의 즉답에 하용한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흐음.”
하용한은 수염을 어루만지며 생각했다.
‘괜찮은데?’